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 -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미국 소도시 여행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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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 스퍼프가 마침내 스머프 마을을 떠나기로 한다고 해도, 그건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 스머프든 저 스머프든 죄다 엣지 없이 흰색 두건과 흰색 바지(?)를 착용하고 있다거나 혹은 모든 집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버섯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못 봐줄 노릇이지만, 특히 항상 가가멜과 아지라엘의 위협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는 낙관과 평화가 넘쳐 흐르는 스머프 마을은 분명 투덜이 스머프가 마음에 쏙 들어할 마을은 아닌 탓이다. 좀 더 다채롭고 엣지 있는 패션과 창의적이고 다양한 집들이 넘쳐나고, 무엇보다도 적당한 흥밋거리와 자극이 있으면서 또한 풍요와 평화가 공존하는 마을을 찾으려는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은, 그러니까ㅡ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ㅡ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난데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가정해보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이 책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는 제목 그대로 빌 브라이슨의 미국 여행을 다루고 있는데, 이 여정은 마치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난다면?'하는 가정을 꼭 현실에 적용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오와 주 디모인 출신이다. 누군가는 그래야 했으니까."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고향마을에 대한 미묘한 불만을 감지하게 하는 빌 브라이슨은 성인이 되어 고향을 떠난 이후 다시 돌아와, 이른바 "재발견 여행"을 떠나며 모든 것이 완벽한 마을(일명 '모아빌')을 찾아 나선다. 물론, 이 여행은 그가 어린 시절의 가족여행으로부터 얻은 추억을 다시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들과 '농부의 선탠'으로 표식을 삼는 남자들이 있는,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기만 한 아이오와와는 다른 이상적인 마을을 희구한다는 점에서 빌 브라이슨의 여행은 영락없이 투덜이 스머프의 여정을 연상시킨다.

투덜이 스머프, 아니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의 경과는 짐작할 만한 그대로다. 빌 브라이슨은 미국 대부분의 주를 차로 2만 2496킬로미터를 달리며 여행하지만, 그가 바라던 '완벽한 마을'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여행에서 그가 지나치는 수많은 마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투덜거림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마치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는 듯한, 독특한 억양과 발음을 구사하는 사람들과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싸구려 관광지로 변하거나 지독하게 가난하거나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들이 조소와 비난의 대상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그의 추억 속에서 아름답게 채색되었던 낭만과 즐거움과 매력 역시 종종 우중충한 회색빛으로 현현하기도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결코 특유의 유머를 잃어버리는 법은 없다.

물론, 때로는 빌 브라이슨이 구사하는 유머가 지나치게 과격한 탓에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그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인신공격에 가까운 언사들과 그가 둘러본 마을과 유적지 등에 대한 일방적이고 과장된 평가는 이 책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브라이슨의 무례함을 결국 웃음으로 받아줄 수 있는 건, 능글거리며 불평이나 토해내던 그가 갑자기 정색을 하는 순간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테다. 이를테면, 미국의 의료체계에 대한 강도 높은 힐난이나 인종차별에 반대한 '자유의 기수'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확고한 비판의식 등, 이러한 대목에서 빌 브라이슨의 진정성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는 불평으로 일관하던 그가 자연의 순수한 경이로움과 잘 보전된 역사의 가치에 대해 찬탄을 발할 때도 마찬가지다.

설령 투덜이 스머프가 스머프 마을을 떠날지라도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불만 끝에 언제나 "하지만 아기 스머프는 좋아."라고 덧붙이던 투덜이 스머프의 말에서 아마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빌 브라이슨의 여행 또한 그렇다. 비록 여전히 아이오와의 디모인은 결코 '완벽한 마을'은 아니지만 그가 길고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를 진정어린 환대와 편안함으로 맞아준 건, 그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고향집이 있는 아이오와의 디모인이었다. 물론 여전히 이곳은 나비테 안경에 벌집 머리를 한 여자가 있고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분위기가 있는, 단조롭고 지루하기도 한 곳임을 빌 브라이슨은 잊지 않고 다시 한 번 지적하기는 하지만, 그리운 추억과 느긋한 평화가 넘쳐흐르는 이곳이야말로 그가 찾아 헤매던 마을이었음을 빌 브라이슨은 긴 여행 끝에 비로소 따뜻하게 자각한다. 그리고 기실, 이러한 따뜻함이야말로 거침없는 불평과 비판 뒤에 가리어진 빌 브라이슨의 진면목이며, 또한 이는 내가 빌 브라이슨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점을 조금 말하자면, 이 책은 20년 전에 이미 발간된 것으로 이 책이 다루는 미국은 아무래도 오늘날의 미국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보다는 이 책이 흥미가 조금 덜하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의 책들은 모두 일정 부분 조금씩 연결되어 있어서 그러한 부분들이 엮이는 재미가 있다. 가령,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할 수 없는 세 가지 일이 있음을 얘기하는데 그게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에서 번복된다거나, 혹은 이 책에서 종종 회상되는 그의 가족 얘기가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에서 구체화되는 식이다. 그러니까 빌 브라이슨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 역시 읽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며,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건 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빌 브라이슨의 이 여행은 가정이 아니니까 말이다. 게다가 투덜이 스머프의 여행보다는 역시 빌 브라이슨의 여행 쪽이 좀 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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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
이혜영 지음 / 한국방송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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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건 '제주 올레길'을 걷고 난 이후였다. 제주 올레길에 환호했던 나는, 곧 새로운 걷기여행의 명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지리산 둘레길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고,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이라는 이 책이 나왔을 때에는 적잖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제주 올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가득할 지리산 둘레길을, 과연 이 책은 어떻게 펼쳐낼지 무척이나 기대되고 궁금하였더랬다. 하지만 그렇게 적지 않은 기대로 집어든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아쉬웠다.

