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동창생들 - 2. 2012년, 서울 강남 ④

정화의 전담수사팀은 미사리에서 이천으로 향하는 주변 도로와 은행, 시신이 나온 현장 주변의 무인카메라를 다시 정밀 분석했다. 그러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범인들이 사전에 답사를 한 듯했다. 사건 현장 인근 휴대폰 기지국의 기록도 조사했지만 아직까진 별무소득이었다.
회의를 시작했다. 팀원들의 두툼한 수첩 페이지들은 깨알 같은 글씨로 꽉 차 있었다. 이천 전담팀이라곤 하지만 그건 형식에 불과했다. 그 전에 처리하고 있던 사건들은 대부분 3팀에 남은 직원들과 다른 팀에서 맡아주었지만 수사 연속성이 있는 일부 사건은 계속 처리해야 했다. 딱히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각자 맡고 있는 중요 사건이 서너 건도 넘었다. 팀장인 정화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파일엔 이것 말고도 다섯 개의 미제 사건이 들어 있다. 전담팀 회의를 마치면 곧장 3팀 회의를 주재해야 한다. 그 뒤엔 팀장회의......잠복근무와 당직도 해야 했고 때론 다른 부서나 형사기동대의 지원요청을 받고 긴급 출동도 해야 한다. 아차, 정신줄을 놓으면 사건과 용의자 이름이 머리속에서 마구 뒤섞인다. 실적주의가 경찰관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 그게 일선 수사경찰관의 고민이다. 한 사건만 추적하는 경찰? 천만의 말씀이다. 현실은 영화나 소설과 전혀 다르다.
장기식이 막 나온 국과수의 검시 결과를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해자들은 실종 다음 날인 오후 6시에서 8시 사이에 숨졌고 매장되기 전에 목이 졸린 흔적이 있답니다."
"생매장은 아니라 다행이군. 성폭행 흔적은?" 정화가 물었다.
"시신의 상태가 안 좋아 그 여부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다른 사항은 없습니다."
"여자들의 휴대폰 통화내역과 주변 인물을 조사해 봤습니다." 이길재가 수첩을 보며 말했다." 두 여자는 각각 중소기업 사장과 마사지클럽 매니저의 아내로, 비교적 부유한 편이더군요. 그런데 부부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통화기록을 통해 알게 됐는데 여자들의 남자 관계가 꽤 복잡더군요."
"남편과 남자들 알리바이는요?"
"모두 알리바이가 있습니다. 청부살인 가능성도 열어두고 조사했지만 아직 밝혀낸 건 없습니다."
"후우." 정화가 한숨을 쉬었다. "일 주일이 지나도록 수사에 진전이 없으니 검사가 안절부절하더군요."
"공개수사를 하는 게 어떨런지요" 서창민이 말했다. "과장님이 검토해 보라더군요."
최재서 과장에게 직보를 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정화는 내색하지 않았다. 최재서는 직원들의 근태에 대한 지적 말고는 그녀의 보고에 거의 토를 달지 않았다. 결제 서류를 스윽 훑어보곤 선선히 사인을 했다. 그는 전 서장의 측근이자 작년 말 감찰을 통해 비리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그는 신임 서장을 매우 경계하고 있다. 그래서 서장과 친한 인물인 정화와 정면대결을 피하고 있는 중이다. 정화도 아직 그와의 대결을 원치 않고 있었다. 요즘 그는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는지 자리에 거의 있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는 최근 또다시 불거진 룸살롱 대부와 경찰과의 유착의혹 수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했다.
공개수사를 할 것인지 정화가 팀원들에게 물었고 모두 동의했다. 정화는 최재서에게 인터폰을 했다. 마침 자리에 있었다. 과장실로 들어가 보고를 했다.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선선히 그러자고 했다. 그러면서 공개수사 발표 자리에 동석할 것을 요구했다. 정화는 그러겠다고 하곤 그의 방을 나왔다.
오후 두 시에 팀장 회의에 참석했다. 형사과엔 모두 다섯 개의 강력팀이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전담 수사팀이 겹쳐 있다. 계장은 공석이었고 다섯 명의 팀장이 자리를 한 가운데 최 과장이 직접 회의를 주재했다. 1팀장이 수서동 사건에 대해 장황하게 보고를 했다. 스크린에 나온 현장 사진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용의자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그런데 보고 내용에 알맹이가 빠져 있었다.
