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이라는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이동국이 영국에서 두 번째 골을 넣었다. 상대가 4부리그인 맨스필드였다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일이지만, 그게 이동국이 넣은 '골'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폄하할 이유는 될 수 없다. 어차피 상대도 축구로 밥벌이를 하는 '프로'였고, 똑같은 룰 아래 벌어진 공정한 경기였으니 말이다. 그 오랜 기다림이 본인도 무척이나 답답했었던지, 이동국은 모처럼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오해할까봐 밝혀두자면, 나는 이동국의 팬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저 최고의 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한국선수에게는 상당한 애정이 생김을 부인할 수는 없다. 아니, 비단 프리미어리그 뿐만이 아니라, 해외에서 뛰는 한국선수에게는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구치곤 하니, 이건 분명 내가 종종 경계해 마지않는 내셔널리즘이 발현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부당한 비난이 가해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편치않다. 국가대표팀에게 과도한 비판이 쏟아질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선수이니 무조건적으로 편을 들어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대로, 싫어하면 싫어하는대로, 선수를 옹호하고 비판하는 것은 팬들이 지닌 의무이자, 권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거기에는 온전한 개인의 생각과 판단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동국을 예로들면, 그는 언제나 게으르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는다. 1998년 월드컵에서 대표팀의 부진 속에서도, 대담한 플레이를 보여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질 신인으로 각광 받았던 것이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님에도,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로부터 많이 뛰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택받지 못하고, 대표팀의 놀랄만한 선전과 대비되면서 이동국의 주가는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언제나 '게으른 선수'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사실, 나는 이동국의 경기를 '경기장'에서 본 기억이 없다. 간혹 TV로 K리그나 대표팀 경기를 보긴 했지만, TV화면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많이, 혹은 적게 뛰는지 판단하기란 제법 어려운 일이다. 물론 박지성의 경우에는 원체 많이 뛰어서 TV로도 충분히 그의 엄청난 체력을 느낄 수 있지만, 박지성이야 '두 개의 심장'을 가졌다고까지 이야기되는, 세계에서도 능히 상위권에 들 수 있는 선수가 아닌가. 박지성이 유일한 비교대상이라면 그 어느 선수인들 게으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계인'으로 각광받던 호나우지뉴의 경우는 어떤가. 어떤 TV광고에서 11명의 호나우지뉴로 구성된 팀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팀이 그다지 강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역시 호나우지뉴의 경기도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조심스럽지만, 그도 뛰는 양이 많지 않고, 수비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실상 11명의 호나우지뉴 팀이란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다.

나는 축구의 매력이란, 키가 크든 작든, 발이 빠르든 느리든, 체력이 강하든 약하든, 무엇으로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주요한 한 가지 장점이 있다면, 그것이 곧 팀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팀은, 선수들이 지닌 다양한 장점을 한 곳으로 엮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강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굳이 수비수가 화려한 드리블 기술을 가질 필요는 없고, 측면 미드필더가 꼭 장신일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공격수에게 경기장 전체를 뛰어다닐 수 있는 탁월한 활동량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물론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동국의 골이 반가운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공격수에게는 절실한 최선의 '선'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동국은 부진에 빠져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설령 그게 반드시 자신만의 부진 탓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5개월 간의 침묵에 이동국은 명백히 책임감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어제 마침내 '골'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골'에 여전히 불만이라면, 아직도 그의 '게으름'이 못마땅하다면, 나는 차라리 이동국의 경기를 보지 말기를 권하고 싶다. 장담하건대, 이동국에게 당신의 그런 불평을 불식시킬 능력은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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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 일기
김성칠 지음 / 창비 / 199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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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분명 학교 교과과정에서 '안네의 일기'에 대해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안네의 일기'가 대체로 어떤 과정을 통해 쓰여졌는지 말할 수 있고, 특히 그 중 한 부분은 읽어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학교교육의 일방적 결과이지만, 여기에 특별히 큰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역사 앞에서>라는 책을 읽고서 김성칠이라는 한 사학자의 이름과 그가 남긴 일기의 존재를 알 수 있었고, 1950년 6.25전쟁을 전후하여 쓰여진 그의 일기를 통해 내가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던 6.25와 당시의 사정이 얼마나 참혹하고 서글픈 것이었는지, 조금이나마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6.25전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저 북한의 일방적 남침으로 비롯된 '민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닳고 닳은 표현을 겨우 다시 끄집어낼 수 있을 뿐이고, 여기에는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6.25전쟁의 실상은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바와 사뭇 달랐다.

