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7>

어제 저녁에 결의했던 대로, 우리는 새벽예불을 드리는 다른 분들의 불경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계속해서 잠을 잤다(무엄하게도!). 그리고 결의했던 바와는 다르게, 다른 분들이 모두 아침식사를 하시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잠을 잤는데, 이건 어차피 예불을 빼먹은 이상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불과 아침을 모두 거른 두 가련한 중생은, 여기에 더해 가증을 부렸다. 우리는 대충 씻은 후에 모든 짐을 챙겨서 우리가 묵은 '향적당(香積堂)'을 나와서는, 마치 이른 아침부터(비록 우리가 늦잠을 자기는 했지만, 여전히 8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미황사에 들른 부지런하고 단정한 여행객인 양 미황사를 휘 둘러보았고, 가끔은 '음, 아침의 미황사는 과연 아름답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곤 한 것이다. 그러고서야 우리는 달마산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키며 천천히 미황사를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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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 2008-10-20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해! 당장 나도 가고 싶잖아! ㅠ 월요일 아침부터 교무실에서 정신 없이 웃었어. ㅋㅋ 원래 몰래 보고 가곤 했는데 오늘은 댓글을 남겨야겠더라. B형 남자의 무심함이 뭐니! ㅎ

Fenomeno 2008-10-20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느닷없이 뭐냐? 여기서 니 댓글을 보니까 좀 낯선데. 차라리 조스바라고 했으면, 좀 더 친숙했을 텐데... ㅎㅎ

B형 남자의 무심함은, 겪어봐서 조금은 알지 않냐, 그러니까 그 '매력' 말이야. ㅎㅎ
 

10월쯤에 여행을 떠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진즉의 일이었지만, 여행의 출발은 꽤나 급작스러웠다. 여행에 동행하기로 했던 친구 K에게 이미 예정되어 있던, 그러나 그가 깜박하고 있던 어떤 사정이 여행을 일주일 앞두고 불현듯 떠올려지면서 여행은 한참 뒤로 미뤄질 판이었는데, 그러자 K는 "그럼 차라리 내일 떠나자."라는 사뭇 호기로운 제안을 했다. 여행 일정을 모두 일임받은 처지에서 나는 좀 더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떠나고 싶어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런 충동적인 출발 역시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완벽한 계획 따위는 있을 수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 최대의 모토는 바로 '자유'였으므로.

그리하여 이래저래 고심을 거듭한 끝에, 우리는 출발 전날 밤에 긴급히, 다음날 새벽에 떠나기로 하였다. 그것은 말하자면, 완벽하지만 불확실한 출발을 기다리기보다는, 불확실하지만 완벽한 출발을, 바로 지금 선택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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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4>

아침을 간단히 쿠키로 때우고, 10여 분 거리에 위치한 향일암으로 갔다. 그리고 주차장에 차를 대고 슬슬 걸어 들어가는데,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여전히 차도는 쭉 이어져 있고, 주변에는 식당들을 비롯한 상점들과, 심지어 모텔도 여럿 있는데 대체 왜 차를 저 멀리 대고 이렇게 걸어야만 한단 말인가. 이건 일반적으로 사찰을 갈 때, 주차장에 차를 댄 후 걸어 들어가는 길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냥 멀쩡한 일반국도를 중간에 턱 하니 가로막고, 여기서부터는 주차비를 내고 반드시 걸어야 된다고 우기는 격이랄까(아마도 아침 일찍과 저녁 늦게는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한 듯하다).

그런데, 마침 그때 주차장 쪽에서 버스 한대가 유유히 지나가기에 쳐다보니, 거기에는 우리보다 조금 늦게 온 사람들이 타고 있는 게 눈에 띈다. 그러잖아도 이 뜨거운 여름날 걷는 일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데,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그래서 돌아오는 버스를 세워 기사 아저씨에게 물어 보니, 다행히 친절한 기사 아저씨는 이 버스가 주차장에서 도로 끝까지 왕복을 한다는 것, 그러나 그 거리도 고작 700m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돌아올 때는 도로 끝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해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 등을 알려주신다. 그러니까, 걷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씀. 아저씨의 말씀대로, 그리 많이 걷지 않아서 도로는 곧 끝이 났다. 그리고 급격한 경사를 따라서 오르니 곧 향일암이다.