정화는 전문가 소행이며 조직 범죄라고 알아차렸다. 그러나 정작 조직폭력을 다루는 1팀장은 그 가능성을 애초부터 배제하고 있었다. 치정에 의한 원한관계 쪽으로 방향을 몰고 가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런데도 과장은 고개를 숙이고 그저 머리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참다 못한 정화가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피해자들 몸에 난 열십자 상처들과 누워 있는 자세를 보면 전문가 소행이 확실합니다. 동일 수법 범죄자에 대해 조회를 해보셨나요?"
팀장들 눈길이 정화에게 쏠렸다. 과장도 고개를 들었다.
"물론, 했습니다." 1팀장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별다른 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 열십자 상처들은 고문 흔적으로 보이는데 고문을 가하다가 살해했을 가능성은요?"
그 때 과장이 1팀장의 답변을 제지하고 나섰다.
"다른 팀 수사에 깊이 간섭하는 건 옳지 않아요. 이 자리에서 공개하지 못하는 얘기도 있고. 오늘은 이만 하지. 오 팀장은 나와 같이 얼른 기자회견장으로 갑시다. 세 시로 당겨졌어. 해산."
허무한 회의였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해서 신문을 펼쳐들었다. 기사 중간에 과장 옆에 서 있는 자신의 사진이 있었다. 그 아래엔 '사건팀장 오정화 수사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진은 그런대로 잘 나온 편이었다. 스마트폰을 켜고 뉴스 검색을 했다. 일부 기사엔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다. 대개 흉악범을 비난하고 있었지만 피살된 여자들을 비난하는 글도 많았다. 몇 개의 댓글에 눈길이 머물렀다. '"토막 살인이 아닌 게 다행이군.", "오정화 경위님 파이팅!", "이 여자 이름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경찰이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할까?", "결혼해 줘."......그 가운데 정화에게 있어 가장 자극적인 댓글은 "ㅋㅋ. 줄비 출동!!"이었다.
공개수사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썩 믿을 만한 신고는 없었다. 팀원들은 부지런히 뛰었다. 정화는 그 동안 이천경찰서와의 공조수사를 위해 현지를 두 번이나 다녀왔다. 사건 해결이 답보 상태에 머문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렇게 또 일 주일이 지나가자 팀원들은 녹초가 됐다.
아침 일찍 회의를 가졌다. 다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정화는 서두를 것 없다며 그들을 달랬다.
"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아무나 따라 간다니까."
서창민이 말했다. '요즘 여자들'이란 말에 에둘러 포함된 것 같아 정화는 속이 상했다. 그러나 그 말은 한편으론 사실이었다. 예전엔 여자들이 강제로 끌려가 당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요새는 자발적으로 여관이나 모텔에 따라갔다가 몹쓸 짓을 겪곤 한다. 반항할 거면서 그 은밀한 장소에 왜 따라가? 같은 여자이지만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범인 성향은 어떤 것 같아?" 정화가 규영에게 묻자 서창민은 베테링인 자기에게 안 물은 것에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고학력이고 돈이 좀 있는 자의 치밀한 소행 같은데요? 물론 살인 경력도 있고요." 규영이 말했다. "부유한 여자들이 자진해서 따라갔다는 점과 사전에 범행 현장들을 탐문했으며 범행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 그 근거죠. 그리고 초범이 두 사람을 죽이긴 쉽지 않아요. "
"난 생각이 달라." 서창민이 말했다. "1,000만 원이나 뽑은 걸 보면 돈이 아주 궁한 놈이야. 동종 수법의 범행을 조사했는데, 돈이 있는 척 가장한 게 틀림 없어. 그리고 놈들이 초짜일 수도 있어. 누범일수록 의외로 헛점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 그러나 초짜는 계획부터 아주 치밀하지. 그게 요즘 추세야. 그리고 혹시 놈들이 게이가 아닐까 해. 죽은 여자들의 몸매가 삼삼했거든. 그런 여자를 왜 안 건드렸을까? 독 안에 든 쥐인데, 흐흐."
