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불과 5일 앞으로 다가온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란 누구도 쉽사리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총 64경기가 펼쳐지는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최소한 3경기는 치르리라는 것이고, 이는 곧 한국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이들이 적어도 3경기는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남아공과 한국 간의 시차로 인해 특히 마지막 조별 경기인 나이지리아와의 일전을 보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새벽 시간대를 뜬눈으로 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4년 만에 한 번 찾아오는 월드컵에서 자국의 경기를 응원할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받은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작 그 정도로만 만족한다면 이는 4년간의 기다림 끝에 맞은 월드컵을 여전히 꽤나 소박하게 즐기는 것이 될 것이다. 물론, 한국 대표팀이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경기수가 늘어날 가능성도 없지 않고, 또 꼭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아니더라도 여전히 주목해 볼 만한 경기는 충분하지만, 가령 경기가 없는 날이랄지 혹은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어떨까? 주구장창 재방송을 시청하거나 관련 기사를 찾아 읽거나 혹은 목욕재계를 하고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면 좀 더 월드컵을 재미있고 풍요롭게 그리고 유익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들도 넘쳐난다. 이른바 '월드컵 특수'를 맞아 축구와 관련된 책과 영화 등이 잇달아 선을 보이고 있거니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월드컵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월드컵 따위를 즐기지 않는다면 모르되, 이왕지사 월드컵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면 월드컵과 축구 관련 문화매체를 눈여겨보는 건 그래서 추천할 만한 일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진짜로 11배쯤 월드컵이 즐거워지는 건 실은 장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월드컵과 축구가 이루어 온 방대한 역사적,문화적 깊이에 다가가면 갈수록 월드컵이 좀 더 풍성하게 다가오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다. 다가오는 남아공 월드컵 기간 동안, 월드컵의 품 안에서 그저 '축구'에 흠뻑 빠져보는 것도 제법 괜찮은 일이 아닐까.

  

1. 포포투

 월드컵을 맞아 월드컵 가이드북들이 더러 나왔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번 달 포포투 한 권만 있으면 굳이 가이드북들이 없어도 월드컵을 즐기는 데에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월드컵이 열리는 달인 만큼 기본적으로 이번호는 월드컵과 관련된 특집 기사들이 다수 눈에 띄는데, 그중에는 대개의 가이드북들이 다룰 법한, 본선에 진출한 32개국에 대한 분석이나 한국 대표팀과 상대할 팀들에 대한 분석 그리고 한국 대표팀 자체에 대한 분석 등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고, 또한 월드컵에 출전하는 해외 스타들과의 짤막한 인터뷰나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 몇 명의 인터뷰 등 어지간한 가이드북에서는 보기 힘든 기사도 수록되어 있다.
더욱이 이번 달 포포투는 부록만 해도 두툼하다. 제지값 상승으로 인한 부록 제공 중단을 번복하고 여전히 부록으로 제공된 <챔피언스>는 차치하고라도, 이번호에는 각각 나이키와 아디다스와 관련된 읽을거리들도 부록으로 제공된다. 물론 이러한 소책자들은 기본적으로는 나이키와 아디다스의 광고를 위한 것이겠지만, 월드컵의 역사가 본래 축구와 거대 스포츠 기업과의 공생의 역사인 만큼 이 부록들은 그러한 관계를 증명하는 흥미로운 자료라고 할 만하다.

2. 축구장을 보호하라 

 이 책은 2002년 월드컵과 관련한 책이다. 당장 2010년 월드컵을 코앞에 둔 마당에 또 2002년 월드컵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이 책의 의미는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 그런 류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 책의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002년에 우리를 환희로 이끌었던 한국 대표팀의 선전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선'이었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2002년 월드컵은 다분히 제한된 수사에 의한 단선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곤 한다. 투혼을 보인 선수들에 대한 환호, 명민한 전략을 보인 히딩크에 대한 찬사, 열광적이고 동시에 질서 있는 응원을 한 국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등, 이런 기억들이 모두 한국 대표팀의 선전과 결부되면서 2002년 월드컵을 여전히 가슴 떨리는 '영광'의 이미지만으로 한정시키는 셈이다.
그에 반해 이 책은 보다 다채로운 수사로써 2002년 월드컵의 다양한 기억들을 풍부하게 펼쳐 놓는다. 단지 '한국팀이 선전한' 월드컵이 아닌, 이런 저런 에피소드와 이면들로 가득한 문자 그대로의 '월드컵'을 저자는 인문학적 깊이와 예민한 감각으로 접근하고, 이는 곧 월드컵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고 깊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3. 피파의 은밀한 거래

