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라는, 제목만 봐도 잠 깨나 올 것 같은 책을 감히 집어든 건 내가 그 무렵 잠을 잘 못 자고 있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일단 이 책이 집에 굴러다니고 있었던 데다(물론 내가 사 놓은 건 아니다) 책도 퍽 가벼웠던 점을(물론 단지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이유로 들 수 있겠는데, 이런 없어 보이는 이유가 별로라면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올림픽의 몸값>이 이 책을 집어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말해도 좋겠다. 과연 일본의 도쿄 올림픽 개최를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위협하며 '올림픽의 몸값'을 요구하는, 소설 속 주인공 시마자키 구니오를 단지 '아나키스트'라는 하나의 단어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악당과 정의의 사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듯한 주인공의 행보를 보자니 '위험'과 '매력'을 동시에 풍기는 듯한 '아나키스트'에게도 약간이나마 관심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하여 슬며시 집어든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는 솔직히 내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얄팍한 책임에도 진도는 잘 나가지 않았고, 특히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어떤 '위험한 매력'을 드러내는 데에도 충분치 않았다. 본래 잠 못 들어 고민하는 일도 드물었으니 수면제로 유용하지 않았음도 물론이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이건 책이 나빴다거나 혹은 형편없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아나키즘에 관한한 문외한에 가깝다). 다만 소설 속 주인공에게서 아나키스트의 면모를 보고, 아니 아마도 아나키스트의 면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 따위를 하다가 책장 한쪽에 꼽혀있는 '아나키스트' 어쩌고저쩌고 하는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는, 더욱이 그 책이 비교적 얄팍하기에 내심 반가워하며 그보다 더 얄팍한 마음으로 책을 펼쳐든, 그러니까 이건 애당초 접근방향이 사뭇 달랐던 한 독자의 가벼운 불평일 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벼운 접근에 따른 가벼운 실망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이 없지 않은데, 아나키즘을 단순히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건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과 그 자체로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는 몇몇 아나키스트들이 남긴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올림픽의 몸값>의 시마자키 구니오의 위험한 행보를 독자가 은연중 응원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이 책에서 찾았다는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민중은 권력에 쉽게 굴복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숭배하지는 않는다."(p7) ㅡ바쿠닌ㅡ
"군비와 전쟁은 오늘날의 국가가 자본주의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철의 장벽이며, 대다수의 인류는 이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다."(p29) ㅡ고토쿠 슈스이ㅡ
"천황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인간의 신체, 생명, 재산, 자유를 끊임없이 침해하고, 유린하고, 겁탈하고, 위협하는 조직적 대강도단이다. 대규모 약탈주식회사이다. 법률은 국가라는 대강도단과 약탈회사 주주들의 대표자회이다. 천황과 국가란 이들 강도단과 약탈회사의 우상이며 신단이다."(p125) ㅡ박열ㅡ
"천황은 일본에서 태어난 인간에게 최대의 모욕이며, 천황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것은 국민이 노예임을 의미하는 것"(p125) ㅡ가네코 아야코ㅡ

사실 <올림픽의 몸값>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는 결코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는 주경기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겠다는 건 미친 짓이며, 특히나 소설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보면 더욱더 그러하다. 예컨대, 경시청 소속의 형사 오치아이 마사오는 시민의 안전과 경찰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국가의 위신을 위해 시마자키 구니오를 잡으려 노력한다. 그는 올림픽 개막식이 둘째 아이의 출산예정일인 한 아내의 남편이자 이제 막 건설된 아파트에 새로 입주한 가장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며, 따라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성공은 곧 오치아이 마사오의 임무 실패를 의미한다. 또한 올림픽 경비 책임자의 둘째 아들이자 시마자키 구니오의 대학 동문이기도 한 스가 다다시라든지,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는 헌책방 집 딸 고바야시 요시코의 입장에서도 시마자키 구니오의 테러 시도는 이해와 응원의 대상은 아니다. 각각 올림픽 이후 새로운 일본의 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이들과 시마자키 구니오 사이에는 서로 넘을 수 없는 큰 강이 존재하는 셈이다.