일단 이 책은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살이 땅살이 보듬은 산채비빔밥 같은 길"이라는,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책표지의 수사처럼 책도 지리산길 위의 '사람살이'와 '땅살이'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버무려낸, 꼭 '산채비빔밥' 같은 느낌이다. 이를테면 길 위를 걷는 와중에 만난, 길 위에 사시는 분들의 삶이 조명되고, 지리산의 역사적 사실들이 언급되고, 지리산을 읊었던 문학작품이 인용되며, 또 지리산을 무대로 펼쳐졌던 비극을 되살려 내기도 하는 식이다. 물론,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상세한 정보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리산을 둘러싼, 이러한 많은 역사와 문학과 삶과 정보가 버무려지는 와중에 정작 '걷기여행의 즐거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지리산 둘레길'의 매력에 조금씩 빠지려다가도 곧바로 언급되는,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닌 서술들에 경쾌한 발놀림은 이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지리산 둘레길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탓인 듯도 하지만, 저자가 딛고 있는 공간을 내가 따라가기가 꽤 버거웠고, 당연히 그 공간을 배경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생경하게 흩날리기 일쑤였다. 좀 더 경쾌하고 즐거운 '걷기여행'을 기대했던 내게, 이 책은 쉬이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아픈 상처까지 불쑥 선물마냥 휙 던져주고는 내내 담담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소문'의 굴레에 갇힌 길까지 고민하자니 여행자는 어렵다고 뒤통수만 긁적거린다."고 말할 때에는 속으로 뜨끔했음을 밝혀 두어야겠다. 즐거운 길을 걸으며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빨치산과 민간인 집단 학살, 제주 4. 3 등)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었지만,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오고가고, 기억하고, 묻다보면 언젠가 진실 또한 밝혀지겠지."라는 저자의 믿음 앞에서는, 어쩐지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그저 내 탓인 듯 미안해진다.

4. 3을 기억하지 않아도 제주여행에는 사실 지장이 없다. 굳이 상기하면서 다니더라도 제주의 목가적 풍경이 그 역사를 거짓말처럼 여기게 만든다. '잃어버린 마을' 터에 자못 무거운 걸음을 했다가도 비석 뒤편 푸른 초원에 마음을 훌렁 뺏기고 만다. 아무래도 제주는 어제의 사실과 오늘의 감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여행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섬이다. 그래도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은 진부하지만 유효한 것 같다.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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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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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가진 꽤 좋은 습관 중의 하나는, 길을 나설 때면 대개 책 한 권쯤은 챙겨서 나선다는 것이다. 나는 장시간 이동을 해야 될 때 책을 가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여행을 떠날 때도 짐을 줄이기 위한 노력과는 별개로 책 한 권에 대해서는 그 무게를 문제 삼지 않는 편인데, 이게 꽤 좋은 습관인 이유는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주변에 민폐를 끼칠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시끄럽게 떠들 일도 없고, 졸다가 옆사람을 머리로 받을 일도 없다). 그런데 내가 지닌 사소한 문제라면, 그렇게 들고 간 책을 실제로 안 읽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것 정도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가져간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는 것은 언감생심이려니와 심지어 어쩔 때는 들고 간 책을 손에 쥐어보지조차 않을 때도 있을 정도다. 이쯤 되면 대체 이게 웬 바보짓이냐 하겠지만, 다행히도 변명거리는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장시간 이동 중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거나, 혹은 주변이 복잡하고 시끄러워서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거나, 또는 여행이 너무 근사해서 차마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거나, 심지어는 그저 멍때리느라 책을 읽을 수 없었다는 핑계도 가능하다. 책으로서는 유감이겠으나, '책읽기'의 우선순위는 기실 멍때리기보다도 낮다는 얘기다.