 가뜩이나 월드컵 단독 중계를 고수하면서 축구팬에게 밉보인 SBS는 최근 '전시권(Public Exhibition Right)'과 관련해 공문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과연 시방새'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전시권이란 공공장소에서 월드컵 경기를 상영하면 경기당 적게는 수백만원에서부터 많게는 1억원에 이르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 하지만 시방새도 시방새지만, 사실 '전시권'에 대해서 특히나 찬사(?)를 받아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FIFA'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뜯어내려는 그들의 상업적 명민함을 보라.
이미 하나의 권력이 되어버린 FIFA가 그렇게도 돈을 벌어서 대체 어디에 쓰려고 하는 것일까? 지구의 평화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축구의 발전을 위해서?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축구공을 선물하기 위해서? 분명 일부분은 그렇게 쓰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돈의 용처는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해서, 심지어 지난 2007년 제프 블래터 회장이 어느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봉으로 100만 달러를 받고 있다고 말하기 전까지(물론, 이 발언도 FIFA의 공식적인 발언은 아니다) FIFA 회장의 연봉조차도 베일 속에 가리어져 있었다. 이 책은 그렇듯 거대한 권력 속에서 썪어 있는 'FIFA의 은밀한 치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4.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 

 한국인 아내를 두고 소주와 삼겹살을 사랑하는 영국인 저널리스트 존 듀어든은 그의 독특한 포지션만큼이나 독특한 글을 쓰는 이다. 자발적으로 한국과 연을 맺은 만큼 그에게는 한국,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축구에 대한 애정이 넘치지만, 또한 태생적으로 한국과는 멀고도 다른 곳에서 온 만큼 한국축구가 지니는 모순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적확하고 날카롭게 지적할 줄 안다.
이 책은 그렇듯 내국인의 따뜻함과 외국인의 냉철함을 아울러 지닌 그가 네이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것이다. 연재의 묶음이라는 책의 속성상 시의성 측면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지만,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그야말로 '거침없이'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봄직한 것들임에는 분명하다. 여느 한국의 축구칼럼과 달리 시원하고 명쾌한 것은 물론, 유머러스한 그의 글은 사뭇 재미있기까지 하다.

 

 

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세계의 도처에서 무시로 벌어지는 무수한 축구경기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운 경기들이 존재한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적대 중이던 영국군과 독일군이 잠깐 휴전을 하고 치렀던 축구경기라거나 혹은 비아프리아 전쟁(나이지리아 내전) 중 3일 간의 휴전을 이끌어 낸, 펠레가 속한 브라질과 나이지리아와의 축구경기 같은. 물론, 경기가 끝난 이후 짧은 휴전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그때 있었던 '아름다운 게임'의 의미마저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로벤섬에서 펼쳐졌던 '아름다운 게임'의 자취를 좇는 이 책이 오늘날 여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절망과 고난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존엄'과 '행복'과 '희망'을 되새기는 데에 기여했던 '축구'의 가치는 수용소가 폐쇄된 후에도 여전히 빛나고, 또한 그곳에서 남아공 축구 리그가 배태되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이래저래 이 책은 남아공 월드컵과 함께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책으로 보인다.


6. Football 축구
 

 3만원 대의 정가에 200페이지도 안 되는 이 책의 스펙(?)을 보면 일단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이 책의 실물을 확인하고는 조금은 납득을 했다. 이 책의 외관은 기본적으로 축구공을 닮은 둥근 형태를 띠고 있는데, 표지의 재질은 마치 스펀지 마냥 푹신푹신하다. 전체적으로 미니 사이즈의 축구공을 압축한 형태로, 외관만 놓고 보자면 이 책은 진정 축구팬을 위한 '맞춤형' 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에 비해 책의 내용은 기실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축구의 역사와 규칙'을 설명하고 '불멸의 스타'들을 언급하며 '주요 대회'를 소개하는 건 이미 축구팬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이다. 관건은 익숙한 내용을 얼마나 참신하고 생생하게 다루느냐 인데, 솔직히 말해서 191페이지로는 너무 턱없이 부족할 듯하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축구팬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독특한 책임에는 분명하다.

7. 축구란 무엇인가 

 작년에 <야구란 무엇인가>를 무척 감명 깊게 읽고는 왜 축구에는 그와 같은 책이 없는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었다. 그런데 며칠 전 신문의 북 섹션을 통해 <축구란 무엇인가>가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야구란 무엇인가>와 <축구란 무엇인가>는 실제로 각기 다른 국적의 원서를 번역한 것이고, 둘 사이의 상관관계는 사실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야구란 무엇인가>가 그랬던 것처럼 <축구란 무엇인가> 또한 수많은 축구관련 서적 중에서도 '탁월한' 책을 출판사가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있다.
목차를 살펴보면 일단 충분히 흥미로워 보인다. 다양하고 독특한 소제목들은 과연 그러한 소재로 축구의 어떤 면을 이야기하려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고,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내용도 적잖이 만족스럽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축구 책들 중 으뜸가는 책이다."라는 어느 방송의 소개 멘트는 믿을 게 못 되지만 "독일의 수많은 축구 도서 중에서도 이 책이 최고로 꼽힌다."는 차범근의 추천사는 한 번 믿어 봐도 좋을 듯하다.

