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냐
박상 지음 / 새파란상상(파란미디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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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새파란상상' 출판사의 관계자인 듯한 분이 댓글을 남겨 주었다. 댓글의 내용인즉슨,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박상의 야구소설 <말이 되냐>가 나왔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얘기였고,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를 계기로 '야빠 대동단결 이벤트'에 참여하라는 얘기였다. 뜬금없이 이런 댓글이 달린 이유는 순전히 내가 야구 관련 서적을 읽고 리뷰를 쓴 전례가 있기 때문인데, 이렇듯 야구팬으로 보이는 잠재적 독자를 일일이 찾아가는 홍보 방식은 나름 괜찮아 보였다. 어차피 야구소설이란 건, 결국 읽을 만한 사람만 읽게 되는 장르이니까. 다만 그 분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면, 그렇다고 해서 야구 관련 서적을 읽는 사람이 반드시 야구팬은 아니라는 것이고, 유감스럽게도 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축구팬'이다. 그러니까 '축구팬' 블로그에 찾아와서 "야빠대동단결" 운운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

그런데 말이 안 되기로 따지자면, 제목조차 '말이 되냐'인 이 소설은 그보다 한술 더 뜬다. 사회인 야구팀에서도 별 볼 일 없는 야구를 하며 회사를 다니던 주인공(이원식)이 회사에서 잘린 후 산속 암자를 찾아가게 되고, 거기에서 만난 무공스님과의 인연 덕택에 무공을 전수 받고 내공을 얻고 비도술을 익힌다? 잠깐, 혹시나 이 정도쯤이야 이른바 차원이동 무협소설에서 흔히 보던 패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면,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대판 야구소설의 입장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후의 상황은 점입가경이어서, 비도술의 방식으로 던지는 이원식의 공은 조금씩 신체 운용의 묘리를 깨우쳐 가면서 점점 더 빨라지고, 그는 곧 꿈에서나 밟아 보았던 프로의 마운드 위에 오른다. 게다가 그런 그의 곁에는 야구를 사랑하며 언제나 그에게 기적을 베푸는 아름다운 여인(이선희)도 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냐!

그러나 평범하고 찌질한 인생을 살던 한 야구팬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거나 하는 따위의 문제는 기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본래 판타지와 로망의 영역이라는 것이고, 알다시피 판타지와 로망이라는 건 현실과는 억만 광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까닭에 도리어 위안과 만족을 주는 법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야구를 인생의 한가운데에 둘 수 있는 기쁨과 시속 160km대의 직구를 던질 수 있는 환희,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우정과 유대, 그리고 야구를 사랑하는 이와의 사랑도 외려 현실과는 다르기에 바라마지 않는 기적과도 같은 셈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야구소설'이랍시고 완전히 '현실'적이라면, 아마도 야구를 너무나 좋아하다가 회사에서도 잘리고도 정신 못 차린 채 '프로야구'를 꿈꾸는 이원식은 야구공을 손에 쥔 채 '야, 구..' 한 마디를 남기고는 처참하게 죽게 될 테고(물론 그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끝내 남기고 싶었던 말은 '야, 구해줘, 제발'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소설을 읽으며 독자는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찌질한 인생은 야구조차도 꿈꿀 수 없다니, 이게 말이 되냐!

유쾌하고 코믹하지만 과장되고 엉뚱한 듯하던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흥미진진해지고, 점점 더 궁극의 판타지에 다가갈수록 어떤 현실성 없는 욕망의 대리만족도 더욱 충족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환상이 본래 그렇듯,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시련과 고난이 닥치고, 어디에나 있을 법한 부조리와 약은 술수로 무장한 악당이 등장할 때, 가령 소설 속에서 "비열한 악한이 권력자가 되기도 하는 사회"에서 당연하다는 듯 음험한 쥐새끼 같은 타자(그러니까 이름이 이명......아, 그래 이명복이었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를 상대하게 될 때, 이 판타지란 것도 결국 현실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음을 새삼 깨닫고, 그렇다면 아무리 빠른 직구라도 별무소용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곤 하는 것이다. 하긴, 아닌 게 아니라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에서 그저 빠른 공만 장땡이라면, 그게 말이 되냐!

