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와 사랑에 빠지다 - 박지성,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현지에서 1년간 독점취재하다
최보윤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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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의 저자인 최보윤 기자의 글을 비교적 신뢰하는 편이다. 그녀의 글을 처음 접한 건 어느 네티즌이 퍼 나른, 그녀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서였는데, 프리미어리그에 관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지던 당시에도 그녀의 글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었다. 그녀가 영국 특파원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포포투>의 '최보윤의 sexual football' 코너를 통해 정기적으로 그녀의 글을 접할 수 있었고, 나는 코너 이름만큼이나 섹시하고 매력적인 그녀의 글을 매우 흥미롭게 읽고 있다.

그녀가 축구를 대하는 방식은 여느 기자들과는 확실히 구별된다. 이를테면, 박지성의 섹시한 엉덩이를 주목한다거나, 유부남 베컴이 주는 매력을 파헤친다거나, 혹은 무리뉴 전 첼시 감독이 중년 남성으로서 보여주는 중후함을 한껏 드러내주는 식이다. 물론, 이는 '최보윤의 sexual football'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이자, 그 코너의 컨셉에 맞춘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글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비교적 뚜렷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은, 축구가 남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빠르게 해체되는 경향과 맞물려, 그녀 자신의 독특한 색깔로서의 경쟁력을 제고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책 <프리미어리그와 사랑에 빠지다> 역시, 그녀의 독특한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이 책을 좀 더 매력적이고 감성적으로 만들어 준다. "음. 사실 나는 패스, 돌파, 뭐 이런 것을 시간순으로 다시 뜯어 설명하거나 수치화시키는 것보다는 뭐랄까, 축구를 뮤지컬 같은 공연을 보듯 즐기는 그런 걸 바랐었다.(91p)" 라는 그녀의 말처럼, 이 책은 축구 전술이나 기록과 같은 객관적 사실에 주목하기보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그러나 그로 인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녀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솔직함이 바로 그녀가 프리미어리그를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였음에 분명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 박지성 선수가 몇 경기에 나서서 몇 골을 넣었고, 그가 어떤 전술적 역할을 수행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그가 맨유라는 세계적 구단에서 동료들과 어떻게 함께 어울려 나가는지의 과정을 살펴보는 것. 조금씩 잊혀지고 비난받는 설기현 선수의 단점을 분석하기보다는, 그의 섬세한 심정과 강인한 의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드러내 주는 것. 꾸준히 경기에 출장하던 이영표 선수의 기록을 살피기보다는, 그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하는 것. 이외에도 프리미어리그의 스타선수들과 감독들이 지닌 매력을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소개해 주면서, 좀 더 색다르면서도 흥미로운 방식으로 프리미어리그를 접하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스포츠가 지니는 속성상 수치와 같은 객관적 정보가 전혀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정보를 버무리고 저자의 개인적 경험을 첨가해서, 달콤하고 톡톡 튀는 글로 만들어내는 그녀의 솜씨는 정말 감탄할 만하다. 예컨대, 영국 언론의 반응을 간략하게 브리핑해 준다거나, 웨인 루니의 여자친구인 콜린 맥러플린이 여성잡지에서 루니에 대해 이야기한 내용을 캐치해 낸다든가 하는 것들은 저자의 주관적 시선과 관심이 반영된 것이라 자못 흥미로운 것이다. 또한, 책 구석구석을 장식하는 선수들의 사진은 마치 저자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듯, 선수들의 매력적인 모습을 한껏 드러내는 사진들뿐이어서 이 사진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이 책도 아쉬운 점들이 없지는 않다. 두 번째 파트인 '반짝반짝 빛나는 8인의 축구 스타' 부분이 특히 그러한데, 이 부분에는 <프리미어리그와 사랑에 빠지다>라는 책 제목이 무색하게 4명의 非프리미어리그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그들이 영국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국에서 저자가 접했을 정보와 경험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저자가 직접 그들을 취재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들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국, 이런 저런 정보를 취합해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는 저자의 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글이 지니는 색깔이 현저하게 사라지면서 밋밋해지고 만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은 초반에 그녀의 글이 주는 매력이 기대 이상이어서, 거기에 비교되는 상대적인 아쉬움이라 할 수 있을 듯하고, 축구팬이라면 결코 실망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는 역시 장점이 훨씬 많아서, 이 책은 가히 프리미어리그 팬을 위한 종합선물세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이 책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현재의 축구 소식'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내 '과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저자의 프리미어리그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결국, 저자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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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화창한 봄날, 울산의 홈 개막전을 보기 위해 기어이 문수구장을 찾았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간, 울산의 경기를 보고서 만족스러웠던 기억은 거의 없지만, 오늘의 상대는 지난 시즌 우승팀인 포항이었기에 나름의 기대가 없지 않았다. 과연 정규시즌에서 5위를 한 팀이 플레이오프에서의 선전만으로 우승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바람직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전진 패스를 강조하는 파리아스 감독의 공격적 마인드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왕이면 울산이 이겼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승리야 어쨌든 그저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펼쳐지기를 바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비지향적인 팀이라는 평가를 받는 울산은 공격지향적인 팀이라는 평가를 받는 포항을 3대0으로 완파했다. 하지만 더욱 놀랍게도, 그럼에도 경기가 재미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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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도전 박지성
박지성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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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꿈의 극장'이라 불리는 올드 트래포드의 그라운드를 달리는 것을 보면 묘하게 현실감이 없어질 때가 있다. 이미 그가 맨유에 입단한 지도 3년이 다 되어가고, 어느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우리네 안방으로 성큼 다가섰지만, 아무래도 박지성이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구단에서 최고의 선수들과 나란히 뛰는 것을 보면, 새삼스레 놀라게 되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박지성이 정말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라니!