 

8. 월드컵 1930-2010 

 이른바 '월드컵 시즌'을 맞아서 나온 책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을 단 한 권만 고르라면 바로 이 책, 표지부터 익살스럽고 독특한 캐리커처로 흥미를 끄는 <월드컵 1930-2010>을 선택하겠다.
책장을 넘기면 이내 마주하게 되는 캐리커처의 향연으로 일단 눈이 즐거운 이 책은 내용 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다. 1930년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부터 2010년 제19회 남아공 월드컵까지, 월드컵의 역사를 모두 아우르면서 각 대회를 빛냈던 선수나 결승전의 골 장면들, 혹은 '지단의 박치기'와 같은 흥미로운 사건들과 특기할 만한 단편적인 사실 등이 헤르만 악셀의 재기 넘치는 일러스트로 '재현'되고, 각 대회의 특징을 포착하는 안목도 인상적이다. 게다가 도판의 시원한 크기는 이 책의 소장 가치를 더욱 높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가히 축구팬의 보물이 될 만한 책이며, 굳이 축구팬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난 월드컵의 역사를 흥미롭게 개관하는 데에 상당히 유용하고 즐거운 책이라고 할 만하다.


9. 맨발의 꿈

 월드컵은 지구촌 축제로 명명되지만, 기실 이 축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국가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이를테면 동티모르. 200개국 남짓의 피파 회원국 중에서 현재 200위를 기록 중인 동티모르가 월드컵을 즐기기란 그리 녹록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동티모르에도 '기적'은 일어났다. 2004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 유소년 대회인 리베리노컵에서 동티모르의 어린 소년들은 일본을 4-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 그리고 이 기적의 한가운데에 한국인 김신환 감독이 있었다.
<맨발의 꿈>은 김신환 감독과 동티모르가 함께 엮어낸 기적 같은 실화를 다루고 있는 영화다. 축구선수로서 불운을 겪었던 김신환이 동티모르에 스포츠 용품점을 열고, 거기서 장사에는 실패한 대신 소년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게 되고, 함께 '꿈'을 꾸게 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펼쳐진다. 6월 24일 개봉 예정이며, 최근에 김신환 감독이 직접 쓴 <맨발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책도 출간된 바 있다.

 



10. 축구의 신 : 마라도나

 축구에 관하여 21세기를 20세기와 비교하여 정의 내리자면, 나는 21세기는 '신들이 사라진 시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록 21세기에도 여전히 호날두와 메시 같은 경이로운 선수들이 존재하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20세기 선수들의 압도적인 존재감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유일무이한 '축구황제'로 추앙 받는 펠레나, 혹은 '신'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마라도나와 같은 선수들이 21세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실제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를 숭배하는 종교도 있다고 한다).
<축구의 신 : 마라도나>는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와 조별 예선에서 만나게 되면서 더욱 많이 들리게 된 이름인 마라도나에 관한 영화다. 아직까지는 과연 이 영화가 다루는 것이 마라도나의 '신적인 행적'일지, '인간적인 면모'일지, '악동의 기행'일지, 아니면 이 모든 모습을 망라한 것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거나, '신들의 시대'인 20세기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던 한 위대한 축구 선수에 관한 영화는 축구팬들이 놓치기 아까운 영화임에는 틀림이 없다.

 


11. 피파 피버(FIFA FEVER)
 

 "17번의 월드컵을 종합한 FIFA공식 최초의 영상물"이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외관과 구성은 그렇게 고급스럽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FIFA라는 든든한 배경을 소스로 하는 DVD답게 총 3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피파 피버>는 축구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혹은 흥미를 끌 만한 동영상들이 가득 들어 있다. 예컨대, 각종 '베스트10'이나 '최고의 팀', '최고의 선수'에 관한 영상처럼 익숙하지만 여전히 또 보고 싶은 동영상들이 있는가 하면, '여자축구'와 '악동', '풋살'에 관한 동영상 등 흔히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도 있고, 또한 한국팀의 경기('이변의 명승부 : 2002년 한,일 월드컵 한국-이탈리아전')나 한국 선수의 활약상('헤딩골 베스트10 : 안정환')처럼 한국팬들이 반가워할 만한 동영상도 FIFA에 의해 선정되어 수록되어 있다.
한국팀의 경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보내기에 이 DVD는 꽤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고, 특히 지난 2006년에 출시된 이후 가격이 착해졌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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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 책의 날 기념, 10문 10답 이벤트!