더군다나 이들 주요 등장인물들뿐만이 아니라 책 속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이 한결같이 올림픽 개최 성공을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 시마자키 구니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다. 전후의 힘겨운 시기를 지나 세계가 지켜보는 올림픽 개최를 맞이하여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올림픽을 들뜬 마음으로 보러 나가는 고바야시 요시코의 할머니랄지, 혹은 입으로는 올림픽 개최의 국가 총동원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은근히 올림픽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과격 학생운동 단체랄지, 혹은 심지어 올림픽 기간 동안 자발적으로 조직원들을 산으로 피하게 하는 도쿄의 야쿠자 두목까지, 올림픽 성공개최를 희망하는 절대 다수 일본 국민들의 모습까지 감안하면 이제 시마자키 구니오의 편에는 오직 그의 동료인, 소매치기 무라타 도메키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심지어 무라타조차도 올림픽의 성공을 방해하는 일은 꺼려하니, 과연 이런 상황에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동이 티끌만큼이나마 '정의'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과격하고 고독한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긍정하게 만드는 것은 공안요원 야노로 대표되는 '국가'의 존재다. 공공의 이익 혹은 국가를 우선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에게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국가의 폭압적인 수단들, 사소한 소수의 희생 따위는 더 큰 대의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국가의 인식이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일정부분 정당하게 만든다. 시마자키 구니오는 올림픽 경기장을 빨리 건설하기 위한 '속도전' 속에서 희생되는 노동자들을 목격하고, 그런 희생을 무심히 보아 넘기는 세상을 경험한다. 그가 최대한 인명 피해가 없게 하며 벌인 일련의 폭탄 테러는 완벽한 국가의 통제 아래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그 사건은 단지 폭발을 직접 목격한 일부의 환상으로만 남는다.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오직 유일무이한 목표를 위해서는 어떠한 반대 의견이나 비판 그리고 흠집이나 우려도 용납되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서 시마자키 구니오가 좀 더 과격한 테러를 시도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인 것이다.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에서 말하듯, 시마자키 구니오에게 있어 "테러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행동을 통한 선전' 수단의 하나"였고, 결국 "테러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도덕성과 희생을 담보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알기에 독자는 시마자키 구니오의 행보를 은연중 응원하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남쪽으로 튀어>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쿠다 히데오는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일방적으로 어느 하나가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시마자키 구니오 외의 다른 주요 등장인물은 그들이 서있는 지점에서, 전후 올림픽 개최에 성공하며 바야흐로 새로운 시기를 향해 나아가는 일본을 나름대로 충실히 살아내고 있고, 이들에 대한 오쿠다 히데오의 시선은 시마자키 구니오를 향한 시선과 비교해 더 따뜻하지도 혹은 더 차갑지도 않다. 다만 오쿠다 히데오는 '역자후기'에서 역자가 말하듯, "국가 권력이 철저히 은폐해버린 단 한 명의 이질분자를 훌륭하게 발굴"해 내었고, 그리하여 진정한 '올림픽의 몸값'의 베일을 벗겨내는 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올림픽으로 대표되는, '국익'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바는 모두가 다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올림픽의 몸값'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의미가 있는 법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이때 '올림픽의 몸값'이란 시마자키 구니오가 국가에 제시한 8천만 엔이 아니라,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이면에서 힘든 노동을 강요당하는 민중의 희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덧붙여 이를 은폐하는 '국가'가 별로 좋은 놈만은 아닌 것도 크게 의심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뭐, 2011년의 '대한민국'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어쨌거나 소설적 재미와 현실의 무게를 적절히 배합할 줄 아는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은 이 소설에서도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노동자의 목숨이란 얼마나 값싼 것인가. 지배층이 민중을 바라보는 시선은, 19년 전에 본토 결전을 상정하고 '1억 국민이 모두 불꽃으로 타오르자' 라고 몰아치던 시절 그대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민중은 한낱 장기 말로만 취급되고,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는 그게 전쟁이었고, 이제 그것은 경제발전이다. 도쿄올림픽은 그 헛된 구호를 위해 높이 쳐든 깃발이었다." (1권 p386)

"날마다 소금땀 흘리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집 한 채 못 가진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2권 p96)

