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블라니(Jabulani). 남아공 공용어 중 하나인 줄루어로 '축하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 축구공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공인구'라는 영예로운 수식어에 걸맞게 최첨단 기술로 무장하고 있다. 자블라니는 FIFA에서 정해 놓은 뭇 기준들을 우수하게 통과했음은 물론이고, 공을 이루는 패널(조각)의 수를 줄여 공의 불규칙성은 감소시킨 반면 안정성과 정확성은 향상시켰다. 뿐만 아니라 자블라니는 구의 형태에 가장 근접하면서도 탄력성은 강화되어 더욱 빠르고 강한 슈팅을 가능케 한다. 그러니까 자블라니는 화려한 월드컵 무대에서 골문을 출렁이며 축제를 '축하할' 준비를 모두 마친 셈이다. 하지만, 이 최첨단 축구공은 과연 진정으로 그저 축하만 할 일일까?
실제로 자블라니를 접해 본 선수들의 반응에서 느껴지는 것은 일단 '당혹스러움'이다. K리그의 어느 선수는 자블라니의 탄력성이 너무 강해서 마치 탱탱볼을 차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전하고, A매치에서 자블라니로 경기를 뛰었던 대표팀 선수들도 자블라니의 적응이 쉽지 만은 않은 일이었음을 토로했다. 그리고 허정무 감독은 이러한 자블라니 적응의 어려움을 감안해 프로축구연맹에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만이라도 K리그에서 한시적으로나마 자블라니를 사용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새로운 축구공이 공인구로 지정되면서 나타난 이러한 일련의 반응들은 일견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뭔가 의아한 느낌도 없지 않다. 기본적으로 축구공의 진화는 대체로 빠르고 강력한 슈팅이 가능해지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발전해왔는데, 과연 그것만이 능사인지에 대해서는 몇몇 의문을 남긴다. 슈팅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탄력성이 강조되면서 정작 공을 정교하게 컨트롤하는 일이 어려워진다면, 과연 그때도 여전히 세밀한 패스 게임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공에 회전력을 가하는 것이 좀 더 어려워지더라도, 그저 빠르게만 날아가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지. 무엇보다도, '자블라니'로 대표되는 기술의 진화는 과연 오직 '축구'를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월드컵 역사에 있어서 이른바 '기술'이 상당한 공헌을 했던 유명한 사례로는 1954년 월드컵에서의 '베른의 기적'을 들 수 있을 듯하다. 당시 결승에 올랐던 서독의 결승전 상대는 이미 조별 예선에서 3대8의 대패를 안겨주었던, 그리고 약 4년 여 간 무패를 달리던 최강의 팀 헝가리였다. 하지만 서독의 헤르베르거 감독은 결승전을 앞두고 승부의 향방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만약 내일 비가 온다면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결과는 익히 알려진 대로 비가 내리는 스위스 베른에서 서독이 3대2로 승리했고, 이 승리의 비결 중 하나는 잔디의 상태에 따라 뽕을 바꿔 끼울 수 있는, 나사식 뽕이 장착된 아디다스의 축구화에 있었다. 그것은 비단 독일의 승리만이 아닌, 아디다스와 나아가 기술의 승리이기도 한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 기술의 발전은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진다. 과거에 기술이 특정 팀의 승리를 위한 비밀병기로 기능했다면, 오늘날의 기술은 어느 팀에나 공평하게 그 혜택을 돌아가게 만든다. 유럽의 부유한 국가의 선수에서부터 아프리카의 가난한 국가의 선수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월드컵 무대에서 자웅을 겨룰 때 기술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제 기술은 과거와 달리 좀 더 거시적이고 큰 변화에 관여를 하는 쪽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단순히 특정 팀의 조그마한 이점을 위해서가 아닌, 축구 그 자체의 변화에 기술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자블라니로 대표되는 축구공뿐만이 아니라, 최첨단 축구화를 살펴보면 기술의 영향력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아디다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디다스의 프레데터 익스 축구화는 이전 모델에 비해 7%의 슈팅 파워 향상을 가져옴과 동시에 컨트롤과 정확성까지도 향상시키고, 나이키의 설명에 따르면 나이키의 토탈90 레이저3 축구화는 원하는 킥의 종류에 따라서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심지어 미즈노의 웨이브 이그니터스 축구화는 폴리우레탄 패널을 배치하여 축복 받은 소수의 전유물인 것처럼만 여겨지는 '무회전 슛'을 가능케 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축구화를 신고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축구공을 차며, 특히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유니폼을 입으면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아디다스가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 발표한 그 이름도 '최첨단 기술스러운' 테크핏 파워웹 저지는 기존의 기능성 스포츠웨어와 유니폼의 접목을 시도해 무게는 더 가볍게 하면서도 "폭발적인 파워, 가속성, 지구력을 향상시키고, 근육 떨림 감소, 자세와 신체 감각, 안정성을 높이는 등 근육 에너지에 포커스를 맞춰 선수들이 자기 능력 이상의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아디다스 측은 그 구체적인 수치까지도 제시했는데,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이 저지를 착용하면 선수들은 5.3%의 파워와 4%의 점프 높이, 그리고 1.1%의 스피드와 0.8%의 지구력 향상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첨단 기술의 효과 측면에 있어서 다른 회사의 제품이라고 크게 뒤떨어지지 않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이러한 특정한 기술적 효과는 현시점에서도 충분히 놀랍지만, 정말로 흥미로우면서도 우려가 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가령, 최대한 낮춰 잡아서 매년 축구공이 1%씩 빨라지고, 축구화가 1%의 파워 향상을 가능케 하고, 또 기능성 의류가 1%의 파워 향상을 가능케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현재 정상급 선수의 슈팅 속도가 현재의 1.5배 혹은 2배가 되는 시점은 언제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계산하기 어렵지만, 생각만큼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닐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기술의 진화가 더욱 속도를 내고 1%로 낮춰 잡은 수치가 좀 더 커진다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의 축구는 더 이상 오늘날의 축구와 같다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현시점에서 이것은 상당히 섣부른 이야기이지만, 첨단 수영복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진 수영의 경우에서 보듯, 기술의 진화는 생각 이상으로 빠르고 놀랍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공은 둥글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베른의 기적'을 창출했던 헤르베르거 감독의 이 격언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자블라니가 역대 그 어떤 축구공보다도 가장 완벽한 구의 형태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승부의 향방은 누구도 알 수 없다라는 의미였을 그 격언은 이제 기술의 진화 덕택에 '진짜로' 둥근 공의 시대를 맞이하며, '둥근 공'을 가능케 한 최첨단 '기술'에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응하느냐가 승부를 가르는 한 요인이라는 의미처럼 들린다. 물론, 아마도 2010년 월드컵도 지난 대회가 언제나 그랬듯 멋진 경기로 가득할 테고, 그것은 기술의 화려한 진화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전혀 꿀릴 것 없는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 덕택일 거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혹 이번 대회가 그 어느 대회보다도 많은 이변으로 점철된다면 거기에 자블라니가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임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자블라니. 이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진짜 둥근 공이 정말로 그저 축하할 만한 일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축구에 있어서 기술의 진화가 초래하는 영향력과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성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점차 다가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고, 어쩌면 이번 대회의 자블라니는 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대략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지도 모른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자블라니는 그저 '축하하다'라는 의미로도 충분하겠지만, 혹 그렇지 않다면 자블라니가 의미하는 것은, 아마도 '기술의 반란'이 아닐까. 물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축하와는 거리가 먼 의미임은 확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