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
이혜영 지음 / 한국방송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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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건 '제주 올레길'을 걷고 난 이후였다. 제주 올레길에 환호했던 나는, 곧 새로운 걷기여행의 명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지리산 둘레길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고,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이라는 이 책이 나왔을 때에는 적잖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제주 올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가득할 지리산 둘레길을, 과연 이 책은 어떻게 펼쳐낼지 무척이나 기대되고 궁금하였더랬다. 하지만 그렇게 적지 않은 기대로 집어든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아쉬웠다.

일단 이 책은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살이 땅살이 보듬은 산채비빔밥 같은 길"이라는,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책표지의 수사처럼 책도 지리산길 위의 '사람살이'와 '땅살이'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버무려낸, 꼭 '산채비빔밥' 같은 느낌이다. 이를테면 길 위를 걷는 와중에 만난, 길 위에 사시는 분들의 삶이 조명되고, 지리산의 역사적 사실들이 언급되고, 지리산을 읊었던 문학작품이 인용되며, 또 지리산을 무대로 펼쳐졌던 비극을 되살려 내기도 하는 식이다. 물론,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상세한 정보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리산을 둘러싼, 이러한 많은 역사와 문학과 삶과 정보가 버무려지는 와중에 정작 '걷기여행의 즐거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지리산 둘레길'의 매력에 조금씩 빠지려다가도 곧바로 언급되는,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닌 서술들에 경쾌한 발놀림은 이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지리산 둘레길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탓인 듯도 하지만, 저자가 딛고 있는 공간을 내가 따라가기가 꽤 버거웠고, 당연히 그 공간을 배경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생경하게 흩날리기 일쑤였다. 좀 더 경쾌하고 즐거운 '걷기여행'을 기대했던 내게, 이 책은 쉬이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아픈 상처까지 불쑥 선물마냥 휙 던져주고는 내내 담담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소문'의 굴레에 갇힌 길까지 고민하자니 여행자는 어렵다고 뒤통수만 긁적거린다."고 말할 때에는 속으로 뜨끔했음을 밝혀 두어야겠다. 즐거운 길을 걸으며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빨치산과 민간인 집단 학살, 제주 4. 3 등)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었지만,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오고가고, 기억하고, 묻다보면 언젠가 진실 또한 밝혀지겠지."라는 저자의 믿음 앞에서는, 어쩐지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그저 내 탓인 듯 미안해진다.

4. 3을 기억하지 않아도 제주여행에는 사실 지장이 없다. 굳이 상기하면서 다니더라도 제주의 목가적 풍경이 그 역사를 거짓말처럼 여기게 만든다. '잃어버린 마을' 터에 자못 무거운 걸음을 했다가도 비석 뒤편 푸른 초원에 마음을 훌렁 뺏기고 만다. 아무래도 제주는 어제의 사실과 오늘의 감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여행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섬이다. 그래도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은 진부하지만 유효한 것 같다.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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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완결판 - 못다한 이야기>를 보기에 앞서 나는 내 나름대로 마음의 무장을 했다. 제목에서부터 언뜻 짐작되는, '국가'로 귀결되는 다분히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감정들에는 결코 내 마음을 쉽사리 내주지 않을 참이었다. 태극기가 자랑스레 휘날리고, 애국가가 감동적으로 울려 퍼지고, 함께 얼싸안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혹 영화가 비추기라도 할 양이면, 나는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서 기꺼이 냉소해주리라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있었다. 물론, 딱히 '국가'가 밉다거나, 그런 감정들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단지 너무나 노골적인 듯한, 그래서 애초부터 이미 어떤 정형화된 '국가'의 이미지를 연상케하는 제목을 지닌 영화가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관객에게도 또한 마찬가지의 이미지를 강요하는 데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 태극기가 나왔고, '어글리 코리아'를 말하는 미국 선수들과의 싸움이 있었고, 한국 대표팀을 소리 높여 응원하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정작 그 한가운데에 있는 '국가대표'는 지레 짐작했던 '국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엄마를 찾기 위해, 군대를 면제 받기 위해, 집을 사기 위해, 또 감독의 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들이 국가대표가 된 순간, '국가'와 '국가대표'가 지니는 견고하고 답답한 이미지들은 우수수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국가대표라면 마땅히 지니어야 한다고 믿어지는 사명감과 애국심을 '국가대표'의 선수들은 누구도 지니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이 '국가대표'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차 보였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국가대표'가 그 각 '개인'의 선수들을 감당하기에 버거웠다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한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선수들이 순수하게 국가대표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대표 역시 선수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전략적으로 급조된 스키점프 대표팀은 유치 실패 이후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전혀 기대를 받지 못하던 스키점프 대표팀이 의외로 활약을 하자 갑자기 자랑스러운 한국팀으로 변모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아쉬움 속에서 귀국할 때 그들을 반기는 건 위로와 격려가 아닌, 오직 승자에 대한 환호와 대비되는 씁쓸한 무관심일 뿐이다. 