향일암은 '해를 향한 암자'라는 근사한 이름에 걸맞게, 망망대해를 바로 밑에 두고 수평선에서 떠오를 해를 바라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금산 보리암과 비교하자면, 보리암은 산 위 높은 곳에서 바다를 굽어 살피는 형국인 반면, 향일암은 좀 더 적극적으로 바다와 교감하며 자리하고 있는 셈이랄까. 어쨌든 한 번 상상해보라. 저 멀리 푸른 바다 끝에서 붉은 해가 넘실거리며 솟아오르는 것을 부처님과 함께 바라보는 과분한 호사를.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 날씨는 흐린 채 덥기만 해서, 바다 색깔은 흐리멍덩하고 해는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대웅전 조금 밑쪽 널찍한 바위 위에는 '원효스님 좌선대'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과연 유명한 스님의 좌선대는 범상치 않아서, 그 자리가 바다를 망막 가득 채울 수 있는 환상적인 좌선대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문제라면, 해가 이글거리는 한낮에 거기에 앉았다가는 아마도 불에 쪼그라드는 오징어 신세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뭐, 원효대사야 당연히 범인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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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어제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올림픽 축구경기에서 나는 어차피 질거라면 내심 통쾌하게 지기를 바랐다. 그것은 이번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두고 "사상 최초로 메달권에 도전하는 올림픽 축구대표팀"이라고 말하는 게 나는 내내 불만이었고, 어제 MBC 축구 중계진의 편파적 멘트가 심히 불편했으며, 무엇보다도 어제 한국팀이 보여준 축구란 게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상, 이번 올림픽 축구 대표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위 말하는 '드림팀'이 아니거니와, '역대 최강의 팀'과도 거리가 멀며, 더욱이 예선전을 통해 대단한 전력을 보여준 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메달권" 운운하는 유일한 이유는, 지금껏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역사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니까 딴은 틀린 말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건 8강 토너먼트 진출도 버거운 현실에서 실로 섣부른 전망이자, 근거 없는 낙관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기본적인 성급함에 더해, 어제 MBC 중계진의 중계 역시 꽤나 불만이었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MBC의 강모 해설위원은 틈만 나면 상대선수를 깎아 내리는 악취미가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본 대부분의 경우 그의 발언은 '화'를 불러왔다. 어제도 그는 비야레알 소속의 로시를 두고 "그리 빠르지 않아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선수"라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로시는 한 발 빠른 움직임으로 이탈리아의 선제골을 넣었다. 게다가 비교적 공정해야 할 캐스터도 거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가령, 상대선수가 우리선수의 공을 뺏어서 우리선수가 넘어지면, "아, 반칙을 불지는 않습니다. 살짝 발을 건 것도 같은데요."라며 은근히 편파판정을 불러일으키는 발언을 했는데, 이런 건 정말이지 비겁하고 치사한 중계일 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어제 보여 준 한국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는 그게 이탈리아의 기술적인 우위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가 싶어 자못 씁쓸하기조차 했다.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인 유벤투스에 적을 둔 지오빈코를 맞아 한국선수들은 시종일관 거친 태클로 그를 자극하려 했는데, 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그러나 164cm에 불과한 작은 키의) 선수가 거푸 쓰러지고 흥분해 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한국팀이 악당처럼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주장인 김진규가 그를 팔로 세게 밀쳐서 넘어뜨리는 장면이 압권이었는데, 그때조차 중계진은 김진규가 말려들면 안된다며 두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그런데, 그런 김진규가 나중에 쥐가 난 상대선수의 다리를 풀어주려고 하자, 그게 올림픽 정신이라고 칭찬하는 모습에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결국, 모든 면에서 뒤진 한국은 이탈리아에 0대3으로 완패했다. 하지만 낙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이탈리아 감독이 브라질을 피하기 위해 카메룬을 이기겠다는 발언을 한 것이 한국팀의 8강 진출에 '청신호'가 켜진 것으로 보는 기사도 있었다. 그리고 박성화 감독도 "온두라스를 상대로 다득점을 노리겠다."는 말로 화답했으며, 주장 김진규도 "아직 모든 것이 결정나지 않았다."며 8강 진출에 대한 의욕을 꺾지 않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가 카메룬을 잡는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온두라스에 몇 점차로 승리하느냐에 따라 8강 진출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탈리아의 승리와 한국의 승리를 가장 기본적 전제로 하는 것이고, 그 기본 전제조차도 쉬운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막연한 낙관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이러한 막연한 낙관과 비교해볼 만한 좋은 예가 프랑스에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레퀴엠>은 프랑스 대표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포포투> 8월호 참조). 