물론, 맨유는 어디까지나 축구팀이고, 맨유 선수들이라고 손으로 축구를 하는 것도 아니니, 내 이런 호들갑은 조금 지나쳐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중국의 13억 인구가 아직 못해낸 일이며, 이는 축구의 나라 브라질로 시선을 돌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맨유에 한정된 일이긴 하지만, 브라질 출신 선수로서 맨유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사례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만큼, 박지성의 맨유 입단과 성공적인 적응은 그의 축구실력 뿐만이 아니라, 그의 적응력과 엄청난 노력, 그리고 행운마저 따른 결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고, 이는 확실히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박지성에 대한 놀라움과 감탄이 그대로 그의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으로 이어지리라고 믿기에는 당시 박지성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었다. 2005년 6월에 이루어진 박지성의 맨유 입단 소식을 전후로, 모든 언론매체가 박지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고, 더불어 그의 과거 역시 집중적으로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이다. 팀 동료 반 니스텔루이가 박지성에게 잘 대해주고, 함께 한인식당을 찾았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박지성이 한때 K리그에서조차 외면 받았고, 평발이라는 사실까지. 이미 한 번쯤 언급되었음직한 온갖 이야기들이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며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고, 이 책이 나온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책이 급작스런 호응을 얻기에 그보다 더 적절한 출간일은 없었을지 모르나, 이 책이 지닌 가치가 오롯이 드러나기에는 오히려 그러한 비정상적 열광이 조금은 정상궤도를 찾은 뒤라야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이 책에는 분명, 축구선수 박지성의 진지한 고민과 노력과 열정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맨유의 선수로서 들려주는, 맨유에서의 시시콜콜한 생활에 대한 '소비성 기사' 또한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축구선수로서의 박지성과, 맨유선수로서의 박지성은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밝히듯이, 맨유가 그의 목표가 아니라 축구선수로서 지나치는 한 과정이라면, 그는 좀 더 축구선수로 남도록 노력해야 했다.

냉정히 말해서, 국가대표로 뛰는 선수치고 노력하지 않았던 선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성남의 장학영 선수가 연습생 출신으로 지금에 이른 과정이나, 최근 집중 조명을 받은 서울의 곽태휘 선수가 실명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늦게나마 빛을 본 건, 두말 할 나위 없이 노력과 열정이 있었던 덕이다. 그렇다면, 이외에도 많은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는 없고, 박지성에게 있는 단 한 가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의 선수'라는 프리미엄일 뿐이다.

