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5. 2004년 뉴욕, 뉴욕 ③

"자료가 온통 왜 이래? 온통 '의심이 가지만 아직 범죄 증거는 없다'네."
정화는 실망했다는 듯 서류철을 덮었다.
그러나 속으론 꽤 충격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설희를 어느 정도 '역경을 딛고 자란 입지전적 여성'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범죄 전력이나 특정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용의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뉴욕경찰국이 왜 설희에 대한 뒷조사를 하고 있는가하는 가장 기초적인 의문이었다.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거 아닌가?"
"여긴 뉴욕이야." 제이시가 말했다. 9.11 이후로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 테러나 강력범죄에 대해선 인권이 부차적이지.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흥, 그 시민이란 '미국 시민'이겠지, 정화는 속으로 비웃었다. 제이시가 철을 다시 보관함에 집어넣으며 말을 이었다.
"참 이상하지 않아?. 범죄 소굴을 돌아다니고, 관련자들을 만나고 다니지만 범죄 흔적이 전혀 없다는 건 말이 안 돼. 자기 주변을 지나치도록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어. 그게 우리에게 의심을 사고 있는 부분이지. 차라리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안 그러더군. 마침 이번 건이 일어나 우린 꽤 주목하고 있지."
"그래? 어떤 점에서?"
"조사해 보니 조미란은 데이빗 로드가 운영하고 있던 클럽의 중간관리자더군. 이번 원정의 알선책일 가능성이 커. 그 조미란을 림이 면회했단 말야. 짚이는 게 없어?"
"오우. 그런 점은 충분히 의심이 가네. 그러나 림이 말하길 조미란은 그저 옛 친구라고 하던데?"
"그거 굉장한 친구를 뒀군."
"이 자료 카피할 수 없을까? 참고하려고."
"우린 한국 경찰이나 관리를 안 믿어. 부패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그건 맞는 소리다. 하지만 그동안 살펴본 바로는 미국 공무원사회의 부패가 더하면 더 했지 한국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었다. 노골적인 말에 정화는 발끈했다.
"지금 네가 말한 경우를 두고 한국에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지."
"아하, 그래? 미안해." 정화의 공격에 제이시가 말했다. "흥분하지마. 원래 내 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어. 나도 여기 동료들 안 믿어."
제이시는 일을 해야겠다며 정화의 등을 사무실 밖으로 떠밀었다. 정화가 나오면서 물었다.
"이제 저 파일에 내 이름도 올라가겠군?"
제이시가 정화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곤 윙크를 던졌다.
"수고해 정화, 림한테 수상한 구석 있으면 좀 알려주고. 굿바이."
그리곤 자기 방문을 쾅 닫았다. 정화는 제이시가 적인지 친구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이, 이쁜이. 오늘 밤 시간 있어?"
경찰서 문을 나서다 마주친 백인 경찰 하나가 정화에게 말했다. 오언 그레이시 경감. 여기에서 그런 언어희롱은 흔히 당하는 일이다. 슬그머니 엉덩이를 두드리는 놈도 있었다. 항의해 봤자 허사였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의 리그에 충실했다. 기 죽지 않으려면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해야 한다.
"뻑 큐." 정화는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세웠다.
정화는 애마인 혼다를 몰고 영사관으로 향했다. 그녀 기억으로, 약 10년 전 당시 설희는 동급생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되어 가정법원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전방부대 사단장이었고 정화는 엄마와 함께 여름방학을 거기서 보냈다. 가끔 길에서 만나고 했던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여자아이, 설희 사건은 지역 내에 아주 유명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 대학입시에 집중하는 통에 그 뒤로 사건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영사관으로 돌아와 설희가 작성한 민원서류의 신원정보를 바탕으로 교민기록을 찾아보았다. 22세. 학생, 보스톤 거주. 내용은 간단했다. 교민 관련 수사기록엔 아예 그녀 이름이 없었다.
