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층의 거주 구조를 파악하기위해 쪽방촌에서 일주일을 살아보고, 배달플랫폼의 실태를 알리기위해 직접 오토바이를 몰며,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도를 이어나가는 언론인들을 바라보며 대중은 댓글과 반복되는 뉴스피드로 그들의 노고를 높이 샀다. 어쩌면 시각적인 그림과 극한이라는 자극이 만들어낸 기획에서 뉴스는 정보전달이 버라이어티의 계획된 흥미유발과 무엇이 다른지 고민하는듯 하다. 동시에 마치 모든것이 융합해서 시너지를 내야할것만 같은 흐름에 역행하는 건 아닌지 자아비판에 빠져야 하는 모순에 이르며 불순한 의도를 배제한채로 아슬아슬하게 오늘도 ‘단독’, ‘현장르포’, ‘특집’이라는 누구보다 우월한 훈장으로 가공되어 뉴스는 고객에게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있다. 작가 개인의 경건한 고백처럼 보이는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 대한 고발은 곧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애써서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 공공의 적처럼 언급되지 않은 부분이다. ‘좋아요’와 ‘구독하기’ 그리고 ‘알림설정’이라는 철저한 관계가 구조화된 관심경제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도화된 관망하기로 그 역할을 더욱 견고히 다지며 충실히 타인의 고통을 반복재생하기 때문이다. 대중과 사건이라는 희박한 연결고리 사이에서 언론인은 과연 어떤 자세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바로 이런 변화된 상황가운데 마주해야할 당연한 질문처럼 보였다. 이를 진지하게 마주할것인지 아니면 시류에 스쳐지나가는 한 때의 고민으로 치부할지는 사회를 바라보고자 했던 각각의 입장에 따라 매우 다를것임에 분명했다. 저자는 보도를 하며 놓치는 것은 없는지, 너무 당연하게 미디어에서 그려진 과장된 연극을 공적인 유산으로 개인에게 떠넘긴건 아닌지 고민을 했다. 개인은 얼마나 섬세하고 예민하게 정보를 처리하고 수용하고 있을까? 생각없이 사고를 수동적으로 이끄는 디지털 화면위의 뉴스피드는 단순 반복되며 의도적으로 가장한 거리감으로 친밀감을 내보일것이다. 때문에 취재에서 끝난 현실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이야기로써의 기사가, 겉도는 휘발성 감정이 아닌 끊임없이 관심과 이해를 촉구하는 지속적인 기여는 손에 넣을수 없는 아련한 추억처럼 슬픈 감정을 일으키는가보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펜을 들며 기록해 나아가고 있는 작가의 모습에 나는 무덤덤히 살아가면서 무엇을 고민하며 사회속에서 살아가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에 대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뭉뚝하게 마주했던 나에게 작가는 기사에 담기지못한 선예도를 날카롭게 건드리며 스스로가 훑지못한 누락된 부분을 돕는다. 그런 섬세하고 배려깊은 언론인이 그래도 한 명쯤은 여기에 있음을 내보이면서. 아마 지면과 러닝타임이라는 제약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의 효율성을 뛰어넘어 이상향을 바란 작가의 세계는 결코 오지 않을것이다. 오지 않으면 어떻겠는가. 꿈꾸는 것은 깨어있어 노련한 개인에게만 보이면 충분한것을.
대단한 사람이 자신은 대단하다고 말하는 위엄에 지면위의 글자들을 털어보았자 겸손은 하나도 없다.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가 되려는 작가의 일관된 태도에 경의를 느끼면서도 나는 그가 주창하는 의지가 역으로 불완전한 인상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했다. 작가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편향된 시선과 대우, 적절하지 못한 지원에 대해 할 말은 다 하겠다며 그동안 쌓아둔것 같은 이야기를했다. 저명하고 권위있는 상에 노미네이트된 작가에게 주어진 발언권이기에 그 상황이 씁쓸하지만, 어쩔수 없다. 대중은 무명의 누구나인 대상을 달가워하지 않을테니. 번역가들에 대한 처우가 나쁘다는건 이미 다른 작가들의 책을 통해 견해를 엿보았음에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고충을 토로한 모습에 다시 한번 더 상황의 심각성을 그대로 전달받는다. 작가의 지면위에 늘어놓은 불쾌함과 불만은 인쇄된 활자를 넘어 감정 그 순수한 형태로 드러나서, 나는 겉표지의 아장아장 귀여운 노란 페이지들에 담긴 디자인과 작가의 간극에 위화감을 느꼈다. 이것은 작가 개인의 주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번역가라도 서로의 처한 입장에 따라 조금은 다른 견해를 내보일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애정과 큰 자신감을 갖고 있기에 이만큼의 조언과 비판이 가능한지 모른다. 다만 자신의 직업만큼 타인의 업도 소중하고 의미를 갖고있음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는 구절이 있어서 나는 문장에 드러난 태도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들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것이다. 작가 본인 이상으로.