차라리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명확하다면, 그리고 '나의 나라'와 '적의 나라'가 성립한다면 그것은 다행임에 분명하다. 6.25전쟁을 기점으로 하여 친구는 친구가 아니게 되고, 형제는 더 이상 형제가 아니게 되고, 가족은 끝내 가족이기를 거부하고 만다. 파란색과 붉은색의 경계에서 극으로 치우치지 못하는 대다수 색들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의심을 받으며,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그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 칠 뿐이다.

이러한 혼돈ㅡ일방적인 증오도, 애정도 없는 참혹하고 서글픈 전쟁 속에서, 과연 어떻게 피아를 구분하고, 어떻게 정의와 불의를 판별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그 시대를 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전모를 대강 이해하는 것조차도 힘겨울 뿐이다. 그러나 최소한 공산당이 싫다고 울부짖었다던 한 어린 소년의 외침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 사이의 의뭉스런 관계를 맹목적으로 양립시켜오던 타성으로부터는 벗어날 수 있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내가 지금껏 이른바, '김성칠의 일기'를 모르고 지낸 것이, 오로지 내 무지로 인한 결과라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외국의 한 소녀가 쓴, '안네의 일기'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가장 참혹하고 서글픈 전쟁을 사료로서의 의지를 가지고, 매우 잘 서술한 이 일기를 뒤늦게 알게 되었음은 반드시 내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 일기가 1990년대 초에나 세상에 나온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이때 이미 '안네의 일기'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음을 생각하면, 유감스럽게도 역시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정체되어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만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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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pink 2008-02-1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이버에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들르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 (하)권 중에 김성칠님의 '역사 앞에서'란 글이 실려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일부만 발췌해서 실리기는 했지만 나름 선생님께서도 수업시간에 강조하셨고 자습서에서도 관련 내용이 조금이나마 설명되어 있었답니다^^
제가 배우던 시절이 2003년이니까 요즘은 우리 역사의 중요성이 그래도 예전에 비해서는 더 커지고 있지 않을까요?

Fenomeno 2008-02-1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실은, 이 글은 좀 더 예전에 썼던 거고, 최근에야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김성칠 선생님의 일기가 실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꿈의 도시 꾸리찌바 - 개정 증보판
박용남 지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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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라고 해서 미래지향적이고 기술지향적인 현대문명의 첨단을 상상한다면, 이 책은 오직 실망감만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꿈의 도시'라는 놀라운 찬사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빠라나주에 위치한 꾸리찌바는 대다수 개발도상국의 도시들이 지니는 기술적, 경제적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을 존중하고, 환경을 생각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는, 그런 꿈같은 도시를 기대한다면, 이 책은 충분한 위안과 희망을 줄 수 있음에 틀림없다.