최고의 강속구. 최고의 멋진공. 부조리라곤 없는 정직한 직구. (p43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스포츠인 야구에서 정직한 직구의 매력이란, '작가후기'에서 작가가 언급하듯 "극복에의 의지"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빠르다고 무조건 얻어맞지 않는 것도, 느리다고 무조건 얻어맞는 것도 아니지만, 있는 힘껏 던지는 최고의 강속구에는 정정당당하게 맞부딪치는 순수한 의지가 가득 담겨 있고, 그것은 그 자체로 종종 어떤 '희망'을 은유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정당한 야구를 도외시하는 타자(그러니까 이름이 이명......아, 이명복. 물론, 중요한 건 아니지만)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정의'랄지, 혹은 나아가 "대통령은 밥 먹고 국민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운동선수는 밥 먹고 열심히 운동만 하는", 그런 잘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기대' 같은. 물론, 현실은 그와는 달리 여전히 쥐똥 같을지도 모르지만, '극복의 의지'가 있는 한, 그리하여 "우리에게 좋은 날이 올 수 있도록 극복하는 힘이 되어 줄 해피엔딩의 마력"을 믿는 한, '희망'을 은유하는 정직한 직구의 가치는 여전히 작지 않다. 그러한 '희망'조차도 말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 될 테니까. 

덧. 어쩌다 보니 '야빠 대동단결 이벤트'에 당첨된 모양인지, 어느 날 야구 티켓 두 장이 집으로 날아왔다. 물론 일단은 고맙긴 한데, 다만 문제라면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달려 온 티켓이 가리키는 일시와 장소가 바로 다음날의 서울 목동야구장이라는 것. 그러니까 지방에 사는 사람한테 당장 내일 열리는 서울 경기 티켓이라니, 이게 말이 되냐!(...라는 건 얼마 전까지의 일이고, 며칠 전에 이번에는 다소간의 여유를 둔 티켓이 또 날아왔다. 이것은...그러니까 '축구팬'을 '야구팬'으로 회유하기 위한 대대적인 음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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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팔리 모왓 지음, 곽영미 옮김, 임연기 그림 / 북하우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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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게 개가 없다는 것은 드넓은 대초원을 반밖에 즐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고 사뭇 감동적인 데가 있는 이 한 문장에 크게 공감을 한 이후에는, 왠지 꽤나 무덤덤하게 책을 읽어 나갔다. 대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곳을 배경으로 하는 팔리 모왓의 가족 이야기는, 조금 별난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혀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 머트의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인해 독특하고 흥미로웠지만, 뭐랄까, 자전적인 이야기와 동화의 경계 속에 위치한 탓에 나와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듯했다. 논픽션을 지향하는 듯하면서도 약간의 상상력과 다소의 과장이 뒤섞이는 글에 공감하기에는, 내 감성이 그리 풍요롭지 않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면, 일전에 읽었던 팔리 모왓의 다른 책 <울지 않는 늑대>에서도 글쓰기 방식은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와 유사했었다. 그러나 전자가 익숙지 않은, 그래서 인간의 일방적인 편견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늑대'를 다분히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 하에서 그러한 방식이 '효과적'이었다면, 후자는 너무나도 익숙한 '개'를 대상으로 하면서 그러한 방식이 외려 조금은 '낯선 거부감'을 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세상에는 별의별 개들이 다 있고, 내가 실제로 길러본 바 개가 종종 자신이 개가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알지만, 아무래도 이 책의 주인공 머트의 행동까지 수긍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트는 '개가 되고 싶지 않은 개'였다기 보다는, 차라리 그냥 '개가 아닌 개'가 더 어울릴 정도였고, 그래서 심지어는 이 책이 주는 감동마저도 종종 작가에 의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직조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상상력과 과장이 글의 재미를 위한 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고, 인간과 동물의 교감을 전하는 팔리 모왓의 따뜻한 메시지는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그리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팔리 모왓의 책을 읽는 이유로는 충분하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이상을 원했던 내게, 이 책은 아쉬웠던 부분이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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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퍼컷 - 신성 불가침의 한국 스포츠에 날리는 한 방
정희준 지음 / 미지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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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가 나온 경기를 나는 생방송으로 지켜 보았었다. 김연아가 아니었다면 평생 볼 일이 없었을지도 모를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을, 그러니까 나는 순전히 김연아 덕택에 약간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유심히 지켜 보았던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금메달을 땄을 때에는 확실히 조금 감동적이었다. 김연아가 경쟁자들에 비해 기술적으로 얼마나 탁월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잘 알지 못하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연기는 충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은 가장 좋았던 건 어쩌면 그냥 '금메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녀가 앞으로 혹 '메달권'과 거리가 먼 선수가 되더라도 그렇게 유심히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종목을 볼 일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섣불리 긍정적인 답변을 내어놓지 못하기 때문일 테다.

