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④

정화는 김창호의 행적을 미행이나 간접정보를 통해 얻기보다도 직접 대면하기로 했다. 업무가 밀려 일일이 챙길 시간도 없거니와 만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묵고 있는 호텔로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그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다음 날 오전 10시에 정화는 호텔 로비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스포티한 차림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젊은 동양남자가 앉아있는 걸 보고 그가 김창호라는 걸 직감했다. 정화가 다가가자 그가 일어나 아는 체를 했다.
"오정화 경위님? 김창홉니다."
그가 내민 손은 크고도 투박했다. 그러나 따뜻하고 정중했다. 조직폭력집단의 행동대장 손을 잡아보긴 처음이라 손에 전율이 왔다.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다소 이국적이었다. 콧날이 시원했고 눈이 컸지만 어쩐지 눈매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둘은 커피를 시켰다. 정화는 그에게 보안관찰 대상임을 다시 한 번 주지시키고 뉴욕 체류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예정이고 누구를 만날 것인가에 대해 물었다.
"간단합니다." 김창호가 운을 뗐다. "조미란이라는 여자가 지금 경찰서유치장에 있죠? 석방되는 대로 만나볼 예정입니다."
"그녀완 어떤 관계입니까?" 정화는 수첩에 메모를 하며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제 애인입니다."
설희가 그의 애인일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진짜 방문목적을 숨기기 위해 지어낸 말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애인을 험한 곳에 두셨네요?"
"걔가 좀 철이 없어서요. 수고스럽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화는 그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김창호 씨가 미안해 할 게 뭐 있어요. 전적으로 조미란 씨 책임이죠. 그나저나 보석으로 나와도 정식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아마 이곳으로 주거가 제한될 걸요? 그때까지 여기 계실 건가요?"
주문한 커피가 나오는 바람에 대화가 잠깐 끊겼다. 종업원이 다른 테이블로 간 뒤 창호가 입을 열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온 김에 몇 군데 더 돌아보고 곧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그 몇 군데가 어딘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한 군데는 메릴랜드입니다. 제 아버지가 거기에 계시죠. 어릴 때 헤어졌다가 수소문을 해서 6년 전에 제가 이곳으로 와 만나고선 이번이 처음입니다."
대답이 시원스러웠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나요?"
"미군 군무원입니다. 백인이죠. 곧 이라크로 간다고 하더군요. 주한미군 시절에 동듀천에서 제 어머니와 만났죠. 어머니는 이곳으로 같이 와 고생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정화는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의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가 짐작이 됐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선 더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행선지는요? 초면이니 오늘은 거기까지만 묻기로 하죠. 출국하시기 전에 저를 다시 한 번 만나셔야 합니다."
"보스톤에 갑니다. 후배가 있어서요. 아마 조금 뒤에 저를 안내하러 이리로 올 겁니다."
"혹시 그 후배가 임설희 학생인가요?"
그러자 그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했다. 정화는 얼마 전에 그녀가 찾아와 조미란과의 면회를 성사시켜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아하, 그 경찰관이 오 경위님이셨군요."
"얘길 하던가요?"
"네. 서울에서 전화통화를 했는데 이상한 경찰관이 하나 있다고 하더군요.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더이상 대답은 안 했어요. 이거,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그가 고개를 숙였다.
"연천 K초등학교 동문들 맞죠? 임설희, 조미란 씨하고."
"많이 조사하셨네요?" 그가 싱긋 웃었다. 기회다, 하고 임설희가 무죄판결을 받은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막 질문을 하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그가 로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침 왔네요. 여기야, 설희."
다가온 임설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화와 창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화에겐 인사도 없었다.
"이 여잔 여기 왜 있어?"
"데이트 좀 하고 있다, 왜?" 김창호가 넉살스럽게 말했다. "지난 번에 볼 때보다 많이 말랐어."
"상관하지 마."
둘은 그다지 친해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을 듣다가 정화는 슬며시 일어났다.
"왜요? 조금 더 있다 가시지요?"
김창호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정화가 명함을 건넸다.
"아닙니다. 규정대로 하루에 한 번은 이 번호로 제게 꼭 전화를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정화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심해야 할 거예요. 이곳 경찰도 주시하고 있거든요. 저만치에 앉아 있는 뚱뚱한 흑인남자 보이죠? 회색 티셔츠를 입은. 뉴욕시경 사복경찰입니다."
정화가 쳐다보자 사복은 테이블에 있던 잡지로 황급히 자기 얼굴을 가렸다. 두 사람도 그걸 확인했다. 김창호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설희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정화는 둘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곤 돌아서서 커피숍을 나왔다. 왜 그 말을 해주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동안 문득 혼자라는 자각이 찾아왔다. 그녀는 아침이슬처럼 외로움을 느꼈다.
저녁에 로빈을 만났다. 일 주일 전에 그의 오피스텔 침대를 같이 쓴 뒤 둘 사이는 스스럼이 없어졌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는 테이블 아래로 발을 가져와 정화의 발목과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화제는 주로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절대 일 얘긴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갈 즈음 로빈이 물었다.
"이제 뭐 할까?"
"영화 보러 갈까?"
그러자 그의 표정에 서운한 기색이 감돌았다. 침대로 직행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그녀는 뜸을 들이기로 했다. 그의 성격과 속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번의 정사 뒤에 그는 약혼자가 있지만 부모님이 짝지워준 사이라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화는 여자를 침대로 이끌기 위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침대 테크닉은 일품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는 잠깐 지나가는 인연에 지나지 않았다.
근처 작은 영화관으로 갔다. 이번 작품은 <13구역>이라는 SF물이었다. 현란한 화면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그는 시종 노골적인 스킨쉽을 걸어왔다. 전혀 FBI답지 않았고 마치 사탕을 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바람에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정화에게도 느낌이 왔다. 결국 중간에 극장을 나와 모텔로 들어갔다.
서두르는 로빈을 달래고 욕실로 가 먼저 샤워를 했다. 그가 중간에 들어오자 그녀는 적당히 몸을 닦고 나서 그를 남겨두고 침대로 갔다. 그리곤 시트 속으로 들어가 티브이를 보며 장차 벌어질 유희를를 기다렸다.
욕실을 나온 그가 몸에 두르고 있던 타월을 집어던지고 냉큼 시트 속으로 들어와 정화를 안았다. 알몸인 걸 확인하더니 시트를 집어던지고 그녀의 나신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멋져, 정화."
그 말에 정화가 허리를 비틀며 중요한 곳을 손으로 가렸다. 교태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해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유두에, 손은 그녀의 가장 은밀한 곳에서 부지런을 떨어댔다. 정화는 눈을 감고 그것이 주는 쾌감을 온 몸으로 즐기면서도 머리속으론 그가 이런 관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와의 관계는 욕망의 분출이지 결코 바랐던 사랑이 아니었다. 이윽고 정화 입에서 갸녀린 신음이 새어나오자 그의 숨결과 애무가 더욱 거칠어졌다. 창 밖에서 마른 대지를 세차게 두드리는 장대비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