한편, 이번에 읽은 또 다른 책들로는 <축구의 문화사>와 <보통의 존재>가 있다. 먼저 <축구의 문화사>는 유럽의 몇몇 축구리그의 라이벌전들을, 그 유래와 역사 등과 관련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책이다. 얇은 책인 만큼 '문화사'라는 제목에 걸맞을 만큼 깊은 주제를 다룬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축구팬들에게 비교적 익숙한 라이벌전들을 다루면서도 단순히 알려진 사실의 정리 수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 같다. 그리고 <보통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미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여기서는 '공감'과 관련해서 짧게 언급하는 게 낫겠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느끼는 '공감'이라는 건 많은 경우 '이해'나 '납득'의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보통의 존재>는 정말 문자 그대로 '공감'하며 읽었다. 그렇게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을 읽는 기쁨이 작지 않았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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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종종 이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로 회자되곤 하는데, 이는 아마도 아빠들의 가여운 기대를 차마 야멸치게 잘라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와 엄마 중에 누가 더 좋냐니? 바른대로 말해서 이런 한숨 나올 만큼 쉬운 질문이 세상에 또 있단 말인가. 단언하건대 나는 두 가지 대상 중에 더 좋고 덜한 것이 있음을 인식한 이후로 줄곧,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했다. 나를 세상에 내어놓고 먹인 것도, 입힌 것도, 기른 것도 엄마였으니, 어쩌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줄곧 나는 엄마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빠라고 해서 나를 위해 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비교 대상이 '엄마'라면, '아빠'에게는 불행하게도, 절대로 승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한 초등학생의 주옥같은 시('아빠는 왜')는, 기실 많은 이들이 알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 진실을 거침없이 폭로하여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은근슬쩍 엄마와 비교대상이 되면서, 설령 엄마보다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엄마 다음쯤은 될 것이라는 아빠들의 기대는 도덕 교과서와 같은 철저한 진실성으로 무장한 한 초등학생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도덕적이고 명민한 초등학생의 시에 따르면, 아빠는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멍멍이나 냉장고보다도 못한 존재로 드러났는데, 돌이켜 보면 확실히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아빠보다는 변신합체로봇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아빠는 그게 불만이었던지 어느 날 내 변신합체로봇을 집어 던져서 변신합체로봇이 더 이상 변신도 합체도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게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었음은 금세 분명해졌다. 결국 아빠는 변신합체'불가'로봇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했으니까. 

<아빠는 왜?>

엄마가 있어 좋다. / 나를 예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빠가 언제나 변신합체'불가'로봇보다도 못한 존재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 또 모든 아빠가 냉장고나 멍멍이보다도 못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빠를 엄마와 비교하려는 건 그야말로 아빠의 언감생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아빠에 관한 서글픈 진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혹은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라고 해도 피해 가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예컨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 <여보, 나좀 도와줘>를 보면 그는 아내의 항의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아내가 나를 구박할 때는 언제나 아이들 이야기를 내세운다. '아이들을 위해서 관심 가져 본 적이 있느냐.' '아버지 노릇한 거 뭐 있느냐.'는 거다." 엄마들이 서슴없이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아빠들에게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건 엄마들이 아이들과의 특별한 유대를 확고히 자신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엄마의 관심과 애정이 아빠에 비해 얼마나 월등한 것인지를 분명히 증명한다. 이런 사정은 아빠가 나중에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런가 하면 다산 정약용의 서간문을 모은 책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산의 높은 의기와 절개 그리고 뛰어난 학식과 인품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좋아하긴 어려운 아버지로군,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편지에서 다산은 아들들에게 이런 저런 '지극히 옳고 유교적인' 조언들을 하는데, 문제는 이 '지극히 옳고 유교적인' 조언이 지나칠 정도로 이상적이라 종종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라는 데 있다. 편지마다 효와 예를 언급하고 학문에 힘쓰기를 권하며 과제를 잔뜩 내주는 건 분명 마냥 불만을 쏟아내기 어려운 아버지의 가르침이라 할 만하지만, 벼슬길이 막힌 '폐족(廢族)'의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유별난 결기는 때로 원망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런 편지를 보내주는 아버지를 그저 좋아만 할 수 있을까.