물론 '한국' 국적을 지닌 탁월한 재능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각고의 노력 끝에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따낸다는 스토리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금메달을 따낸 선수를 향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팬들의 열광 또한 대단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돌리면 '금메달'과 대비되는 까닭에 더욱 불편한 장면들도 이내 눈에 띈다. 이를테면, 환한 표정으로 환대를 받으며 돌아오는 '금메달' 선수들과, 그중에서도 유독 찬란히 빛나는 '세계 기록 보유자' 김연아 선수, 그리고 그들을 위해 마련된 기자회견과 김연아의 미래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 공세. 그러나, 함께 올림픽에 참가했던, '금메달'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외려 미래가 더욱 만만치 않을 그 많던 선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설마하니 그들은 캐나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단 말인가.

나 역시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 스포츠가 소비되는 방식은 대단히 '反스포츠적'이다. '스포츠맨 정신'이라는 표현이 무색하게도, 한국에서는 승부와 결과에 관심이 집중되고 그 과정의 정당성과 가치는 간과되기 일쑤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과 권위주의는 성적지상주의에 대한 압력 하에서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고, '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의 퇴로는 완전히 막혀 있다. 더욱이 당연한 수순처럼 스포츠가 '국가주의'와 결합하면, 이제 스포츠는 스포츠를 넘어 종종 '국가' 그 자체와 동일시되면서 스포츠는 더 이상 즐거움이나 여가를 위한 창조적이고 흥미로운 '놀이'가 아닌, 단지 '국가'를 위한 강압적이고 도구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스포츠에 남는 건, 종래에는 그저 '금메달'이라는 이름의 '강박'일 뿐이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면서 그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어려움이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대~한민국'으로 치환해버리는 데 대해 불편해 하는 저자는 이러한 '반스포츠적'인 현실에 대해 날을 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도 스포츠계의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그는 경기 단체, 팀, 지도자, 그리고 일부 기자들이 공고하게 얽혀있는 스포츠계를 '카르텔'로 규정하고 비판하면서 일종의 내부고발자로서의 역할을 자청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한국 스포츠를 관통하는 세 가지 키워드로 '국가주의', '집단 몰입', 그리고 '폭력'을 들면서 우리가 간과하는, 그래서 더욱 기승을 부리는 '반스포츠적'인 장면들에 여지없이 '어퍼컷'을 날린다.

스포츠라면 종목을 막론하고, 아울러 非스포츠 영역까지도 아우르는 저자의 글은 '어퍼컷'이라는 책 제목이 부끄럽지 않게 그야말로 거침이 없어서 읽노라면 절로 통쾌한 마음이 들 정도인데, 이건 책의 소제목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언론의 박지성 장사, 그 불편한 진실>, <촛불 정국, 보이지 않는 스포츠 스타들>, <MLB 제국주의에 열광하는 한국>, <올림픽은 개고생이다>, <한국 스포츠 최고의 명곡, "금메달 타령">,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등등, 소제목들이 시사하는 바는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고, 실제로 내용 역시 실명 비판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사뭇 공격적이고 논쟁적이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적인 호소와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와 근거 그리고 다채로운 사례의 제시를 통해 저자의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특히 스포츠 이벤트를 유치하기 위한 자치단체장들의 노력에 대해 그 부당성을 논박하는 대목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모든 논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고, 몇몇 대목들에서는 동의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또한 저자의 "들여다보기"가 지나치게 '반스포츠적'인 불편한 장면들에 집중되는 탓에, 도리어 그것이 그저 '스포츠'를 순수하게 '스포츠'로서만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측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자의 "들여다보기"는 '금메달'에 환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금메달' 뒤에 가리어진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비판이다. 지난 캐나다 동계 올림픽에서 금빛 역주를 펼쳤던 쇼트트랙 선수들에 대한 환호 뒤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선수선발과정이 있었던 사례에서도 보듯, 스포츠계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저자는 다만 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자고 역설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외려 스포츠를 순수한 스포츠로 남겨 두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시원하고 통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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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 -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삶
폴 호프만 지음, 신현용 옮김 / 승산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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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출신의 수학자 폴 에어디쉬의 생애에 대해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ㅡ폴 에어디쉬는 1913년에 도착해서 누구에게도 포획되지 않았고, 당연한 귀결로 해방된 적도 엡실런을 둔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두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의 언제나 열려진 채 'SF(독재자)의 책에 있는 바로 그것'을 알고자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는 결코 사망을 맞지 않고서 1996년 떠났다.