어쩌면,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기 위해 흘려야 했던 땀방울은 다른 선수들보다 조금쯤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소속팀의 차이 하나로 다른 모든 선수들과 그를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할 뿐만 아니라, 부당하기조차 하다. 맨유에 입단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나온 박지성의 자서전은, 그래서 씁쓸하다. 훌륭한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아야 한다고 철썩 같이 믿었던, 박지성의 고지식함과 융통성 없는 성격, 또 자신을 성장시켜준 히딩크에 대한 고마움으로 기꺼이 자신의 이적료 일부를 히딩크 재단에 기부한 그의 선함이 혹 오직 맨유라는 이름 뒤로 가리어질까 안타깝기도 하다.

맨유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빼고 보자면, 이 책은 제법 진지한 측면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 박지성이 직접 쓴 재미난 일기가 있고, 선배의 부당한 폭력이 가해지던 시절에 대한 그의 소신이 있으며, 미래에 그가 꿈꾸는 축구인으로서의 바람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서문에 밝혔듯이, 자신을 성원해주는 팬들에 대해 보답하고자 하는 진정한 선의가 담겨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다른 많은 선수들도 가지고 있을 소속팀에 대한 기억과 노력에 대비되는, 박지성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많지 않을 때, 박지성의 이야기는 이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구단의 이름으로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그는 다만, 맨유선수 박지성일 뿐인 것이다.

박지성이 고민해야 할 것은, 그리고 그가 팬들에게 보답해야 할 것은, 그가 맨유선수 박지성이 아니라 축구선수 박지성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라고 믿는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맨유 소식을 전해주기 보다는 차라리 다른 선수들과 똑같은, 그러나 다른 그만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조금 더 시간이 흘러야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여전히 나는 그의 맨유 이야기 또한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 책도 그런 측면에서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좀 더 박지성 본연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게 내 솔직한 욕심이다. 그리고 그게, 좀 더 나중에 박지성의 자서전이 다시 한 번 나오기를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저,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올드 트래포드를 힘차게 달리는 그 하나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한 위로와 기쁨을 얻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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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의 중국견문록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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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중국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을 짐 한구석에 밀어 넣었다. 비록 여행은 3박4일간의 짧은 패키지 상품에 불과했지만, 여전히 나는 중국에 가보고 싶은 열망을 내게 불어넣었던, 이 책의 존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여행 일정은 제법 빡빡해서 가져갔던 책은 거의 읽지 못했다. 그러나 내게는 정녕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굳이 이 책을 팽개쳐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사실은 내 중국여행에 대한 감흥을 되새기기 위해 이 책을 마저 읽은 것이지만, 더 이상 <한비야의 중국견문록>에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말은, 한비야가 본 중국의 편협함을 꼬집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책이 이제 중국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며, 내가 본 중국과 한비야가 본 중국이 다르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나는, 중국인들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하며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들어가려고 노력했던 한비야의 중국생활이야말로 중국의 실상을 좀 더 명확히 밝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값진 통찰력을 지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에 '중국'이 없다고 말하는 까닭은, 내가 중국으로 떠나면서 이 책을 집어든 단 한가지 이유, 즉 중국행에 대한 갈망을 불어넣은 책이라는 단편적 기억이 얼마나 자기기만적인 조작이었는지를 자각했기 때문이다. 실상, 내가 중국에 매력을 느꼈던 것은 값싼 과일을 실컷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그 人의 물결을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며, 중국의 생활이 유달리 궁금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비야처럼 중국어와 사랑에 빠져 중국어를 사용하는 중국을 직접 겪어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그토록 중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말하자면, '중국'은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한비야가 스페인어를 배우러 스페인으로 갔든, 혹은 일본어를 배우러 일본으로 갔든, 심지어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중동으로 갔더라도, 나는 그녀가 갔던 나라를 그리며 가보고 싶어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나는, 한비야가 40대라는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보여주는, 그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열정에 매료되었을 뿐인 것이다. 어려서부터 꿈꿨던 세계여행을 마치자마자 우리나라 국토 종단을 시작하고, 이어서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고, 그 와중에 긴급구호가로서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그 엄청난 生의 열정에 한껏 고무되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나는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중국'만 기억했더란 말인가.