1. 개인적으로 만나, 인생에 대해 심도 있게 대화를 나누고픈 저자가 있다면?

닉 혼비. '소설가' 닉 혼비는 잘 모르겠고 인생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원하지도 않지만, "잉글랜드는 나의 팀이 아니다."라고 말한 위트 있는 '축구팬' 닉 혼비와 대화를 하면 꽤나 즐거울 것 같다. 그가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가정하에 만난다면, "아스날이 역사적인 무패우승을 달성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지?"라거나 "아스날의 아름답지만 반드시 승리를 담보하지는 못하는 경기 스타일과 아름답지는 않지만 대체로 승리를 담보하는 경기 스타일 중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을 택할 것인지?"와 같은 질문들을 하고 싶다.

2. 단 하루, 책 속 등장 인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누구의 삶을 살고 싶으세요?

<구운몽>에 나오는 양소유의 삶. 2처 6첩을 거느리고 부귀공명을 얻는 삶이란 남아라면 한 번쯤 꿈꿔볼 만한 삶이다. 다만, 양소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행여나 성진이 꿈을 깨버리면 이쪽도 산통이 다 깨지니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칫하면 하루 웬종일 불경만 외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3. 읽기 전과 읽고 난 후가 완전히 달랐던, 이른바 ‘낚인’ 책이 있다면?

나는 최근 십수 년 간, <퍼거슨 리더십>보다 더 실망스런 책은 읽은 기억이 없다.

4. 표지가 가장 예쁘다고, 책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책은?

기본적으로 표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고 내 심미안이란 것도 형편없지만, <야구란 무엇인가>가 괜찮았다. 하얀 바탕에 야구공 하나가 박힌 게(야구공은 엠보싱(?) 처리가 되어 있다!) 심플하면서도 품격이 있어 보였다. 책장만 널찍하다면 앞표지가 나오게 꽂아 놓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였다. 게다가 내용까지 최고!
반면에ㅡ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만ㅡ그리 산뜻한 느낌은 아닌 축구 경기장을 바탕에 깔고 불에 타는 듯한 축구공 하나가 박힌 <피버 피치>의 표지는 좀 아니었다. 솔직히 그런 표지를 가진 책의 제목으로는 <불꽃 슈터 통키> 정도가 어울리지 않나 생각한다.


 
 

 

 

 

 

 


5. 다시 나와주길, 국내 출간되길 학수고대하고 있는 책이 있다면?

사이먼 쿠퍼가 지은 <축구 전쟁의 역사(원제: Football against the enemy)>. 나는 이 책을 대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었는데, 나 말고는 이 책을 아무도 안 읽는 것 같았다. 그때 이미 이 책은 품절 상태라 살 수는 없었고 도서관에는 한 3권쯤 있어서, 나는 이 책을 소유하고픈 욕심에 일단 이 책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도서관 측에 변상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하지만 '희귀본'은 정가의 몇 배 이상을 변상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혹 '품절본'도 '희귀본'에 속할까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대학에 갖다 바친 돈을 생각하면 이런 아무도 안 읽는 책 한 권쯤은 내게 그냥 줄만도 한데, 유감스럽게도 대학이란 녀석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다시 국내에 출간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여전히 이 책을 읽을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그저 이제는 사이먼 쿠퍼의 다른 책이나마 국내에 출간되기를 바랄 뿐이다.

 

 

 

 

 

 

 


6. 책을 읽다 오탈자가 나오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요.

내가 글을 쓸 때 오탈자를 주의하는 만큼 오탈자를 쉽게 찾는 편이긴 한데, 그렇다고 특별히 어떤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꽤 마음에 들었던 책에 오탈자가 많다면 출판사에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않는다).

7. 3번 이상 반복하여 완독한 책이 있으신가요?

하루키의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3번 가량 읽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무척 이례적인 경우인데, 사실 그렇게나 읽었던 이유는 그 책이 무지 마음에 들어서는 아니었다. <상실의 시대>를 읽은 이후, 독서에는 그닥 관심이 없던 내가 하루키의 책 몇 권을 의욕적으로 찾아 읽었었는데,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읽고 나서는 외려 하루키를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고, 나는 그 뜻밖의 변심에 나름대로 해명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여러 번 읽었다. 하지만 끝내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그쯤 해도 어떤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제 그것으로 되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을 한 3번쯤 읽은 이유는 헤어지는 상대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고 해도 좋겠다.