경찰청 전산망에 접속해 옛 사건기록을 검색했다. 생년월일이 일치한 걸 보니 그 임설희가 맞았다. 재판이 있었지만 무죄로 결론이 난 사건이었다. 정화는 저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았다.
무죄판결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목격자의 진술번복이었다.
그 목격자 이름이 눈에 익었다.
바로, 109경찰서에 유치되어 있는 조미란이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그 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건 뒤로 설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제이시가 보여준 기록을 떠올리며 김창호란 인물에 대한 사건기록을 찾아보았다. 동명이인이 많아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곧 기록 몇 개가 튀어나왔다. 폭력 전과가 2개, 청부살인미수가 1건이었다. 기록 어디에도 설희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설희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걸 확인했다. 나이는 설희보다 두 살 위였다. 어쨌거나 임설희, 조미란, 김창호는 초등학교 동창생들인 셈이다.
조서에는 김창호가 고 1때부터 동두천 일대의 한 폭력조직에 가담한 걸로 나와 있었다. 고3 때 폭력으로 처음 입건된 뒤 학교를 그만두었고 20살에 상대 조직폭력배를 린치한 죄로 1년을 복역했다. 출소한 뒤 근거지를 안양으로 옮겼고 거기서 JJ파라는 작은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 청부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법원이 상해 죄만 인정, 교도소에서 1년을 복역하는 데 그쳤다. 그 이후의 기록은 없었다.
세 사람의 관계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신고전화가 걸려왔다.
맨하탄에 있는 한인운영 편의점이 백인 소년들에게 털렸다는 것이었다. 정화는 접속을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근 준비를 서둘렀다.
원래 영사관엔 경무관 급 대외협력관 아래 다섯 명의 동료가 더 있다. 그러나 교민 민원 관련 뇌물수수 사건에 연루되어 협력관과 교민동향을 파악하고 있던 경감이 귀국해서 지금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폭주하는 업무를 감당해 나가고 있다. 동료들의 임무와 근무시간이 모두 제각각인지라 영사관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할 틈이 거의 없다.
정화는 한인 관련 범죄정보수집과 대외협력 임무를 맡고 있다. 수사권이 없어 한인 범죄들은 모두 뉴욕 경찰이 처리하고 있다. 그 정보를 모아 서울에 보고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 동부지역의 각 사건 현장과 경찰서들을 수시로 방문해야 했다.
대단한 격무여서 교민사회의 세세한 사정에 대해선 파악할 틈도 없다. 아니, 실제로는 파악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교민을 조심하는 건 정화의 철칙이었다. 뇌물수수, 청탁, 투자사기, 도박, 매춘, 마약, 간통......교민과 접촉하다 패가망신한 공무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화는 권총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경찰이나 일반인이나 심심하면 총를 쏘아대기 때문이다. 단 하루라도 도심이나 브루클린에서 총성이 멎는 날이 없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이라크와 아프간에도 포탄과 미사일을 퍼붓고 있다. 도대체 이 망할 놈의 나라란, 그녀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이틀 뒤, 109경찰서에서 사건 처리결과를 보내왔다. 9명 가운데 8명은 약식재판에서 벌금을 내고 방면되었지만 제이시의 귀띔대로 알선책 혐의를 받은 조미란은 풀려나지 못했다. 제이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조미란이 변호사를 선임했고 다음 주에 있을 재판에서 보석으로 풀려날 것 같다고 말했다. 결과를 알고 있는지 설희로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며칠 뒤 서울에 보낼 정례보고서를 꾸미느라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을 때 L.A.영사관 경찰로부터 업무협조 팩스 용지 한 장이 날아왔다. L.A.를 거쳐 뉴욕을 향해 가고 있는 한 보안관찰자의 동선을 파악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정화는 그 인물의 인적사항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바로, 김창호였다.
참고란에 '안양 JJ파 행동대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가 만날 이들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