"서 형사!" 정화가 손으로 책상을 쳤다. "좀 진지하게, 그리고 단어 좀 골라가며 얘기할 수 없어요? 지금 죽은 사람들 모독하자는 거예요, 뭐예요?"
서창민이 어깨를 움츠렸다.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이길재가 고참답게 정리를 했다.
"게이들은 사람 죽이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아무튼 같은 수법의 전과자, 특히 그 가운데 증거인멸에 유능한 자들을 골라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자료라면 박 란 순경이 잘 뽑아내죠. 김 형사, 피해자들 금융계좌에다 사고 처리 해놨지?"
규영이 그렇다고 했다.
그 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정화가 창 밖으로 현관 쪽을 내려다보니 차에서 한 사람이 막 내리고 있었다.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최재서 형사과장이 직접 그를 맞이했고 이어 사복경찰관 두 명이 그의 양 팔을 잡았다. 현관 계단을 오르는 그들 주위에서 기자들이 취재하느라 법석을 떨었고 경비경찰들이 소란을 제압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옆에서 지켜보던 장기식이 말했다.
"룸살롱 킹 납시요."
정화는 그 말을 듣고 그 남자가 사진으로만 보던 강남 룸살롱업계의 대부 이현광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작년에 경찰관들에게 뇌물을 건네주었다가 적발되어 구속된 김판후의 경쟁자다.
"서장님도 참 끈질기시네요." 이길재가 혼잣말 하듯 말했다. "이번이 세 번째 소환인가요?"
이번에 이현광마저 구속되면 강남 유흥가의 두 거물이 모두 정리되는 셈이었다. 팀원들의 관심은 이천에서 룸살롱 사건으로 넘어갔다. 정화는 말리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 조직폭력계가 그녀의 주 관심대상은 아니었지만 돌아가는 정황을 알고 싶어서였다.
과연 검찰이 그를 구속시킬 것인가를 두고 팀원들은 내기를 했다. 서창민과 장기식은 그의 배후에 경찰은 물론 판검사, 유력 정치인들이 있기 때문에 구속까진 안 갈 거라고 자신했고, 규영과 이길재는 경찰청장이 워낙 강남 쪽과 비리와 거리가 멀었던 인물이라 구속은 당연할 거라고 했다. 경찰 내 후유증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었다. 전자가 작년 말에 이미 물갈이가 됐기 때문에 문제 없을 거라고 한 반면에 후자는 최소한 몇 명 정도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할 거라고 주장했다.
"구속? 옷을 벗어? 누가?" 서창민은 두고보라며 껄껄 웃었다. "새끼, 좆도 모르면서."
그의 욕설에 규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정화가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 마칩시다."
미팅을 마치고 복도로 나갔다. 저만치에 있는 흡연구역에서 이길재가 담배를 꺼내들고 있었다. 그리로 다가갔다.
"서 형사가 이현광의 불구속을 저리 자신하고 있는 이유가 뭐죠?"
"제보를 한 증인들이 사라지고 있잖아요."
"사라지다뇨?"
"아,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검찰에다가 유흥가와 경찰의 유착에 대해 제보를 한 이들이 지금은 그만둔 수사계장, 그리고 구청공무원들입니다. 강 계장은 필리핀에서 실종됐고 두 공무원은......아시다시피 최근에 피살됐습니다."
정화는 약간 쇼크를 받았다. 1팀장 보고엔 그런 게 없었다.
"두 공무원 피살이라면, 수서동 모텔 사건을 말하는 건가요? 전 수사계장도 필리핀에서 실종?"
"네. 정말 모르고 계셨나요?"
이길재가 의아하다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화는 서 내의 동료들과 서먹하게 지내고 있는 것을 후회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이야기네요. 언제 자세하게 얘기 좀 해주시겠어요?"
"저......김규영에게 물어보시는 게 좋겠는데요? 저도 그냥 들은 얘기라."
이길재는 왠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정화는 일단 알겠다며 자리를 벗어났다. 한꺼번에 물으면 그가 입을 다물 것 같아서였다. 기회는 또 있다.