 

 

 

 

 

 


8. 어린 시절에 너무 사랑했던, 그래서 (미래의) 내 아이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책?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는 기껏해야 셜록 홈즈나 괴도 루팡 시리즈 정도인데, 이것들은 지가 직접 읽으면 모를까 별로 읽어줄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이 질문을 조금 바꿔서, 내 아이에게 꼭 물려주고 싶은 책으로 나는 아다치 미츠루의 <터치>를 꼽겠다.
나는 모든 스포츠 중에서 축구를 가장 사랑하기에 나의 아이도 축구를 좋아하길 바라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야구에 대해서도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야구를 모른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재미가 조금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며, 말할 필요도 없이 <터치>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것도 그중의 하나다.



 

 

 

 

 

 


9. 지금까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길이가 긴) 책은?

단권으로 치면 아마도 <야구란 무엇인가>가 가장 두꺼웠던 것 같다. 단권이 아니어도 괜찮고 만화책이어도 괜찮다면 <메이저>. 나는 <메이저>를 52권쯤까지 본 것 같은데, 지금 검색해 보니 <메이저>는 73권까지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 같다. 아마도 그 책을 모으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언젠가 파산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모을 생각은 없으니 한 200권을 넘겨도 상관은 없지만, 아무쪼록 내가 죽기 전까지는 완결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51권까지 나온 <열혈강호>도).

10. 이 출판사의 책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 가장 좋아하는 출판사는?

딱히 좋아하는 출판사는 없지만, 굳이 꼽으라면 <돌베개>와 <한겨레출판>의 책들이 좀 더 믿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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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원정대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조금쯤 관대한 마음이었을 때 눈에 띈 이 문구는, 이내 관대한 마음을 우주 밖으로 날려버렸다. 이 문구를 전면에 내세운 배너 광고 속에는 무려 김태희가 붉은 셔츠를 입은 채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뀔 건 크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불만과 시기와 짜증은 더욱 증폭되었다고 해야겠다. 설마하니 김태희가 남아공 원정대의 동료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남아공 원정대는 김태희의 옆자리에서 함께 응원이라도 한단 말인가. 설사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더욱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원정대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얘기가 될 테니까. 굳이 배너를 클릭해서 자세한 사항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건 쉽사리 알 수 있는 일이다. 시간도 돈도, 게다가 열정도 부족한 나는 남아공 원정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나는 상황이 이러함에도 그따위 발칙한 문구로 사람을 현혹하는 빌어먹을 관계자에게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그냥 조연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되겠니?"

"남아공으로 가자!"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2010년이 시작되고서 최소한 두 번 이상 주변에 '남아공으로 가자.'고 호기롭게 외쳤었는데, 그 중 두 번의 경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공을 차다가 정신조차 얼어버렸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두 잔쯤 들이부어서 정신이 해롱거렸을 때였다. 요컨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였단 얘기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도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내뱉은 말이, 2010년의 새해가 밝자 실제로 남아공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지도 않고 '남아공의 해가 밝았다.'는 상투적 문구를 써댄 어느 언론만큼이나 진실성이 없고, 2010년이 호랑이의 해라는 이유만으로 '올해는 호랑이가 쥐를 잡는 형국'이라고 한 어느 네티즌의 기대만큼 신빙성이 없으며, 역시 같은 이유로 '호랑이 엠블럼을 단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다.'는 어느 축구팬의 믿음만큼이나 허황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남아공으로, 갈 수, 없다.

"남아공이냐 캐나다냐, 그것이 문제로다."

솔직하고도 단호하게 말해서, 실상 내게 남아공과 캐나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 캐나다에서는 김연아가 환상적이고도 우아한 연기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선택할 것은 무조건 남아공이었다. 심지어 설령 시간이 제법 흘러, 한국팀이 3전 전패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날 참혹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확고한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선택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제로 엄마가 내게 어느 곳을 원하느냐고, 백화점 영수증의 경품 응모권을 손에 들고 물어왔을 때,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남아공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흘러서 가장 명명백백히 밝혀진 건, 내가 어느 곳이든 갈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이었을 뿐이다.

"남아공은 신포도다."

시간도 돈도 열정도, 게다가 행운도 없는 사람에게 남는 건, 값싼 자기 위안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행운마저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난 이후부터, 나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남아공 월드컵이 목전에 다가오면서 남아공이 지닌 매력들이 더불어 드러나면, 나는 그것이 실은 종종 빛좋은 개살구임을 부득불 확인하고는 묘하게 안도하곤 했다. 가령, 백상어가 득실한 곳에서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케이프 타운의 간스바이나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파도가 친다는 제프리만의 슈퍼큐브스가, 알고 보면 경력 있는 다이버나 서퍼 전문가들이나 즐길 만한 곳이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지간해서는 가봤자 이용도 못할 '최고'의 장소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하고 나는 꽤나 기뻐했더랬다. 특히 남아공에서는 연간 1만 5,000명이 도로에서 비명횡사한다는 정보는, 그 아찔한 수치와 나의 비도덕적인 접근 태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위안과 해답이 되어 주었다. 말하자면 남아공은 신포도이고, 그러므로 나는 남아공에 가지 않겠다고, 나는 그럭저럭 납득했던 셈이다.