그러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면 일단 안심해도 좋다. 위에서 알듯 모를 듯한 표현들은 에어디쉬가 즐겨 사용한 표현들을 이용한 것인데(가령, 수학에서 지극히 작은 숫자를 의미하는 엡실런은 아이를, 두목과 사망은 각각 아내(혹은 남편)과 수학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표현들은 못 알아듣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이건 단순히 익숙지 않은 단어의 사용이 문제가 아니다.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책에 언급된 발언을 인용하자면, 에어디쉬와 공동연구를 한 바 있는 수학자 해롤드 데이븐 포트의 미망인은 남편과 에어디쉬의 기괴한 대화 장면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두 사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물론 그들은 미쳤지요." 미친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 명백하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대개의 수학자들이 아마도 조금쯤 미친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떻게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는 '소수'를 찾기 위해 수십만, 수백만 자릿수를 헤매고 다니는 그들을 보라. 2를 3,021,377제곱하여 얻은 수에서 1을 뺀 수가 '소수'인데 대체 어쩌란 말인지. 설마하니 하필이면 딱 그 수만큼의 빵이 있다면 결코 한 사람 당 하나씩 외에는 달리 나누어줄 방법이 없을까봐 미리 걱정이라도 할 참이란 말인가! 수백 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또 어떤가. "일반적으로 2보다 큰 어떤 거듭 제곱도 두 개의 같은 거듭 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대관절 왜 증명해야 하는가. 유일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수학자들이 조금 미쳤기 때문일 것이다. 미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책 속의 소제목에서 가져온 '우리 수학자 모두는 약간 미친 겁니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이 책의 원제가 실은 '숫자만 사랑한 남자(The Man Who Loved Only Numbers)'라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이 책은 약간 미친 수학자들 중에서도 유별난, 그러나 또한 그만큼 뛰어난 수학자였던 폴 에어디쉬의 생애를 주로 좇으면서 그와 관련된 (미친) 수학자들 그리고 그들이 다룬 (미친) 수학적 문제들도 아울러 언급하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미친) 이야기들은 종종 재미있고 또 경이적이다. 가령, 콜럼비아 대학의 프랭크 넬슨 콜이 1903년, 지난 250여 년 동안 일반적으로 소수로 믿어져왔던, 2의 67거듭 제곱에서 1을 뺀 수가 193,707,721과 761,838,257,287의 곱으로 나타내짐을 담담히 칠판에 쓴 일화에서는 나도 모르게 '브라보'를 외치고 싶었고, 미친 짓처럼만 보였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마침내 증명되는 역사적 과정도 대단히 흥미진진했다. 만약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끝내 증명이 되지 않았다면, 나라도 그 정리를 풀기 위해 이제라도 수학에 투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라는 건 조금 뻥이지만, 파울 볼프슈켈이라는 사람은 연인에게 실연을 당하고 자살을 생각했다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접하고는 흥미를 느껴 그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상당한 금액의 상금을 걸었다고 한다).

"미쳐야 미친다."는 표현은 수학자들에게 특히 유효하다. 책 속에서 폴 에어디쉬가 말하듯이, 무엇보다도 수학자들은 "무한과 맞서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로 종종 그들이 하는 일들은 일상생활과는 더욱 더 멀어지며 그저 미친 짓으로 보이는 듯도 하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숫자를 더욱 더 사랑한다. 이 책은 그렇듯 숫자를 사랑하여 미친 사람들의 세계를 따뜻하고 세심하며 또한 유머러스하게 담아내었으며, 수학적 주제에 대한 친절한 설명으로(그럼에도 여전히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그런 건 대충 넘어가도 별로 문제될 건 없다) 독자들이 그 세계의 매력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그러니까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러한 진지함과 치열함이 있는 한 미치는 것은 분명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이다.