국가대표와 선수들은 그렇게 서로를 배반하기 일쑤고, 그래서 국가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선수'들과 선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랑스러워할 만한 대한민국'일 때만 의미가 부여되는 '국가대표'의 조합은 다분히 공고화된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영화는 수시로 전복되는 이미지들을 무심한 듯 내어 놓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은 '국가'나 '국가대표'를 향한 감정들이 철저히 논리와 이성의 영역 밖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대표'를 둘러싼 감정들의 찰나적이고 급작스러운 면모에 대해 날을 세우기보다는, 외려 한 발 물러나 오직 감정의 영역에서만 걸음을 옮기며 단지 감정을 분출해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듯 보인다. 가령, 길러준 엄마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순간에도 낳아준 엄마를 찾으러 돌아다닌다든지, 역할이 모호한 말썽쟁이 딸과 끝내 모질게 인연을 끊어내지 못한다든지, 골프채를 휘두르며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던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든지 등, 영화는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거나 혹은 관객을 정교하게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대신, 순간적인 감정의 향연들로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시킨다. 그 감정들은 단계를 거쳐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만 찰나적으로 소비되고 곧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영화를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과장되고 극대화된 감정의 분출이고, 그런 이유로 영화는 '비판' 대신 '배설'을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영화의 선택은 영화 속에서 비 내리던 어느 날, 스키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의 선택과 사뭇 닮은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약에 취해 거리를 돌아다니고, 절망에 채여 비틀거리던 그 순간, 그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는 하나같이 스키점프가 주는, 아찔한 속도감과 하늘을 나는 듯한 쾌감을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거기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국가에 대한 사명감도, 현실에 대한 냉철함도 없이, 그저 즉각적인 감정의 분출만이 넘쳐날 뿐이었다. 물론 그러한 그들의 선택과 나아가 영화의 선택은 관객에게 충분한 감정적 고양을 선사하지만, 마치 스키점프 선수가 하늘을 나는 순간이 영원일 수 없듯이, 고양된 감정은 끝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키날이 대지를 디딛는 순간, 애써 외면했던 논리와 이성과 현실을 마주하는 일은 피할 수 없고, 하늘을 나는 듯한 짜릿함도 점차 사그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감정의 분출을 끝낸 영화는,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한 관객을 총총히 집으로 돌려보내는 듯하다. 시원한, 그러나 조금쯤 허랑한 기분을 안긴 채. 이제 쇼는 모두 끝났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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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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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가진 꽤 좋은 습관 중의 하나는, 길을 나설 때면 대개 책 한 권쯤은 챙겨서 나선다는 것이다. 나는 장시간 이동을 해야 될 때 책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을 떠날 때도 짐을 줄이기 위한 노력과는 별개로 책 한 권에 대해서는 그 무게를 문제 삼지 않는 편인데, 이게 꽤 좋은 습관인 이유는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주변에 민폐를 끼칠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시끄럽게 떠들 일도 없고, 졸다가 옆사람을 머리로 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 내가 지닌 사소한 문제라면, 그렇게 들고 간 책을 실제로 안 읽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 정도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져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는 것은 언감생심이려니와 심지어 어쩔 때는 들고 간 책을 손에 쥐어보지조차 않을 때도 있을 정도다. 이쯤 되면 대체 이게 웬 바보짓이냐 하겠지만, 다행히도 변명거리는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장시간 이동 중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거나, 혹은 주변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거나, 또는 여행이 너무 근사해서 차마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거나, 심지어는 그저 멍때리느라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핑계도 가능하다. 책으로서는 유감이겠으나, '책읽기'의 우선순위는 기실 멍때리기보다도 낮다는 얘기다.