눈을 씻고 봐도 '런던스타일'과의 관련성을 찾기가 쉽지 않은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는(원제는 물론 따로 있다) 심지어 유명 작가마저도 '바보짓'을 서슴없이 한다는 데에서 일단 위로가 되는 책이다. 닉 혼비는 매달 책을 사는 일에 돈을 쓰고 휴가기간이면 느긋하게 책을 읽을 계획을 세우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산 책을 다 읽어내지 못해 쌓아두기 일쑤고 휴가기간에는 다른 일 때문에 책을 읽는 일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축구 시즌이 시작되고, 폭탄 테러가 벌어지기도 하는 마당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에서 닉 혼비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심각한 부부싸움을 할 때도 있었을 테고, 몸이 아픈 날도 있었을 테고, 또 좌절감에 사로잡혀 인생에 대한 회의에 빠진 날도 있었을 테니, 솔직히 그 와중에 살아남은 것만 해도 장하다고 칭찬할 일이다. 그럼 도대체 '책읽기'는 어쩌냐고? 닉 혼비의 입을 빌자면, 명백하게도 책은 레이예스(아스날 축구선수)의 30m 중거리 슛처럼 우리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만들지 못한다. 그러니 '책읽기'쯤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닉 혼비가 사 놓은 책을 읽지 못했던 이유를 무수히 나열하며 책의 가치를 폄하하려고 하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조리 읽어 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책을 계속해서 사서 쌓아 두거나 혹은 생각만큼 책읽기에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닉 혼비는 '책'과 '책읽기'를 열렬히 찬양하는 쪽이다. 나중에 다시 말을 번복하기는 하지만 그는 책과 다른 문화매체들, 가령 영화나 스포츠 등과 권투 시합이 벌어진다면 30번 중에 29번은 책을 응원할 것이라고 말하며, 책의 가치를 다른 어떤 문화매체보다도 우위에 둔다. 물론 아스날의 중요한 경기가 벌어질 때면 백이면 백, 책을 집어 던지고 경기장을 찾을 것임은 저자도 알고 나도 알지만, 어쩌면 오히려 그런 이유로 책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 모든 일에 기꺼이 우선순위를 내주면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닉 혼비는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긴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심지어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할 때조차도 축구나 연극을 보거나 혹은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까이 놓여 있는 한 권의 책을 읽는 일은 여전히 충분히 가능한 법이니까 말이다. 뭐 물론, 어디까지나 그럴 마음이 있을 때의 얘기지만.

<빌리버>에 매달 연재된 칼럼을 모은 이 책은,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책 읽기의 즐거움'에 관한 책이다. 닉 혼비가 매달 사거나 얻은 무수히 많은 책들 중에서 선택된, 비교적 적은 수의 책들에 대한 이야기, 어떤 책을 읽은 이유나 혹은 읽지 않은 이유에 대한 이야기, 읽다가 집어 던진 책 혹은 도저히 읽을 만한 기분이 아니라 읽기를 관둔 책에 대한 이야기 등, 닉 혼비는 때로는 진지하고 열정에 가득 차서, 또 때로는 가볍고 경쾌하게, 또 종종 냉소적이고 비판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면서 결국 책에서 얻는 즐거움에 대해 항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물론, 가끔은 주로 그가 읽은 책을 내가 전혀 몰라서 맥락이 이해가 안 될 때도 있긴 했지만, 그런 이유로 닉 혼비의 조언대로 이 책을 집어던지기에는 역시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쪽이 내게는 더 컸다. 게다가, 가브리엘 자이드의 <너무나 많은 책들>에 나오는, "진정한 교양인이란, 읽지 않은 수천 권의 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태연자약하게 더 많은 책을 원할 수 있는 이들이다."와 같은, 멋진 구절들을 함께 공유하게 해주는 것은 근사한 덤이다. 알고 보니 닉 혼비는 교양인이었고, 나는 차마 교양인이라고 슬며시 무임승차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책을 들고 갔다가 그냥 들고 온다고 해서 바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어딘가!