가을에 피는 국화는 첫 봄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개나리를 시샘하지 않는다. 역시 봄에 피는 복숭아꽃이나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한여름 붉은 장미가 필 때,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꽃보다 늦게 피나 한탄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준비하여 내공을 쌓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하늘이 높아지는 가을, 드디어 자기 차례가 돌아온 지금, 국화는 오랫동안 준비해온 그 은은한 향기와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것이다. (p194)

최근 몇 년간, 나는 이보다 더 따스한 위로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이 따스한 위로를 더 이상 기만하고 싶지는 않다. 중국을 매력적으로 만든 것이 한비야의 열정이었던 것처럼, 국화가 자신의 시기에 맞추어 꽃을 피운 것은 명백하게 자신의 준비와 내공이 있었던 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막연히 '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한비야의 열정을 지워버리고, 오직 '중국'만 기억했던 자기기만을 다시 저지르는 일임에 분명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씨도 뿌리지 않고 물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떤 꽃도 활짝 피지 못하는 법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이 책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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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 니어링 지음, 이석태 옮김 / 보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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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이전에 <스콧 니어링 자서전>과 <조화로운 삶>을 읽었었지만,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스코트 니어링이 보이는 정직함, 자기 신념에 대한 확신과 의지, 그리고 고결한 정신과 지적 탐구심은 확실히 존경스러웠지만, 그것이 내게 오로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금욕적이고, 절대로 타협과 느슨함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성정은, 솔직히 많이 답답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니어링 부부가 함께 살며 보여주는 '조화로운 삶'도 본받을 만한 삶임에 분명하지만, 최소한 내게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보여 조금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저, 그들은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드러나는 스코트 니어링의 생애와 생활방식, 그리고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은 진실로 감동적이다. 스코트 니어링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는 이미 조금이나마 알고 있던 바이지만, 헬렌 니어링의 눈으로 바라본 스코트의 삶은, 그에 대한 내 첫인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헬렌이 소개하는 스코트의 편지와, 헬렌 자신의 스코트에 대한 서술에는 스코트의 애정과 섬세함, 그리고 유쾌함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고, 헬렌은 그런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전혀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몬트와 메인에서 직접 농장을 경영하며, 손수 돌집을 짓고, 채식주의와 비폭력주의를 추구하는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도, 마찬가지로 뜻밖에 아름답기만 하다. 그들의 농장생활에 대한 것은 오히려 이 책보다는 <조화로운 삶>이나 <조화로운 삶의 지속>에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겠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니어링 부부의 삶에는 '조화로운 삶' 이상으로 중요할 '사랑'이 절절이 스며들어 있는 까닭이다. 즉, 상류층의 편안한 지위와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스코트의 신념과 생활방식에 기꺼이 동조한 헬렌의 결단과 사랑이 그들의 삶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필수조건이었던 셈이다.

누구나 그저 마다하고만 싶은 죽음도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 속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수명이 다한 육체의 껍질을 벗고, 무한히 계속되는 우주의 섭리 속에서 새로운 영혼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그저 상투적이고 관념적으로만 들리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100세에 이르러 자의로 곡기를 끊고, 의식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스코트의 모습과 더불어 장엄한 감동을 준다. 물론 이 장엄한 스코트의 '마무리'가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의 곁을 지킨 헬렌이 있었던 덕택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리고 이러한 헬렌의 사랑에 대해, 스코트는 동시대인 가운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헬렌입니다." 하는 대답으로 화답한다.

명백하게 지속 불가능한 현대 물질문명의 위기 속에서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이 훌륭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대안은, 현재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거의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는 여전히 다소의 부담스러움을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스코트 니어링의 엄격한 생애도 같은 맥락에서, 존경스럽되 불편함을 수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니어링 부부의 '아름다운 삶'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삶의 지침을 담고 있고,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의의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아름다운 삶'의 대전제는, 의심할 바 없이 '사랑'일 것이다.

엄격하고 꼬장꼬장해 보이기만 하던 스코트 니어링을 매력적인 사람으로 변모시키고, 때로는 그저 불편해보이기만 하는 '조화로운 삶'을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고, 필연적으로 마주칠 두려운 죽음을 건강하고 의식적인 '마무리'로 승화시킨 매개체인 '사랑'. 서로 마주보기보다는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를 매개로 함께 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니어링 부부의 '사랑'. 나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바라건대 그 전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융은 이렇게 썼다. "두 개성의 만남은 두 화학물질의 결합과 같다. 반응이 이루어지면, 둘은 변화한다." 우리도 그와 같았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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