눈을 씻고 봐도 '런던스타일'과의 관련성을 찾기가 쉽지 않은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는(원제는 물론 따로 있다) 심지어 유명 작가마저도 '바보짓'을 서슴없이 한다는 데에서 일단 위로가 되는 책이다. 닉 혼비는 매달 책을 사는 일에 돈을 쓰고 휴가기간이면 느긋하게 책을 읽을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산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해 쌓아두기 일쑤고 휴가기간에는 다른 일 때문에 책을 읽는 일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축구 시즌이 시작되고, 폭탄 테러가 벌어지기도 하는 마당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에서 닉 혼비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심각한 부부싸움을 할 때도 있었을 테고, 몸이 아픈 날도 있었을 테고, 또 좌절감에 사로잡혀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진 날도 있었을 테니, 솔직히 그 와중에 살아남은 것만 해도 장하다고 칭찬할 일이다. 그럼 도대체 '책읽기'는 어쩌냐고? 닉 혼비의 입을 빌자면, 명백하게도 책은 레이예스(아스날 축구선수)의 30m 중거리 슛처럼 우리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 '책읽기'쯤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닉 혼비가 사 놓은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를 무수히 나열하며 책의 가치를 폄하하려고 하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조리 읽어 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책을 계속해서 사서 쌓아 두거나 혹은 생각만큼 책읽기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닉 혼비는 '책'과 '책읽기'를 열렬히 찬양하는 쪽이다. 나중에 다시 말을 번복하기는 하지만 그는 책과 다른 문화매체들, 가령 영화나 스포츠 등과 권투 시합이 벌어진다면 30번 중에 29번은 책을 응원할 것이라고 말하며, 책의 가치를 다른 어떤 문화매체보다도 우위에 둔다. 물론 아스날의 중요한 경기가 벌어질 때면 백이면 백, 책을 집어 던지고 경기장을 찾을 것임은 저자도 알고 나도 알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런 이유로 책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모든 일에 기꺼이 우선순위를 내주면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닉 혼비는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긴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심지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 때조차도 축구나 연극을 보거나 혹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까이 놓여 있는 한 권의 책을 읽는 일은 여전히 충분히 가능한 법이니까 말이다. 뭐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마음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빌리버>에 매달 연재된 칼럼을 모은 이 책은,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책 읽기의 즐거움'에 관한 책이다. 닉 혼비가 매달 사거나 얻은 무수히 많은 책들 중에서 선택된, 비교적 적은 수의 책들에 대한 이야기, 어떤 책을 읽은 이유나 혹은 읽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 읽다가 집어 던진 책 혹은 도저히 읽을 만한 기분이 아니라 읽기를 관둔 책에 대한 이야기 등, 닉 혼비는 때로는 진지하고 열정에 가득 차서, 또 때로는 가볍고 경쾌하게, 또 종종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결국 책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해 항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물론, 가끔은 주로 그가 읽은 책을 내가 전혀 몰라서 맥락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닉 혼비의 조언대로 이 책을 집어던지기에는 역시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쪽이 내게는 더 컸다. 게다가, 가브리엘 자이드의 <너무나 많은 책들>에 나오는, "진정한 교양인이란, 읽지 않은 수천 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태연자약하게 더 많은 책을 원할 수 있는 이들이다."와 같은, 멋진 구절들을 함께 공유하게 해주는 것은 근사한 덤이다. 알고 보니 닉 혼비는 교양인이었고, 나는 차마 교양인이라고 슬며시 무임승차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책을 들고 갔다가 그냥 들고 온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어딘가!