이 칼럼을 시작한 이래 적어도 열두 권의 훌륭한 책을 읽었다고 생각된다. ...(중략)... 그리고 앞으로 한 해 동안에도 그만큼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더 빨리 읽는다면, 더 많이 만날 수도 있겠다. 지난 한 해, 여러분들은 책을 읽는 것 말고 그만큼 멋진 경험을 열두 번이나 한 일이 무엇이 있는가? 거짓말은 사절하겠다.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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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와 문화
하재근 지음, 최윤진 그림 / 자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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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책 한 권에 담아내려는 시도는 일견 무모해 보인다. 적정한 분량의 한 권으로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쳐내다 보면 가지는 물론이고 자칫 줄기마저 앙상하기 이를 데 없게 될 우려가 있고, 그렇다고 책 분량을 한정 없이 늘여 놓으면 그 한 권의 책은 아무도 읽지 않기 십상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태생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만화'라는 형식의 도움을 받아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줄기를 소략하지만 비교적 명쾌하게 드러내는 한편, 종종 가지 끝에 매달린 열매의 풍성함을 맛보이는 데에도 결코 인색하게 굴지 않는다. 물론, 그로 인해 그저 '만화'라고 하기에는 컷과 글자가 적지 않은 편이지만(그렇다고 아주 많지도 않다), 중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기록된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하여 쑨원의 신해혁명에 의해 멸망된 청나라까지를 아우르면서 그 도도한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 일련의 법칙을 추출해내고, 아울러 중국의 문화 저변에 흐르는 지극히 동양적인 가치와 사상을 짚어내면서도, 이 책은 "무조건 쉽고 재미있을 것!"이라는 저자의 대원칙 아래서 시종일관 '만화' 특유의 유머와 재미를 잃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의외로 상당히 유용한 내용과 지적 만족감을 제공하는, 재미있고 유익한 '만화책'이다. 

자신의 이익에만 마음을 쏟고 타인에 대한 해악에 무관심한 사람은 천리(天理)에 의해 관용될 수 없고 인류에 의해 일치되게 증오되어야 합니다. ...... 당신네 나라가 5~6만리나 먼 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익을 목적으로 상인들이 오고 그들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도리로 다시 독물을 사용해 중국 국민을 해치는 것입니까? ...... 질문을 허락한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ㅡ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中ㅡ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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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공 위의 수학자
강석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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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야구와 농구는 물론이고 미식축구와 마라톤과 복싱 등, 스포츠라면 딱히 종목을 가리지 않고 두루 섭렵한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스포츠의 순간 순간들을 독자에게 아낌없이 펼쳐 놓는다. 마라도나의 '신의 손'이 현현한 1986년 월드컵의 순간과 최동원이 불멸의 투구를 선보였던 1984년 한국시리즈의 순간, '농구 천재' 허재가 다시 부활한 94-95 농구대잔치 결승전의 순간과 박시헌이 부끄럽지만 안타까운 금메달을 따냈던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경기의 순간 등, 저자는 독자들도 기억할 만한 순간이나 혹은 독자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놀라운 기억력으로 복원해내며, 그 순간의 감동과 위대함과 슬픔과 분노와 부끄러움과 안타까움과 추함 등의 감정들을 함께 되살려 낸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감정들이 넘쳐났던 스포츠의 순간들을 통해 스포츠의 세계를 예찬하는 한편, 그 속에서 우리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가치들을 은근슬쩍 일러준다. 내용이 짧게 끊겨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지만 대신 속도감 있게 읽히고, 기본적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 ps.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특히 대중의 무책임한 기대를 비판한 대목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이 대목은 최근 2009 로마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인 박태환에게 쏟아진 비판과 충고(?)에 대한 준엄한 반론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여긴다. 그와 관련된 부분을 인용해 놓는다.

도쿄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의 츠브라야는 예상을 뒤엎고 동메달을 목에 거는 이변을 연출했다. 일본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서구 문화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감을 감추지 못했던 일본이 한 마라톤 선수의 동메달로 어깨를 쭉 펼 수 있게 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여 올림픽 동메달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수확해낸 것이 츠브라야에게는 비극이었다. 일본 매스컴은 도쿄 올림픽이 끝나기도 전에 '멕시코 올림픽의 금메달을 향하여' 따위의 전형적인 기사를 연일 터뜨리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츠브라야는 자신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본 국민들의 기대를 어깨에 얹고 그 나름으로는 그 기대를 실현시켜보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에는 할복 자살이라는 극한적인 방식으로 그가 도저히 그러한 일을 이루어낼 수 없음을 일본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짧은 생애를 끝맺고 말았다. 나는 위와 같은 일은 한 인간에 대한 대중의 무책임한 린치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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