A graduate student at Trinity    트리니티 대학의 한 대학원생이
Computed the square of infinity    무한의 제곱을 계산해 보았네
But it gave him the fidgits    그러나 그 숫자를 써나가다가
To put down the digits,    그만 현기증이 나버려서 그는
So he dropped math and took up divinity    수학을 그만두고 신학을 하게 되었네

ㅡAnonymous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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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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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TV의 고발 프로그램이나 뉴스에서는 마치 인간성이 상실된 듯한, 난폭하고 잔인하며 무도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낮에는 마냥 좋은 남편이자 아들이었던 사람이 밤에 술을 마신 후 돌변하여 아내와 어머니를 폭행했다든지, 어느 10대가 강남에서 살기 위해 엄마와 누나가 집에 있을 때 후배를 시켜 집에 불을 지르게 했다든지, 아버지가 의붓딸 혹은 심지어 친딸을 성폭행했다든지 등등. 이런 일들은 물론 끔찍한 일들이지만, 대개의 경우 '나'와는 무관하다. 나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이니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들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고 또 그래야 마땅한 일이라는 의미다. '나'의 도덕률(혹은 '나'가 모인 '우리'의 도덕률)로 재단할 때, 그런 일들은 영원히 일어나서는 안 되고 또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결국 그 일들은 일어났다는 게 그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거짓말 하나 - '나'는 '나'가 아니다 

헝가리 태생의 작가인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3부작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중, 1부에 해당하는 '비밀노트'에서는 온갖 비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쌍둥이인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가 함께 쓴 '비밀노트'에는 도둑질이나 폭력에서부터 살인과 방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기록되고, 이는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 의해 그대로 자행되었음을 뜻한다. 그들은 전쟁 통에 할머니 댁에 맡겨지면서 할머니의 온갖 폭언과 구박에 시달리고, 선과 악의 혼돈 상황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나 그 자신만의 '비밀노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지 못하는 일들이 은밀히 숨겨져 있고, 작가는 이러한 비밀들을 감정을 배재한 채 지극히 담담하고 간결한, 그러나 대단히 매혹적인 문체로 풀어낸다.

물론 '우리'에 의해 자행된 반인륜적이기까지 한 일들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각각 2부와 3부에 해당하는 '타인의 증거'와 '50년간의 고독'을 통해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기록들은 허구로 암시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일들이 특정한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행해졌느냐에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한 은밀한 '비밀(혹은 욕망)'들이 '나'의 의식 속에 존재했다는 데에 있다. 추악한 비밀들을 그저 숨겨둔 채 겉으로만 달리 행세한다고 해서 겉으로 드러난 '나'만이 그대로 '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쌍둥이들을 작중 화자로 내세워 '우리'로 서술한 것은 어쩌면 이렇듯 의식 속에 감추어둔 비밀과 행동의 이중성을 의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를 통해 작가는 '나'라는 존재가 지닌 모순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듯하다.

거짓말 둘 - '너'는 '너'가 아니다 

2부인 '타인의 증거'에서는 유독 '타인'의 존재로부터 '나'의 존재를 증거 삼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이를테면, 불구의 몸을 지닌 소년은 잘 생긴 금발 소년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추악한 용모와 불구를 더욱 뚜렷이 인식하고, 서점 주인은 누나의 존재로 인해 자신이 글을 쓸 수 없다고 여기는 반면 누나는 자신의 희생이 모두 동생이 글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루카스는 클라우스가 반드시 생존해있음을 강하게 주장하며, 클라라는 여전히 남편의 잔영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비로소 각기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이것은 '타인'으로서의 그들 각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나'의 실존을 규정짓는 하나의 표식이 되는 듯하다. 그리하여 심지어 서점 주인 빅토르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이렇게 묻는다. "내 누나의 시체 하나만으로는 부족해서 거기에 내 것까지 보태야 하는 건가? 하지만 누가 그 두 번째 시체를 원하는 거야?"