이 칼럼을 시작한 이래 적어도 열두 권의 훌륭한 책을 읽었다고 생각된다. ...(중략)... 그리고 앞으로 한 해 동안에도 그만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더 빨리 읽는다면, 더 많이 만날 수도 있겠다. 지난 한 해, 여러분들은 책을 읽는 것 말고 그만큼 멋진 경험을 열두 번이나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거짓말은 사절하겠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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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와 문화
하재근 지음, 최윤진 그림 / 자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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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책 한 권에 담아내려는 시도는 일견 무모해 보인다. 적정한 분량의 한 권으로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쳐내다 보면 가지는 물론이고 자칫 줄기마저 앙상하기 이를 데 없게 될 우려가 있고, 그렇다고 책 분량을 한정 없이 늘여 놓으면 그 한 권의 책은 아무도 읽지 않기 십상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태생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화'라는 형식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줄기를 소략하지만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내는 한편, 종종 가지 끝에 매달린 열매의 풍성함을 맛보이는 데에도 결코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물론, 그로 인해 그저 '만화'라고 하기에는 컷과 글자가 적지 않은 편이지만(그렇다고 아주 많지도 않다), 중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기록된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하여 쑨원의 신해혁명에 의해 멸망된 청나라까지를 아우르면서 그 도도한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 일련의 법칙을 추출해내고, 아울러 중국의 문화 저변에 흐르는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와 사상을 짚어내면서도, 이 책은 "무조건 쉽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대원칙 아래서 시종일관 '만화' 특유의 유머와 재미를 잃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의외로 상당히 유용한 내용과 지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재미있고 유익한 '만화책'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마음을 쏟고 타인에 대한 해악에 무관심한 사람은 천리(天理)에 의해 관용될 수 없고 인류에 의해 일치되게 증오되어야 합니다. ...... 당신네 나라가 5~6만리나 먼 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익을 목적으로 상인들이 오고 그들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도리로 다시 독물을 사용해 중국 국민을 해치는 것입니까? ...... 질문을 허락한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ㅡ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中ㅡ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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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기억력이 3초라는 금붕어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나는 종종 마치 금붕어라도 된 마냥 온갖 낚시에 번번히 걸려들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내 경우에 이런 일은 대개 인터넷에서 스포츠 기사, 특히 축구 기사를 읽을 때인데, 나는 제목을 보고 그 제목이 기사 내용과 별 상관이 없으리라고 확신하거나, 혹은 독특하고 흥미를 끄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정작 기사 내용은 허섭하기 이를 데 없으리라고 짐작하면서도, 어김없이 그 기사 제목을 클릭하고 곧 후회할 때 그렇게 느끼곤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고 보면 역시, 먹이를 먹은 사실을 잊고 끊임없이 주는 대로 먹이를 받아 먹다가 배가 터져 죽는다는 금붕어와는 사정이 다른 듯도 하지만, 인식하든 못하든 던져주는 떡밥을 언제나 날름날름 받아 먹는다는 데에서 나는 근본적으로 금붕어와 다르지 않은 기분이고, 말할 것도 없이 그 기분은 과히 유쾌한 것이 못된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금붕어로 만들 가능성이 높은 많은 기사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그 기사 제목에는 '박지성'이라는 세 글자가 들어갈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박지성 "테베스는 여전히 좋은 친구">라거나 <맨체스터 더비, 박지성의 운명은>이라거나, <웃음 터진 박지성> 등의 식으로. 물론, 개중에는 흥미로운 기사도 있을 테고, 또 그러한 제목이 무조건적으로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다(언급한 기사 제목은 그저 '박지성'이 들어간 제목을 임의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박지성이 웃음이 터졌고, 테베스는 여전히 박지성의 좋은 친구고, 박지성의 운명을 점쳐 보겠다면야 뭐 어쩌겠는가. 여전히 그런 내용들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고, 기사의 제목이 실제로 그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면 문제 삼을 이유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는 기본적으로, 궁금하지 않으면 안 보면 그뿐이다, 라는 말이 유효할 테니까.

