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원정대의 주인공은 당신입니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조금쯤 관대한 마음이었을 때 눈에 띈 이 문구는, 이내 관대한 마음을 우주 밖으로 날려버렸다. 이 문구를 전면에 내세운 배너 광고 속에는 무려 김태희가 붉은 셔츠를 입은 채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뀔 건 크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불만과 시기와 짜증은 더욱 증폭되었다고 해야겠다. 설마하니 김태희가 남아공 원정대의 동료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남아공 원정대는 김태희의 옆자리에서 함께 응원이라도 한단 말인가. 설사 실제로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더욱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 원정대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얘기가 될 테니까. 굳이 배너를 클릭해서 자세한 사항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건 쉽사리 알 수 있는 일이다. 시간도 돈도, 게다가 열정도 부족한 나는 남아공 원정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나는 상황이 이러함에도 그따위 발칙한 문구로 사람을 현혹하는 빌어먹을 관계자에게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그냥 조연으로 데리고 가면 안 되겠니?"

"남아공으로 가자!"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2010년이 시작되고서 최소한 두 번 이상 주변에 '남아공으로 가자.'고 호기롭게 외쳤었는데, 그 중 두 번의 경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공을 차다가 정신조차 얼어버렸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두 잔쯤 들이부어서 정신이 해롱거렸을 때였다. 요컨대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였단 얘기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도 내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내뱉은 말이, 2010년의 새해가 밝자 실제로 남아공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지도 않고 '남아공의 해가 밝았다.'는 상투적 문구를 써댄 어느 언론만큼이나 진실성이 없고, 2010년이 호랑이의 해라는 이유만으로 '올해는 호랑이가 쥐를 잡는 형국'이라고 한 어느 네티즌의 기대만큼 신빙성이 없으며, 역시 같은 이유로 '호랑이 엠블럼을 단 한국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우승할 것이다.'는 어느 축구팬의 믿음만큼이나 허황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남아공으로, 갈 수, 없다.

"남아공이냐 캐나다냐, 그것이 문제로다."

솔직하고도 단호하게 말해서, 실상 내게 남아공과 캐나다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 캐나다에서는 김연아가 환상적이고도 우아한 연기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선택할 것은 무조건 남아공이었다. 심지어 설령 시간이 제법 흘러, 한국팀이 3전 전패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는 것으로 결론이 날 참혹한 운명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확고한 마음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 선택만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제로 엄마가 내게 어느 곳을 원하느냐고, 백화점 영수증의 경품 응모권을 손에 들고 물어왔을 때,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남아공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흘러서 가장 명명백백히 밝혀진 건, 내가 어느 곳이든 갈 수 없다는 가혹한 현실이었을 뿐이다.

"남아공은 신포도다."

시간도 돈도 열정도, 게다가 행운도 없는 사람에게 남는 건, 값싼 자기 위안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행운마저 내 것이 아님을 알고 난 이후부터, 나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남아공 월드컵이 목전에 다가오면서 남아공이 지닌 매력들이 더불어 드러나면, 나는 그것이 실은 종종 빛좋은 개살구임을 부득불 확인하고는 묘하게 안도하곤 했다. 가령, 백상어가 득실한 곳에서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케이프 타운의 간스바이나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파도가 친다는 제프리만의 슈퍼큐브스가, 알고 보면 경력 있는 다이버나 서퍼 전문가들이나 즐길 만한 곳이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지간해서는 가봤자 이용도 못할 '최고'의 장소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하고 나는 꽤나 기뻐했더랬다. 특히 남아공에서는 연간 1만 5,000명이 도로에서 비명횡사한다는 정보는, 그 아찔한 수치와 나의 비도덕적인 접근 태도에도 불구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위안과 해답이 되어 주었다. 말하자면 남아공은 신포도이고, 그러므로 나는 남아공에 가지 않겠다고, 나는 그럭저럭 납득했던 셈이다.

"남아공 월드컵 단독중계가 웬말이냐!"

그러나 그러한 가엾은 자기 위안 속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기대와 기쁨은 물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면서도 꽤 자주 오는 잡상인도 아닌, 달이면 달마다 으레 발간되는 잡지도 아닌, 작년에 왔다가 죽지 않고 돌아온 각설이도 아닌, 무려 4년 만에야 겨우 한 번 만나는 축구제전이 꼭 직접 가서 보지 못한다고 어디 남의 일이겠는가. 오히려 발전된 축구중계 기술과, 어쩌면 또 다시 호흡을 맞출지도 모를 김성주-차범근 콤비의 해설에 대한 기대와, 무엇보다도 보고 싶은 경기를 골라 볼 수 있는 다양한 선택의 기회는 직접 남아공에 가는 축구팬들이 누리지 못하는, 오직 남은 자들만의 호사일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남아공 월드컵을 단독중계하려는 SBS의 야심은 국내에 남은 축구팬들의 마지막 위안조차 가볍게 날려버릴 태세다. 물론 SBS는 경제논리를 들먹이며 법적 영역에서 똬리를 틀고 있지만, 그들은 그들이 건드리는 것이 다름 아닌 축구팬의 위안이라는 마지막 보루이며, 따라서 그것은 협상과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임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남아공에서 기차가 떠난다."

원래 이주 노동자들이 불렀다가 이제 남아공 대표팀의 주제가가 되었다는, 경쾌한 증기기관차 리듬의 쇼쇼로자(Shosholoza)는 이렇게 끝난다고 한다. "Stimela siphume South Africa(남아공에서 기차가 떠난다)" 분명히 밝혀두건대, 설령 끝내 SBS가 월드컵 단독중계를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남아공 행 기차'를 타기 위해 이번 월드컵에서 SBS를 차마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가 없는 한 SBS와의 이별은 또한 필연적이고, 그렇다면 SBS가 고민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도 자명하다. SBS는 남아공 행 편도 열차에서 홀로 안락함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도모해야 할 것은 남아공의 기차가 아닌, 그들의 기차로 축구팬들을 끌어 모으는 일이다. 남아공의 기차는 결국엔 멈추게 마련이고, 축구팬들이 다른 기차로 다시 갈아타야 할 때가 기어코 돌아올 테니까. 과연 그러한 때가 와도, 축구팬의 불만과 비판을 외면하는 SBS의 기차로 축구팬들이 기꺼이 갈아탈 것을 SBS는 자신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쩐지 쇼쇼로자의 마지막 노랫말이 남아공 월드컵 이후, SBS의 결말을 예고하는 듯 들린다. "남아공에서 기차가 떠난다." 물론 이때의 '기차'란, '축구팬의 마음'의 다른 이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