규영과 잠복을 나가려고 막 차에 탔을 때 전화가 왔다. 김영환이었다. 그는 ㅈ일보 정치부 기자다. 그를 안 지 2년이 넘었지만 올해 들어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곳으로 발령났을 때 안부전화를 해온 게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정화가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 이유도 있었다.
정화는 규영의 눈치를 보며 다시 차 밖으로 나왔다. 통화에서 그는 지난 몇 개월 동안 특별취재 차 남미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화는 없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불 같은 사랑이라도 언젠가는 식어버리게 마련이다. 빠르든, 늦든 말이다. 차에 타자 규영이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뭘 봐?"
"심각해 보여서요. 애인이죠?"
그 물음에 정화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아니야, 임마. 어서 출발이나 해."
차에서 정화는 규영으로부터 이현광과 김판후가 룸살롱업계의 강자로 등장하게 된 얘기를 간단하게 들었다. 그들은 각각 창촌파와 하남파라는 조직폭력배와 손을 잡고 있었는데 모두 신흥세력이었다. 기존 대형 조직인 범서방파, 양은이파, OB파 등이 궤멸된 뒤 등장한 군소조직이었고 작년에 김판후가 구속되면서 하남파가 힘을 잃었다. 그리고 이번의 수사로 창촌파도 세력이 약화될 거라고 전망했다. 김판후가 룸살롱 여종업원들의 제보로-이른바 '아가씨들의 반란'- 털린 반면, 이현광은 관련 공무원들의 배신으로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알면 다친다고 농담을 했다.
"검찰이 이렇게 대대적으로 나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정화가 물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마는, 아마도 검경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경찰이 강하게 나오자 약점을 파고들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규영이 반문했다.
"글쎄, 청장도 이번 기회에 뿌리를 뽑으려고 하는 것 같던데?"
"아마 깊은 뜻이 있겠죠."
"혹시 과장이 이현광과 가깝나? 아까 보니까 그 앞에서 설설 기던데 말야."
"그런데 말씀드리기 참 조심스럽네요." 규영이 말했다. "서장님도 청장님처럼 이현광을 못 잡아먹어 안달하고 있죠. 팀장님은 그런 서장님의 최측근 아닙니까?"
"최측근이라니? 이리 온 뒤로 두 번인가 찾아봤을 뿐이야.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고 다녀?" 정화가 정색을 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정화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거듭 만나자는 영환의 전화에 밤 늦게 그를 롯데백화점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말쑥한 차림의 그를 보자 각오와 달리 몸이 달아올랐다. 결국 예전처럼 대치동의 한 모텔로 들어갔다. 영환은 서둘렀다.
"사랑해 줄비."
그녀의 별명을 부르며 거칠게 침대에 뉘곤 입술을 포갰다. 가그린을 했는지 그의 입에서 박하향기가 났다. 이어 정화의 블라우스를 벗겨내고 브래지어 아래의 젖가슴을 양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손과 입술, 그리고 혀가 젖꼭지와 아랫배, 사타구니를 한껏 희롱했다. 강렬한 애무에 정화의 속살이 이미 젖어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 그가 바지를 벗었다.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그가 막 그녀 몸 속으로 파고들려 할 때였다. 정화가 몸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
"오늘은 안 되겠어."
"왜 그래? 갑자기."
"준비가 안 됐어. 돌아가."
영환이 한참동안 그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젠장, 하며 일어나 옷을 걸쳤다. 모텔 방문을 쾅, 닫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화는 손으로 자기 머리를 짚었다. 정화는 그런 자신이 이해가 안 됐다. 그러다가 그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애초의 다짐을 떠올리곤 힘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정리할 인연이었다.
일어나 창문의 커튼를 열어젖혔다. 창문을 열려다가 갑자기 눈앞이 어질어질해 오갤래 다시 싸구려 침대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았다. 과로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누워 천장의 조잡한 거울을 응시했다. 아랫도리만 벗은 자신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들어 있었다. 오늘따라 음모가 수북해 보였다.