하지만 그야말로 낚시가 분명해 보이는, 그저 축구팬들의 클릭을 얻는 것으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기사와 그 제목들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런 기사들은 축구팬에게 어떤 유용하고 흥미로운 정보를 전해 주기는커녕, 제목을 보고 기사를 선택한 축구팬들의 기대를 야멸치게 배반하면서 그저 화를 돋우기만 하기 일쑤다. 구체적으로 최근 박지성이 출전시간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던 와중에 나온, 소위 낚시성 기사들에 대한 기억을 대충 더듬어 보면, 주중에 A매치가 없었던 덕에 체력을 아낄 수 있었던 박지성이 선발 출전할 확률이 높다던 기사나, 박지성이 지난 경기에 쉬었기에 이번에는 선발 출전할 확률이 높다고 어느 영국 기자의 발언을 소개한 기사나, 또는 이번에야말로 체력을 아낀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 선발 출전할 것이라고 구단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기사 등을 들 수 있겠다(여기에는 당연히 주관이 개입된다). 물론, 줄곧 박지성이 선발 출전할 것 같다고 설레발을 치던 기사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박지성이 전혀 선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기에 해당 기사가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한 기사들이 기사로서의 자격에 미달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잘못이라는 얘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런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조금 극단적이지만, 가령 맨유의 축구경기를 가위바위보 시합으로, 박지성을 '바위'라고 가정 해보자. 가위바위보의 주체인 퍼거슨 감독이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는 '가위'와 '바위'가 있다." 그러면 반드시 어느 기사에는 <퍼거슨, 우리에게는 '바위(박지성)'가 있다>는 제목과 함께, '바위'가 선발 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담긴다. 그리고 어느 영국인 기자나 구단 관계자가, 퍼거슨 감독이 '바위'를 사용한 적이 드물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바위'를 낼 것이라고 말하면 또 어김없이 그 발언을 인용한, <'바위(박지성)', 선발 출전 할 듯>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곤 하는 식이다. 이런 기사들은 당연히 알맹이가 빠져있고, 더욱이 선발 출전에 대한 근거로는 심히 터무니없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에게 '바위'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바위'를 몇 번 연속으로 안 내었다고 다음번에 꼭 '바위'를 내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당연히 축구는 가위바위보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언젠가 반드시 나오게 마련인 '바위'와는 달리, 매번 계속해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선수가 있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누구도 퍼거슨 감독의 의중을 명확히 알 수 없음은, 이미 작년 모스크바에서도 절실히 증명된 바 있다.

개인적으로는 '박지성'의 이름이 들어간 기사의 범람이 그 자체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불러도 대답 없는 허경영의 이름과는 달리, 박지성의 이름은 그저 한 번 제목에 가져다 쓰는 것만으로도 축구팬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음이 명백하니, 읽히는 것을 지상과제로 하는 기사가 박지성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기사가 읽혀야 의미가 있다고 할 때, 그 기사는 그것을 읽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 또한 마땅히 성립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기사의 제목이 때로는 '박지성의 웃음'일 수도 있고, 혹은 '박지성의 친구관계'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지성의 운명'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정작 '기사'가 그 제목에 걸맞은 내용을 오롯이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저 누군가의 말 한 마디를 따와서 추측으로 일관하는 기사나 혹은 전혀 실제 내용과의 관련성이 적은 기사에 '박지성'의 이름을 마구 갖다 붙인다면, 그것은 축구팬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박지성에게도 대단한 민폐가 아닐 수 없다(나는 박지성의 안티팬 중 최대 30%는 낚시성 기사에 낚여 금붕어가 되는 일을 반복하다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분명 선발 출전하리라는 기사에도 불구하고 박지성이 경기에 나오지 않으면 괜스레 짜증이 나고, 아주 가끔은 그 짜증이 박지성에게로 향할 수 있으니).

명백하게도, 박지성의 이름을 부른다고 건강해지거나 예뻐지거나 살이 빠지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경우가 있을 수 있더라도, 아마도 대개는 박지성의 이름을 부르면 즐겁고 행복하고 웃을 수 있는 일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 박지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박지성의 기사가 있고 그 기사를 읽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고, 이것은 박지성이 여전히 맨유나 혹은 다른 팀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감히 박지성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고하노니, 그 좋은 이름을 한낱 떡밥으로 사용하지는 마시기를. 아무리 박지성의 이름의 효능이 막대하다고 해도 금붕어의 기분마저 좋게 해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려나 축구팬들이 금붕어는 아닐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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