특히, <레퀴엠>의 편집장은 "프랑스가 우승하면, 내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극언을 하기도 했는데,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 프랑스의 우승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퀴엠>은 1면 전체에 사과문을 게재했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레퀴엠>은 틀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당시 프랑스 국가 대표팀의 위태로운 행보에 대한 거침 없고 냉정한 평가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망이란 건 당연히 틀릴 수 있지만, 적어도 손가락 하나 정도는 걸 수 있을 만큼의 무게와 확신이 <레퀴엠>에게는 있었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까놓고 말해서, 내가 감히 내 손가락 하나를 걸고 한국 올림픽 대표팀의 성적에 대해 전망한다면, 나는 이전이라면 한국 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메달권 탈락', 그리고 지금이라면 '8강 진출 실패'를 선택하겠다. 그건 물론 틀릴 수 있고,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틀리기를 바라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게 내 손가락이 잘리지 않을 확률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메달에 도전하겠다."고 말한 박성화 감독이 전적으로 잘못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의 도전적인 발언의 진의와, "메달 도전"이 당연한 듯 그것을 확대, 재생산시킨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에는 거기에 과연 '손가락 하나' 정도의 무게는 지닌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한국이 굳이 8강 진출에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한국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전망과 분석이 좀 더 현실에 기반하여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꿈'과 '희망'을 품는 것은 좋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보다 객관적으로 우리의 전력을 재평가하는 일과, 그로부터 냉정하고 장기적인 앞으로의 전망과 비전을 끌어내는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낙관적인, 근거 없는 장미빛 전망에만 의존한다면, 감히 내 손가락 하나를 걸고 말하건대(이건, 그러니까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무시무시한 발언은 아니다) 한국축구는 언제나 "사상 최초의 메달"만을 노려야 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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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엄마와 누나가 계획한 '모녀의 1박2일 여행'에 내 자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녀'라는 단어 속에는 묘하게도 남자나 혹은 아들이 감히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어떤 단단한 막 같은 게 있어서, 멋모르고 "나두, 나두!"하고 방정을 떨어대다가는 금세 싸늘한 시선이 돌아오기 일쑤임을, 나는 지난 오랜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다못해 이름만 하더라도, 내가 끼어버리면 '모녀 여행'이라는 어쩐지 그럴듯한 이름이 '모녀자 여행'이라는 요상한 이름이 되어 버리니, "우리 그러지 말고 함께 '모녀자 여행'을 떠나자."라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차마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이름 따위야 어떻게든 여행에 끼고나서 '가족 여행'이라고 에둘러 말하는 수가 있긴 하지만, 그건 나보다 더 빨리, 그리고 철저히 이 여행에서 배제된 아빠에게 도저히 인간적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감히 두 모녀의 여행에 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기름 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이었다. 말만 무성하던 '모녀 여행'을 엄마와 누나가 공식적으로 내게 확인시켜주었을 때 나는 대뜸, "이런 고유가 시대에 달랑 둘이서 차를 끌고 가겠다고?"라며 꽤나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고, 아마도 이후 며칠간 은근히 계산에 집착하는 엄마와 누나의 머릿속에는 '고유가'라는 단어가 사라지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고유가야 개인이 달리 어찌할 방법이 없고, 여전히 여행을 포기할 수도 없다면 남은 건 하나, 바로 1인당 여행경비를 줄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이왕 움직이는 차에 한 사람쯤 더 태우면 자연스레 해결된다. 뭐, 총 여행경비야 조금 더 늘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을 떠나기 전날, 엄마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니?"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여기서 오로지 사실대로만 대답하는 건 그리 현명하지 않다는 걸, 나는 역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여행에 합류한다는 건 거의 확정적이고, 어차피 가는 여행이라면 최대한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떠나는 편이 낫다. 하여 나는 역시 자못 진지한 얼굴로, 절반의 진심과 그만큼의 거짓을 섞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말로 별로 가고 싶지 않아. 근데 어차피 엄마는 차만 타면 무조건 잘 테고, 그럼 누나 혼자 낯선 길을 헤매고 다녀야 되는데, 이게 상당히 걱정스럽지."

그리하여 결국, 우리는 지난 7월 13일, 전라도 쪽으로 그 이름도 이상한 '모녀자의 1박2일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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