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본 저자의 다른 책인 ‘번역은 반역인가’를 읽었다. 뭔 언어유희 같은 제목인지 좀체 신경이 쓰여서 그 내용이나 들여다보고자 했다. 거침없게 불편하기 그지없는 정신없는 책 커버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도 남았다. 네살 아이가 떼쓰는 악덕 행동을 추출해서 책 커버에 덕지덕지 바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했다.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그에 반해 매우 점잖은 신사이다. 유유출판사의 아름다운 판형도 한 몫 했지만 일부러 작가의 의도가 있었고, 애써 전작의 ‘번역은 반역인가’의 커버 이야기를 이 책에서 사소하게 언급한 것을 보니 이전의 그 책 커버가 어느 정도 논란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다만 그게 내용이 아닌 책 커버에 대해서만 사람들 사이에서 언급되지 않았기를 바라며.작가가 주창하는 모든 의견에 나는 동의한다. 왜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교육하지 않았는지, 언급하지 않는지, 화제가 되지 않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공감했다. 전작이 2006년이고 이 책이 2018년인데 그 엄청난 시간의 양에 비해 사람들의 사고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변함이 없다. 강직하다고 해야 할까 신조가 있다고 해야 할까. 사실 ‘번역은 반역인가’를 읽은 독자들이 구태여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동어반복처럼 닮은꼴의 책이 아주 간결하고 얇게 한 번 더 나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도 읽는 내내 다시 한 번 생각을 확고히 정리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혹시 몇 년 뒤에 또 출판하지는 않겠지요;;) 이 책은 인문학자라는 작가의 배경답게 글이 아름답게 잘 정리되어있고 그의 논지도 매우 탁월했다. 많은 사람이 이에 동의하지 않거나 잘 모른다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만큼 아직 변화의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조금의 희망을 품어보려 한다. 우리는 빠르게 성장하고 그만큼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 과도기의 한가운데 남아있다. 그 때문에 아직도 사회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지만 그 가운데 작가가 제기한 문제는 우선순위로 해결하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고 나는 그때에 앞서 이 책을 단연코 떠오르게 될 것이다. 좀체 쉬지 않고 문제를 만들어 내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한 국가의 감출 수 없는 부지런한 근면성이 여지없이 드러나기를 마다치 않으며.
소설책 같은 커버가 은은한 감성을 자극하지만 사실 내용은 마냥 그렇게 안식을 주는 평온한 감성을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할까. 좀 과도하게 자극하는 주장이 조금은 어색하긴 하지만 작가와 그 주변 인물의 인터뷰를 통해 지금의 사회가 보는 1인 인구에 대한 생각이 잘 엮여있다.내가 느끼기에도 급격하리라 할 만큼 늘어난 1인 가구에 대한 사회의 대응이 그 속도에 비해 좀 늦은 편이긴 하다. 아직 모든 것이 2인 혹은 2인 이상의 전통적인 가정에 국한되어있고, 정부의 시점에서 그것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민 구성의 올바른 단위라 할지라도 1인 가구가 너무 많은 면에서 외면받고 있음은 부정하기가 힘들다. 서둘러 틈새를 메우려는 시도는 많이 있으나 급작스러운 정책에 비해 혜택을 받는 대상의 효과가 미미함은 아직 우리 사회가 1인 가구를 다루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터득하고 있지 않음을 크게 시사한다.이러한 문제점은 거시적으로 사회 그 자체에도 있지만,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생각에도 큰 변화를 요구한다. 아직도 결혼이 아닌 결속력에 대해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그 외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많은 궁금증 혹은 반론을 제기하기에 앞서기 때문이다. 변화는 늘 당혹스럽다. 무지하기에 낯섦이 먼저 작동해서 상대를 배척하기에 급급하다. 그런 본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반응을 자각하면서 조금은 여유 있는 태도로 돌아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아직 서툴고 어색하기 그지없는 1인 가구이지만 금세 포용하고 당당한 한 국가의 단위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그때에는 이 책이 언제 그랬냐는 듯 추억을 되새기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겠지만 그것 또한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픽션을 극으로 내몰면 이런 유쾌함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걸까. 옮긴 이의 말을 빌려 이 책이 흔히 오쿠다 작가의 ‘이라부 시리즈’의 세 번째 편임을 알았다. 시리즈는 ‘인더풀’, ‘공중그네’와 함께 구성되어있다 했다. 뒤늦게 안 사실에 반해 언급된 책들은 모두 내가 다 읽은 책들이다. 한창 일본소설이 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던 시기에 나는 학교 도서관을 전전했다. 일본소설 섹션은 매우 아름답게 정돈되어 신간으로 빳빳하게 채워져 있었다. 양장본의 책등에 적힌 갖갖의 독특한 타이틀이(왜 그렇게 일본소설들은 제목이 특이한 것인지) 이리저리 튀면서 독자들의 손길을 유혹하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그 한 섹션을 통째로 읽는 게 목표였고 하릴없이 시간만 축내며 아웃사이더였던 새내기의 취향에 그에 버금가는 취미는 없을 듯했다. 사실 무섭게 읽어 내려간 소설들은 매우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그 맛을 진중하게 보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고 닥치는 대로 욕심을 어떻게 해서든 채워나가는 무시무시한 욕망의 행위처럼 치부되었다. 그랬기에 이게 시리즈 물이었는지 작가의 큰 그림에 의해 그려진 인물이었는지 알 길이 당시에는 없었다. 알고 있다고 했을지라도 금세 잊혔겠지만. 철 지난 옷장에서 발견한 졸업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소설을 읽었다. 극히 아는 전개를 읽고 있자니 어느 시점에서 웃었는지 문득 그때의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잠시 들었다. 아주 찰나에.
조금은 과장된 직장인들의 주변 이야기가 한 권에 모였다. 씁쓸하지만 그 과장됨이 그 자체로 현실을 담고 있어서 그렇게 가볍게 허구만으로 치부해서 소화할 수가 없다. 작가의 글은 묵인하며 순응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무력한 나를 바라보게 한다. 구체적인 숫자와 부자가 되는 목표로 규정된 현실에서의 낭만은 없다. 이 세상을 사는 분명한 목적이 부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숫자가 부족한 개인의 존재는 없거나 가려진 채 무시당할 뿐이다. 해리포터의 투명망토를 꼭 갖고 싶다 하던 나의 꿈은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원하였지만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결과만 던져지듯 덩그러니.늘 한 주의 시작을 퇴사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고 무력한 매일의 퇴근을 버티며 하루를 보낸다. 각종 매체에서 보이는 삶들은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유유자적하며 충만해 보이기까지 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나 했다. 소설에 비친 거울만이 조금 위로가 되는 세상에 산다. 나도 누군가의 뒷받침으로 지탱되지만 나 또한 누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부속품이 되었다. 단순한 모듈로 치환해버리기에 그 삶의 복잡함은 헤아릴 길이 없지만 그렇게 인간이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어리석음을 안다. 가벼운 문체와 익숙한 흐름 그리고 작가가 던진 시답지 않은 주제가 곳곳이 담겨있어 늦은 시간의 라면마냥 후루룩 읽어냈지만, 그 여운은 조금도 가볍지않게 잘못된 시간의 야식처럼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내리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