"남아공 월드컵 단독중계가 웬말이냐!"

그러나 그러한 가엾은 자기 위안 속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기대와 기쁨은 물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면서도 꽤 자주 오는 잡상인도 아닌, 달이면 달마다 으레 발간되는 잡지도 아닌, 작년에 왔다가 죽지 않고 돌아온 각설이도 아닌, 무려 4년 만에야 겨우 한 번 만나는 축구제전이 꼭 직접 가서 보지 못한다고 어디 남의 일이겠는가. 오히려 발전된 축구중계 기술과, 어쩌면 또 다시 호흡을 맞출지도 모를 김성주-차범근 콤비의 해설에 대한 기대와, 무엇보다도 보고 싶은 경기를 골라 볼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기회는 직접 남아공에 가는 축구팬들이 누리지 못하는, 오직 남은 자들만의 호사일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남아공 월드컵을 단독중계하려는 SBS의 야심은 국내에 남은 축구팬들의 마지막 위안조차 가볍게 날려버릴 태세다. 물론 SBS는 경제논리를 들먹이며 법적 영역에서 똬리를 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이 건드리는 것이 다름 아닌 축구팬의 위안이라는 마지막 보루이며, 따라서 그것은 협상과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임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남아공에서 기차가 떠난다."

원래 이주 노동자들이 불렀다가 이제 남아공 대표팀의 주제가가 되었다는, 경쾌한 증기기관차 리듬의 쇼쇼로자(Shosholoza)는 이렇게 끝난다고 한다. "Stimela siphume South Africa(남아공에서 기차가 떠난다)" 분명히 밝혀두건대, 설령 끝내 SBS가 월드컵 단독중계를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남아공 행 기차'를 타기 위해 이번 월드컵에서 SBS를 차마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가 없는 한 SBS와의 이별은 또한 필연적이고, 그렇다면 SBS가 고민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도 자명하다. SBS는 남아공 행 편도 열차에서 홀로 안락함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도모해야 할 것은 남아공의 기차가 아닌, 그들의 기차로 축구팬들을 끌어 모으는 일이다. 남아공의 기차는 결국엔 멈추게 마련이고, 축구팬들이 다른 기차로 다시 갈아타야 할 때가 기어코 돌아올 테니까. 과연 그러한 때가 와도, 축구팬의 불만과 비판을 외면하는 SBS의 기차로 축구팬들이 기꺼이 갈아탈 것을 SBS는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쩐지 쇼쇼로자의 마지막 노랫말이 남아공 월드컵 이후, SBS의 결말을 예고하는 듯 들린다. "남아공에서 기차가 떠난다." 물론 이때의 '기차'란, '축구팬의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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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블라니(Jabulani). 남아공 공용어 중 하나인 줄루어로 '축하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축구공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라는 영예로운 수식어에 걸맞게 최첨단 기술로 무장하고 있다. 자블라니는 FIFA에서 정해 놓은 뭇 기준들을 우수하게 통과했음은 물론이고, 공을 이루는 패널(조각)의 수를 줄여 공의 불규칙성은 감소시킨 반면 안정성과 정확성은 향상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블라니는 구의 형태에 가장 근접하면서도 탄력성은 강화되어 더욱 빠르고 강한 슈팅을 가능케 한다. 그러니까 자블라니는 화려한 월드컵 무대에서 골문을 출렁이며 축제를 '축하할' 준비를 모두 마친 셈이다. 하지만, 이 최첨단 축구공은 과연 진정으로 그저 축하만 할 일일까? 



