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어린 시절 최초의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제법 진지한 꿈이어서, 나는 언제나 오직 축구화만 신기를 고집했고, 학교는 운동장을 사용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었다. 덕분에 나는 엄마로부터 한 달에 한 켤레씩 축구화를 사줘야 된다는 핀잔을 오래도록 들어야 했고, 비가 내릴때면 어린 남자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짚신장수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며 내 운동장이 비에 젖을 것을 걱정하곤 했다. 서점에서 내게 최초로 책의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내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축구 만화책이었고, 내 변덕으로 인해 무수한 취미생활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축구가 질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런 나는 축구에 미친 것일까?

매우 다행스럽게도, 이 책의 저자인 닉 혼비는 내가 축구에 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준다. 최소한 나는 축구경기가 열리기 몇 시간 전부터 울렁증이 생기지도 않고, 응원하는 팀의 승리를 위해 온갖 징크스를 시도해보지도 않으며, 주말의 모든 약속이 오직 축구에 의해 좌우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단 한 번도 내가 응원하는 팀과 나를 동일시해본 적이 없을뿐더러, 무엇보다도 축구장에 묻히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상상도 못해본 일이다. 그렇다면 '축구중독자'를 자처하는 저자는 축구에 미친 것일까?

축구,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날에 푹 빠져있는 영국인이라고 하면, '훌리건'이라는 단어를 쉽게 연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신문지상이나 뉴스에서 종종 등장한 바 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이 책의 저자를 그저 '훌리건'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매년 축구경기를 보는 수백 만 명 가운데 최소한 95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평생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며, 저자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사람들, 축구에 미친 듯이 빠져버린ㅡ그러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여전히 그것은 못 말릴 정도로 지나쳐 보이기는 하나, 자못 유쾌해 보인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축구를 구사하던 아스날의 그저 그런 경기에 갑자기 빠져버린 어린 소년이 어떻게 아스날과 함께 성장하면서, 팬으로서의 슬픔과 절망, 그리고 터질듯 한 감동과 환희에 휩싸이게 되는지를 지켜보다 보면, 문득 내가 지닌 축구에 대한 애정이란 것은 얼마나 사소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비록 축구로 인해 여자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고, 정신과 치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어이 아스날의 홈구장인 하이버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신혼집을 마련할지라도. 1985년의 '헤이젤 참사'에 가슴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끝내는 그 경기를 다 보고 말았다고 고백할지라도. 못 말릴 이 축구광이 지나쳐 보일지언정 못내 부러운 까닭은, '잉글랜드는 나의 팀이 아니다.'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는 자신의 팀에 대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리버풀 팬들로 인해 벌어진 '헤이젤 참사'에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사과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진실로 축구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이 지나친 것은 그가 축구에 미쳤기 때문이 아니고, 강박증에 사로잡힌 탓도 아니며, 정신병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가 처음 우연히 아스날의 우울한 경기에 빠져버리게 된 것은 느닷없이 벌어진 운명적인 만남이었고, 그 만남에서 그는 축구(아스날)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 것일 뿐이다. 여기에 그의 의지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이것은 그의 잘못도, 그렇다고 축구의 잘못도 아님에 분명하다. 오히려 그것은 처음의 만남 이후에도 끝까지 변치 않을 '일생일대의 완벽한 만남'이었고,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충분히 풍요로워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처음 이 책의 존재를 알고부터 나는 정말로 이 책을 기대했다.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1968년에서 1992년 사이의 영국과 아스날은 내게 너무 낯선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야 물론 그런 문제쯤은 축구에 대한 저자와 나의 애정 앞에서는 정말이지 사소한 것이지만, 좀 더 나중의 아스날이었다면 내게도 조금은 친숙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건 이제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가장 매력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아스날이 03-04시즌에 전무한 무패 우승을 달성했을 때, 여전히 하이버리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을 저자를 상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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