그 자세로 한 시간 정도 잠을 잤다. 모텔방의 퀴퀴한 공기가 역겨워 집으로 갈까 하다가 당직실에 들르기로 했다. 몸이 안 좋다는 장기식 형사의 말이 기억나서였다. 공기가 탁한 당직실의 많은 경찰관 가운데 계장급 이상 간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경감만 달면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게 경찰의 현실이었다. 책상머리에 앉아 업무 대신 승진시험 등에 시간을 보내고도 오히려 근무평점이 현장의 형사보다 높은 경우가 수두룩했다. 정화의 동기 가운데 벌써 경정에 이른 친구도 있었다. 후배들이 경감 계급장을 을 단 사례도 부지기수다. 수사 현장에 있다보면 시험공부 할 시간은 커녕, 그럴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날마다 전쟁이다. 정화는 처음에 진급 시험에 합격하는 친구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생리에 익숙해졌다. 어치피 세상은 요령 있는 년놈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대통령부터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장기식을 찾아 집으로 보내고 대신 자리에 앉았다. 정화 말고도 여자 경찰관 몇 명이 더 보였다. 심야에 여성들이 붙들려오는 경우- 대부분 성풍속 사범이다 -가 늘어나고 남자 경찰관에 의한 인권 침해 사건이 문제가 되자 그들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이다. 정화는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여자 경찰관도 당직 근무를 회피하거나 위험한 임무를 기피하는 등, 여성이라는 그늘 뒤에 더 이상 숨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사건 1번지 강남.
자정이 지나자 당직실의 분위기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현장과 지구대에서 넘어온 범죄 용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수사과 경찰관이 도와달라며 한 남자를 데리고 들어와 그녀 앞에 앉혔다. 이어 남자 하나, 그리고 얼굴에 상처를 입은 여자 둘이 들어와 대기석에 앉는 게 보였다. 참고인들인 듯했다. 마주 앉은 남자는 눈두덩이 부어 있었고 말이 없었다. 경찰관이 넘겨준 서류를 보니 룸살롱에서 여종업원을 폭행한 걸로 나와 있었다. 인근에 사는 30대 후반 남자로, 남자는 조서 작성에 순순히 임했다. 직업은 모 대학 조교라고 했다.
확인 차 그로부터 학과장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어보았다. 새벽이지만 전화를 받았다. 학과장은 조교가 성실한 사람이라며 선처를 부탁했다. 보기엔 분명히 인텔리인데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내가 연락도 없이 집에 안 들어와 초조하던 참에 술을 마시러 갔다가 종업원들이 홀대하기에 홧김에 일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조서를 꾸민 뒤 그를 유치장으로 넘겼다. 그리고 피해자 진술을 받았다. 얻어맞았다는 20대 후반 여자 둘의 상처는 가벼운 편이었고 매우 건방지게 굴었다.
"보건증 줘 봐요." 정화가 손을 내밀었다.
"네?" 여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화가 보건증 모르냐고 다그치자 겨우 한 여자가 말했다. "안 가져왔는데요."
"사건은 일단 접수해 둘 테니까 의사 진단서하고 보관증 가지고 모레까지 오세요." 여자들은 낮은 목소리로 씨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는 그들의 뒤에 대고 말했다. "아, 그리고 업소 허가증도 가지고 와요."
아마 그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뒤 두 사건을 더 처리한 뒤 유치장으로 갔다. 아까 그 대학 조교는 잠을 자지 않고 유치장 창살을 잡은 채 망연자실 서 있었다. 당직 경찰관에게 그를 조사실로 데리고 나오라고 했다. 그를 풀어줄 작정이었다. 집에 돌아가도 좋다는 그녀의 말에 그가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쌍방폭행인데 왜 당하고 계세요? 정화가 말했다. "며칠 뒤에 다시 출두하라고 연락이 갈 겁니다. 그 때 병원 진단서를 떼어가지고 오세요. 이 건은 보류해 두겠습니다."
남자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고 말하곤 조사실을 나갔다. 정화는 의자 깊숙히 몸을 묻었다. 이 시대 남자들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취객, 음주운전자, 폭력사범, 아내 살인 용의자, 성매매하다 걸린 공무원들, 간통하다 들킨 남녀, 성폭행 용의자들이 당직실에 들끓고 있었다. 이러고도 나라가 굴러가는 걸 보면 참 대단한 일이다. 조금 일찍 차를 타고 경찰서 정문을 나섰다. 절망과 환멸의 거리, 테헤란로의 새벽이 비에 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