아들러의 심리학을 말하던 저자가 이번에는 사랑얘기를 풀어놓았다. 작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심도있게 논의해본다기보다, 사람을 대하고 사랑을하는데에 있어 어떤자세로 어떻게 다가가야하는지 방법론적인 사랑의 기술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단순히 풀어놓은 챕터들이 특정상황에 적용되는 기술로 작동하거나 예상되는 한계를 인정하며, 머리로만 이해하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중간중간 내비치며 독자들의 우려를 미리 읽었다. 사랑을 학교에서 공부하듯 배우고 익힌다는건 기존 상식으로 도통 이해할수 없는 접근이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이끄는대로 행동하면 그것이 전부가 아닌가하는 당연함에 의문을 던지는 작가는 매우 고리타분해보이기 까지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고 사랑을 마주하는 법을 몰라 시행착오와 실패로 보이는 결과들을 우리는 누군가의 경험과 미디어가 그려낸 이미지로 많이 듣고 익숙해버렸다. 마치 사랑을 하는데 시행착오는 부속물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것으로 이해하며. 분명 그 과정에서 발생된 불화며 안좋은 기억은 내가 목표로 둔 어떤 시점을 위한 자양분임이 틀림없다며 스스로를 납득시키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작가는 지금을 생각하며 내 앞에 있는 현재에 그 마음을 다할것을 재차 강조했다. 타인을 내 마음대로 의도할 수 없음을, 내가 주는 마음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을 것임을 사랑을 하는 사람은 고독과 마주하며 스스로를 다독일 줄 알고 있음을. 내가 내 감정을 알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아주 사소하면서도 자각하지 않던 당연한 지점을 그렇게 작가는 건드린다.
인생을 헛살았나 하고 뒤를 돌아볼 만큼 책이 던지는 주제는 파급력이 크다. 과연 베스트셀러라는 작품은 이런 위엄을 가져야 하는것인가. 당돌하게도 책은 지금까지 나의 삶을 지태해온 생각,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생 토대자체를 뒤집으려 시도한다. 작가의 태도에서 낯선이의 친절한 위화감과 사적 영역을 고치려드는 주제넘은 당혹감, 그 사이에서 나는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채 비집고 들어설 작은 틈새를 내보이며 마음을 이내 현옥당한다. 이것은 하면 안되고, 이것은 이렇게 해석해야하며, 이것은 이렇게 받아들여야한다며 차근차근 논리를 만들고 사람을 이끄는 탄복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나는 종교에 귀의한 신생아처럼 작가 앞에서 모든것이 낯설었다. 나는 새로운 언어를 접하는 기분으로 주고받는 대화형식의 그들과 같이 진정으로 그들이 무엇을 감화하는지 지켜보기로 하였다. 책을 덮고나서 작가는 논란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혹자는 그가 아들러를 사칭하며 그의 역할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논리를 주창하는 사이비로 여겼다. 그의 해결책은 공동의 사회가 아닌, 개인 극소의 단위에 머무른 한계로 논리의 한계성이 엿보인다 지적되었다. 어찌되었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기준이 되어온 현재에 있어 작가가 대변하고자한 아들러는 불분명하고 황당한 면을 그대로 담고있어 타인에게는 그가 낯섦 그 자체이다. 때문에 본인 스스로 미움의 대상이되고자 하는 책의 타이틀과 무관하지않은 미움받는 길을 걷는다는 점은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일관되게 통찰력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책을 읽고 저는 한 사람의 마음에 아주 작은 의도를 심어서 그 사람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영화가 떠올랐어요. 영화 ‘인셉션‘은 의도한 마음의 파장이 결국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표현했는데, 저는 그게 결코 영화의 허구성에 그치지 않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은 아닌가 했어요.우리가 오늘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것을 접하든 모든것이 내재화되어 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너무 당연한 얘기이면서 소스라치게 놀랍지는 않는건지 저자는 새삼 꼬집어서 다시 한 번 깨닳게 해주는 걸까요. 예민한 감수성으로 누군가가 만들어낸 허구에 휘둘리지 않게 오늘도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