실제로 자블라니를 접해 본 선수들의 반응에서 느껴지는 것은 일단 '당혹스러움'이다. K리그의 어느 선수는 자블라니의 탄력성이 너무 강해서 마치 탱탱볼을 차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전하고, A매치에서 자블라니로 경기를 뛰었던 대표팀 선수들도 자블라니의 적응이 쉽지 만은 않은 일이었음을 토로했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은 이러한 자블라니 적응의 어려움을 감안해 프로축구연맹에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만이라도 K리그에서 한시적으로나마 자블라니를 사용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새로운 축구공이 공인구로 지정되면서 나타난 이러한 일련의 반응들은 일견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의아한 느낌도 없지 않다. 기본적으로 축구공의 진화는 대체로 빠르고 강력한 슈팅이 가능해지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발전해왔는데, 과연 그것만이 능사인지에 대해서는 몇몇 의문을 남긴다. 슈팅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탄력성이 강조되면서 정작 공을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일이 어려워진다면, 과연 그때도 여전히 세밀한 패스 게임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공에 회전력을 가하는 것이 좀 더 어려워지더라도, 그저 빠르게만 날아가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지. 무엇보다도, '자블라니'로 대표되는 기술의 진화는 과연 오직 '축구'를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월드컵 역사에 있어서 이른바 '기술'이 상당한 공헌을 했던 유명한 사례로는 1954년 월드컵에서의 '베른의 기적'을 들 수 있을 듯하다. 당시 결승에 올랐던 서독의 결승전 상대는 이미 조별 예선에서 3대8의 대패를 안겨주었던, 그리고 약 4년 여 간 무패를 달리던 최강의 팀 헝가리였다. 하지만 서독의 헤르베르거 감독은 결승전을 앞두고 승부의 향방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만약 내일 비가 온다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 비가 내리는 스위스 베른에서 서독이 3대2로 승리했고, 이 승리의 비결 중 하나는 잔디의 상태에 따라 뽕을 바꿔 끼울 수 있는, 나사식 뽕이 장착된 아디다스의 축구화에 있었다. 그것은 비단 독일의 승리만이 아닌, 아디다스와 나아가 기술의 승리이기도 한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기술이 특정 팀의 승리를 위한 비밀병기로 기능했다면, 오늘날의 기술은 어느 팀에나 공평하게 그 혜택을 돌아가게 만든다. 유럽의 부유한 국가의 선수에서부터 아프리카의 가난한 국가의 선수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월드컵 무대에서 자웅을 겨룰 때 기술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제 기술은 과거와 달리 좀 더 거시적이고 큰 변화에 관여를 하는 쪽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단순히 특정 팀의 조그마한 이점을 위해서가 아닌, 축구 그 자체의 변화에 기술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자블라니로 대표되는 축구공뿐만이 아니라, 최첨단 축구화를 살펴보면 기술의 영향력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아디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디다스의 프레데터 익스 축구화는 이전 모델에 비해 7%의 슈팅 파워 향상을 가져옴과 동시에 컨트롤과 정확성까지도 향상시키고, 나이키의 설명에 따르면 나이키의 토탈90 레이저3 축구화는 원하는 킥의 종류에 따라서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심지어 미즈노의 웨이브 이그니터스 축구화는 폴리우레탄 패널을 배치하여 축복 받은 소수의 전유물인 것처럼만 여겨지는 '무회전 슛'을 가능케 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축구화를 신고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축구공을 차며, 특히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유니폼을 입으면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아디다스가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 발표한 그 이름도 '최첨단 기술스러운' 테크핏 파워웹 저지는 기존의 기능성 스포츠웨어와 유니폼의 접목을 시도해 무게는 더 가볍게 하면서도 "폭발적인 파워, 가속성, 지구력을 향상시키고, 근육 떨림 감소, 자세와 신체 감각, 안정성을 높이는 등 근육 에너지에 포커스를 맞춰 선수들이 자기 능력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아디다스 측은 그 구체적인 수치까지도 제시했는데,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이 저지를 착용하면 선수들은 5.3%의 파워와 4%의 점프 높이, 그리고 1.1%의 스피드와 0.8%의 지구력 향상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첨단 기술의 효과 측면에 있어서 다른 회사의 제품이라고 크게 뒤떨어지지 않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이러한 특정한 기술적 효과는 현시점에서도 충분히 놀랍지만, 정말로 흥미로우면서도 우려가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가령, 최대한 낮춰 잡아서 매년 축구공이 1%씩 빨라지고, 축구화가 1%의 파워 향상을 가능케 하고, 또 기능성 의류가 1%의 파워 향상을 가능케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현재 정상급 선수의 슈팅 속도가 현재의 1.5배 혹은 2배가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계산하기 어렵지만, 생각만큼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닐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기술의 진화가 더욱 속도를 내고 1%로 낮춰 잡은 수치가 좀 더 커진다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축구는 더 이상 오늘날의 축구와 같다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현시점에서 이것은 상당히 섣부른 이야기이지만, 첨단 수영복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진 수영의 경우에서 보듯, 기술의 진화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고 놀랍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은 둥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베른의 기적'을 창출했던 헤르베르거 감독의 이 격언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자블라니가 역대 그 어떤 축구공보다도 가장 완벽한 구의 형태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승부의 향방은 누구도 알 수 없다라는 의미였을 그 격언은 이제 기술의 진화 덕택에 '진짜로' 둥근 공의 시대를 맞이하며, '둥근 공'을 가능케 한 최첨단 '기술'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응하느냐가 승부를 가르는 한 요인이라는 의미처럼 들린다. 물론, 아마도 2010년 월드컵도 지난 대회가 언제나 그랬듯 멋진 경기로 가득할 테고, 그것은 기술의 화려한 진화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전혀 꿀릴 것 없는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 덕택일 거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혹 이번 대회가 그 어느 대회보다도 많은 이변으로 점철된다면 거기에 자블라니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임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블라니. 이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진짜 둥근 공이 정말로 그저 축하할 만한 일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축구에 있어서 기술의 진화가 초래하는 영향력과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어쩌면 이번 대회의 자블라니는 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지도 모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자블라니는 그저 '축하하다'라는 의미로도 충분하겠지만, 혹 그렇지 않다면 자블라니가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기술의 반란'이 아닐까. 물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축하와는 거리가 먼 의미임은 확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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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의 기적>은, 오히려 베른에서 있었던 '기적'이 그저 아무렇게나 갑자기 일어난 사건만은 아니었음을 강변하는 듯한 영화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베른에서 있었던, 서독의 기적 같은 승리를 다룬 이 영화는 서독이 기적을 쟁취하는 과정에 있었던 작은 사건들을 연결시키면서, '기적'이란 한 개인에게서 한 가족에게로, 나아가 축구 국가대표팀과 국가로까지 전이되는, 마치 작은 물결이 모여 바다를 이루는 듯한 일련의 흐름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기에 베른의 '기적'은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던 '奇蹟'이었다기보다는, 차라리ㅡ그 이전의 소소한 기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ㅡ미래로 나아가는 것을 알리는 경적, 즉 '汽笛'과도 같았다.