인구 160만 명의 대도시, 꾸리찌바는 여러 부분에 있어서 현대도시들이 행하는 일률적인 도시행정과 차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현대도시들이 많은 비용을 들여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과 달리, 꾸리찌바는 그 수백분의 일의 비용을 들여 버스를 이용한 대중교통의 구축을 선택했다. 그 대신 '지하철의 지상화'라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도시교통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지구의 보존과 활용에 대한 창조적 발상이나,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주민들을 위한 도서관인 '지혜의 등대'의 건립, 공공서비스의 분산화를 위한 '시민의 거리' 등의 예는 꾸리찌바에서 행해지는 도시행정의 독특함과 창조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그러한 도시행정이 단기적, 즉흥적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래를 담당할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꾸리찌바는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쓰레기 아닌 쓰레기' 프로그램을 통해 재활용품을 교과서나 장난감으로 바꾸어줌으로써 아이들의 재활용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제고시킨다거나, 꾸리찌바 시의 역사에 대한 교육과 현장학습을 통해 시에 대한 소속감과 애정을 갖도록 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또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아이들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그들을 사회 내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서 꾸리찌바는 저예산 정책을 통해서도 창조적 발상과 시민들의 자발적 협력이 합쳐지면, 괄목할만한 정책적 효과를 이루어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의 대도시들이 지니는 많은 문제점이 무엇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궁극적인 도시행정의 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이런 꾸리찌바이기에 이 도시가 브라질 내에서 '존경의 수도'로, 국제사회에서 '희망의 도시', 또는 '지구에서 환경적으로 가장 올바르게 사는 도시'로 인정받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꿈은 결코 현실이 아니며, 이것은 '꿈의 도시 꾸리찌바'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꾸리찌바가 보여주는 창조적이고, 친환경적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을 존중하는 여러 도시행정들은 사람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고, 이것이 꾸리찌바로의 유입 인구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로 인해 꾸리찌바는 빈곤층의 증가를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들이 강 주변에 어지러이 버리는 쓰레기 문제와 오염된 하수를 그대로 방류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에 부닥친다. 뿐만 아니라 "꾸리찌바 시는 천국이 아닙니다."라는 전 시장 레르네르의 말처럼 꾸리찌바는 다른 도시들의 여러 문제들을 똑같이 가지고 있고, 이것은 바로 '현실의 도시 꾸리찌바'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만하다.

'꿈의 도시'와 '현실의 도시'는 다분히 상충적이고, 이는 '환경과 개발의 딜레마'에 관한 문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꾸리찌바가 원칙적, 이상적으로 축구하는 것은 물론 '지속가능한 개발'이지만, 적정한 개발의 수준을 상정한다는 것은 매우 막연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현실적으로 산적한 문제점들을 앞에 두고, 오로지 원칙적, 이상적 원리만을 추구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연 앞으로도 꾸리찌바가 여전히 '꿈의 도시'로 남을 수 있을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시의 교재에 이런 문구가 여전히 존재하는 한, 꾸리찌바는 분명 희망적이리라고 믿는다.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나는 당신과 함께 울어줄 수 있다.

당신이 웃고 싶다고 느낄 때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우리는 함께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필요치 않을 때도 역시 나에게 말하라.

그러면 나는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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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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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색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왠지 이 책은 파란색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같은 색도 좋고, 넘실거리는 파란 물빛과 같은 색이라도 좋다. 어느 쪽이든 보기만 해도 유쾌해지고, 청량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색이라야 그나마 이 책을 정의할 수 있으리라.

책 읽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겠냐마는, 왠지 이 책은 가까운 공원에라도 나가서 읽어야만 할 것 같다. 하늘은 청명해서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은 선선해서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그런 날이라면 이 책을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딱 알맞다. 따사로운 햇빛이 실내에 가득 차거나, 혹은 커다란 창을 통해 밖에서 내리는 보슬비가 훤히 내다보인다면, 실내에서 읽어도 나쁘진 않겠지만, 역시 그걸로는 뭔가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책을 읽는 방법이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왠지 이 책은 느릿느릿 읽어야만 할 것 같다. 아니, 읽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글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을지도 모를 사진들은 읽을 수 없는 것임이 당연하고, 그래서 만일 가능하다면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진과 글에서 전해지는 서글픔, 따뜻함, 아쉬움, 설렘 등, 그것이 어떤 느낌인가는 아무래도 좋다. 설령 그 속에서 저자와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더라도 전혀 상관없다.