모든 생존과 죽음은 '나' 스스로의 의식과 결정으로만 비롯되지 않고, 이러한 실존적인 문제를 결정짓는 주체는 오히려 '타인'이다.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하며, 혹은 누군가를 끊임없이 증오하며, 혹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또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기를 원하며 '나'는 '타인'의 존재에 매달린다. '그들이', '그들은', '그들의', '그들을'. 유달리 굵은 글씨로 표시된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 속에는 '타인'의 존재에 대한 질식할 것만 같은 강박관념마저 느껴지며, 이러한 타인의 존재 속에서 독자는 문득 깨닫게 되는 듯하다. '너'는 그저 '타인'이 아니라 '나'를 규정하고 속박한다는 것을. 그것은 태생적으로 '나'와 구분되어야 할 '너'라는 존재가 지니는 모순처럼도 보인다. 요컨대, '너'는 그저 '너'가 아닌 셈이다.

거짓말 셋 - '나'는 '너'가 아니다 

3부인 '50년간의 고독'에 이르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듯했던 사실들은 모호해지고, 모호한 듯하던 것들이 도리어 사실처럼 밝혀지기도 한다. 거짓말들이 쌓이고 모순은 중첩되며, 와중에 의미는 풍성해진다. 하지만 굳이 하나의 단어로 3부를 이야기하자면,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3부에서는 드디어 '우리'가 아닌, 또한 3인칭의 어느 '이름'이 아닌 '나'(클라우스)가 화자가 되는데, 이러한 형식 자체가 이미 분화된 혹은 단절된 쌍둥이의 의식 상태를 의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 단절을 조금 확장하면, 결국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제가 '세 번째 거짓말'인 3부에서 세 번째 거짓말은 '나는 너가 아니다.'라는 당연한 전제로부터 비롯된다. 가령, 병원에서 요양 중인 아이들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부모의 따뜻한 애정이 충만해 있는 것 같지만, 클라우스가 다시 멋대로 바꾸어 읽어주는 편지에는 잔인하고 냉정한 말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설령 거짓일지라도 따뜻한 애정을 갈구하지만, 내가 원하는 감정이 상대에 의해서도 똑같이 공유된다는 믿음은 근본적으로 거짓말을 야기한다. 마찬가지로, 평생 서로 함께 하기를 원했던 사라와 클라우스의 감정도, 루카스를 끊임없이 미화시키며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감정도, 다시 함께 하기를 원하는 루카스의 바람도 그래서 진실과는 멀어진다. 이는 결국 '나'의 존재는 '너'의 존재와는 다른 까닭이며, 이러한 '단절'은 현실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인쇄소에서 찍어내는 "우리는 자유다."라는 표어가 상징하듯,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냉소적인 은유로도 읽힌다.

진실 하나 - 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책 뒤에 수록된 '작가와 작품해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들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독자 또한 마찬가지다. 비록 그 체험들이 먼 이국의 역사적 배경 하에서 하나 같이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비추고 있는 것일지라도, 작품 속 인물들의 체험에 공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은밀하게 자리한 추악한 비밀과 타인에 의해 강요되는 폭력과 근본적인 단절로 인한 고독 등, 인간의 존재가 초래한 그 어떤 일이든(혹은 그 어떤 거짓말이든), 그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와 경험 속에서 이미 증명된 것에 다름 아니므로. 그리고, 그렇기에 그러한 체험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는 말이야말로 가장 터무니없는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헝가리가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옛 마자르 격언에는 'Temetni tudunk'라는 말이 있다. 영어 단어 10개로도 완전한 번역이 어려운 이 말은 대체로 이렇게 번역된다고 한다. "사람을 어떻게 매장할까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물론 되풀이된 헝가리의 폭력과 파괴의 역사 속에서 끌어올린 이 말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간의 존재가 지닌 모순과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이 격언은 어쩐지 요긴할 것 같다. 그러니까 이 격언을 살짝 바꾸어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는 의미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ㅡ그것은 우리가 아는 사항이다." 설령 그 세 가지 거짓말이 얼마나 참혹하고 적나라한 것이든, 그것이 우리가 이미 아는 사실이라는 것만큼은 명백한 진실이 아닐까. 그 진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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