영화는 1954년의 월드컵을 주요 사건으로 다루면서도,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삶을 나란히 들여다본다. 러시아에서 전쟁포로로 지내다 십여 년 만에 살아 돌아와서는 갑작스레 바뀐 환경에 불안해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조금은 어색하게 맞아들이는 가족은 당시 패전국이었던 서독의 음울하고 불안한 정서를 그대로 대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회색빛 정서는 전범국이란 낙인 아래 4년간 국제대회 참가자격을 박탈당해야 했던 국가대표팀에도 만연해 있고, 이것은 그들이 8년 만에 월드컵에 출전하여 조별예선에서 헝가리에 8대3으로 대패 했을 때 극에 달한다. 아무리 해도 안 될 것이라는 패전국의 패배의식과 자조감은 개인과 가족과 국가, 이 모두에게 무겁게 쌓여만 간다.

하지만 끝내 '기적'이 벌어지기까지, 전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소년이 아버지의 작은 조언으로 동네 축구경기에서 활발한 몸놀림을 보일 때, 혹은 아버지가 홀로 축구공으로 저글링을 하다가 오버헤드킥을 하기 위해 허공에 몸을 누일 때, 혹은 맑았던 하늘에서 돌연 비를 내리기 시작할 때, 또는 결승에서 헝가리에 0대2로 뒤지던 절망적인 상황에서 서독을 향한 응원이 경기장에 메아리 칠 때, 그리고 소년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결승전이 열리는 베른에 마침내 몸을 나타냈을 때, 드디어 작은 물줄기들은 하나로 합쳐져서 거대한 '기적'으로 분출했다. 기적은 개인과 가족에게로, 또한 축구 국가대표팀과 국가로까지 면면이 이어졌고, 그런 이유로 '기적(奇蹟)'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이후에 서독이 경제적으로 부흥했다는 엔딩의 내레이션이 시사하듯, 앞으로 다가올 화합과 번영으로 나아가는 '기적(汽笛)' 소리였을 뿐인 셈이다.

개인과 가족에게서 벌어진 작은 화합과 기적이 어떻게 국가의 화합과 기적과 공명하는지를 감동적으로 다룬 이 영화는 그저 뭉클한 가족영화로만 봐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1954년 월드컵을 배경으로 한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몇몇 세밀한 에피소드들 덕분에 <베른의 기적>은 축구팬들에게 더욱 어필한 만한 영화가 되었다. 아디다스 축구화가 도약의 시기를 맞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나사식 뽕과 관련된 일화나 "축구공은 둥글다."는 축구계의 유명한 격언과 관련된 일화, 또 '헤르베르거의 악마적 계산'이 잉태된 헤르베르거 감독의 고뇌 등, 축구의 역사에서 흥미로웠던 순간들이 이 영화에는 고스란히 녹아들어있다. 특히 당시 서독 경기를 세심하고 현실감 넘치게 재현한 것은 가히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여러모로 <베른의 기적>,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마냥 기적만을 바라는 축구팬들에게 더욱 권할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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