책을 단 한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왠지 이 책은 '매혹'이라는 단어가 무척이나 어울린다. 총천연색의 사진들과 그것을 감상적으로 표현한 글,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여행이 주는 매력이 어울려 결코 쉬이 뿌리칠 수 없는 '매혹'으로 사람을 끌어 당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매우 불친절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욱 현실과 유리된 환상처럼 느끼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을 즈음, 여전히 이 책의 '매혹'에 휩싸여서는 왠지 '현실'을 인식해야만 할 의무를 느낀다. 온갖 색으로 표현된 사진들과 고급스런 인쇄 뒤에서 묵묵히 재료가 되어준 나무나 그 밖의 것들. 그리고 길 위를 다니는 사람들을 기꺼이 맞이해주는 길 위에 사는 사람들. 무엇보다 나에게는 돌아갈 곳이 항시 존재한다는, 너무나도 가슴 든든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이 책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수줍게 말하지만, 매혹으로 넘치는 이 책이 아무것도 아닐 리 만무하다. 그렇지만 '현실'이 없는 '매혹'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매혹'의 이면에 있는 '현실'이 반드시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것이 없다면 '매혹'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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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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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시절 최초의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법 진지한 꿈이어서, 나는 언제나 오직 축구화만 신기를 고집했고, 학교는 운동장을 사용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엄마로부터 한 달에 한 켤레씩 축구화를 사줘야 된다는 핀잔을 오래도록 들어야 했고, 비가 내릴때면 어린 남자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짚신장수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며 내 운동장이 비에 젖을 것을 걱정하곤 했다. 서점에서 내게 최초로 책의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내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축구 만화책이었고, 내 변덕으로 인해 무수한 취미생활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축구가 질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나는 축구에 미친 것일까?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의 저자인 닉 혼비는 내가 축구에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최소한 나는 축구경기가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울렁증이 생기지도 않고,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위해 온갖 징크스를 시도해보지도 않으며, 주말의 모든 약속이 오직 축구에 의해 좌우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단 한 번도 내가 응원하는 팀과 나를 동일시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축구장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그렇다면 '축구중독자'를 자처하는 저자는 축구에 미친 것일까?

축구,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날에 푹 빠져있는 영국인이라고 하면, '훌리건'이라는 단어를 쉽게 연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신문지상이나 뉴스에서 종종 등장한 바 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이 책의 저자를 그저 '훌리건'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매년 축구경기를 보는 수백 만 명 가운데 최소한 95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평생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며, 저자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 축구에 미친 듯이 빠져버린ㅡ그러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여전히 그것은 못 말릴 정도로 지나쳐 보이기는 하나, 자못 유쾌해 보인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하던 아스날의 그저 그런 경기에 갑자기 빠져버린 어린 소년이 어떻게 아스날과 함께 성장하면서, 팬으로서의 슬픔과 절망, 그리고 터질듯 한 감동과 환희에 휩싸이게 되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문득 내가 지닌 축구에 대한 애정이란 것은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비록 축구로 인해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고, 정신과 치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어이 아스날의 홈구장인 하이버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신혼집을 마련할지라도. 1985년의 '헤이젤 참사'에 가슴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끝내는 그 경기를 다 보고 말았다고 고백할지라도. 못 말릴 이 축구광이 지나쳐 보일지언정 못내 부러운 까닭은, '잉글랜드는 나의 팀이 아니다.'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는 자신의 팀에 대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리버풀 팬들로 인해 벌어진 '헤이젤 참사'에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진실로 축구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이 지나친 것은 그가 축구에 미쳤기 때문이 아니고, 강박증에 사로잡힌 탓도 아니며, 정신병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가 처음 우연히 아스날의 우울한 경기에 빠져버리게 된 것은 느닷없이 벌어진 운명적인 만남이었고, 그 만남에서 그는 축구(아스날)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 것일 뿐이다. 여기에 그의 의지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이것은 그의 잘못도, 그렇다고 축구의 잘못도 아님에 분명하다. 오히려 그것은 처음의 만남 이후에도 끝까지 변치 않을 '일생일대의 완벽한 만남'이었고,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충분히 풍요로워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처음 이 책의 존재를 알고부터 나는 정말로 이 책을 기대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1968년에서 1992년 사이의 영국과 아스날은 내게 너무 낯선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야 물론 그런 문제쯤은 축구에 대한 저자와 나의 애정 앞에서는 정말이지 사소한 것이지만, 좀 더 나중의 아스날이었다면 내게도 조금은 친숙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건 이제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아스날이 03-04시즌에 전무한 무패 우승을 달성했을 때, 여전히 하이버리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저자를 상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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