네가 양계(養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란 참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것에도 품위 있는 것과 비천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중략)...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내어 차례로 정리하여 계경(鷄經) 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육우(陸羽)라는 사람의 <다경(茶經)>,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의 <연경(煙經)> 같은 서적처럼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속사(俗事)에 종사하면서도 선비의 깨끗한 취미를 갖고 지내려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p82)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 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말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p148)

물론, 나는 다산의 아들이 아니니 이런 편지를 받은 다산의 아들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니 미루어 짐작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할 요량으로 이제 닭을 기르려 하는데, 거기에서도 품위를 찾으며 책을 저술하기를 권하고, 더군다나 당장 가난한 마당에 '근'자와 '검'자가 기름진 땅보다 낫다는 데에는, 솔직히 너무 태평한 소리를 한다는 마음이 아주 없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시는 예를 말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인정을 살피십시오."라고 한 다산의 아내의 편지 한 구절은 다산의 '예'로 가득한 편지와 얼마나 비교가 되는지. 만약 다산이 우리 아버지였다면 내가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중에는,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불초하여 아버지를 편안히 모시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로써 아버지를 모시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한 글자는 건(健)이고 또 한 글자는 강(康)입니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음식이나 편안한 의복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농담만도 아니다. 어쨌건 다산이 나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 서로에게 다행스러운 일임은 분명하고, 아이들이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기 어려운 건 더욱 분명하다.

다산이 둘째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면 다산이 집주인 노파와의 문답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노파는 다산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인데 이런 뜻을 아시는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는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도록 했고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으며 복(服)을 입을 경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는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해 버리도록 하였으니 이거 너무 편파적이 아닌가요?" 다산과 노파는 성인의 말씀을 지극한 것으로 여겨 그에 맞도록 해석을 하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성인들이 모두 아버지이기 때문으로, 그들은 그런 예법을 애써 마련해 두지 않으면 아버지의 위치가 이내 땅에 떨어질 것임을 잘 헤아렸던 것이 틀림없다(오늘날 세계적으로 어머니날이 성행하는 것과 달리 아버지날은 썰렁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라). 요컨대 심지어 성인이라 할지라도, 역시나 엄마에게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본래 아버지들이 엄마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해서 아버지들이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엄마보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는 어려워도, 여전히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있다. 가령, 딸과 함께 유럽으로 사진여행을 떠나는 아버지라면 어떻겠는가. 함께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으며 "인생의 선배로서, 같은 사진의 길을 가는 동료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딸을 이끌어주고 또 딸의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아버지라면 참으로 든든하지 않을까(<사진가의 여행법>). 스스로 "나는 아이들로부터 존경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수치감을 준 일도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아버지라면 또 어떤가. 아이들에게 위선만큼 해로운 게 없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아버지를 아이들이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여보, 나좀 도와줘>). 또한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내가 귀양이 풀려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일은 참으로 큰일은 큰일이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극히 잗다란 일이다."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아버지를 마음 깊이 우러르지 않을 수 있을까(<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그리하여 이미 아버지를 든든히 여기고 존경하며 마음 깊이 우러른다면, 어찌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아빠의 경쟁상대가 엄마가 아니라, 실은 멍멍이나 냉장고라는 건 꽤나 가혹한 진실이지만, 그렇다고 낙심하여 결국 멍멍이나 냉장고에게조차 뒤처지는 건 더욱 더 가혹한 노릇이다. 적어도 그 꼴이나마 피하려면 역시나 나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함은 자명하며, 게다 잘 생각해 보면 멍멍이나 냉장고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쨌거나 멍멍이나 냉장고는 엄마 다음으로 시에서 언급될 정도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면, 멍멍이나 냉장고만큼만 해도 엄마 다음쯤은 될 수 있다는 얘기고, 끝내 멍멍이나 냉장고를 제칠 수 있다면 스스로 꽤 좋은 아빠임을 자부해도 좋으리라. 물론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그러나 실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이 보지 못하는 아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항변이 마음속에 사무치지 않을 리 없겠지만, 어쩌랴. 아이가 자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아이가 자라서 지니게 될 시선은 다름 아닌 지금의 시간 속에서 잉태되는 것임에야. 그러니 아무쪼록, 아빠들의 건투를 비는 바이다. 아이가 자라면 그때는 너무 늦다.

덧. 아다치 미츠루의 <크로스 게임>이 어느 틈엔가 완결이 된 걸 알고 다시 한꺼번에 몰아서 보았다. 역시나 재미있긴 했는데, 굳이 <크로스 게임>을 <터치>나 <H2>와 비교하자면 이는 마치 아빠를 엄마에 비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해 그건 무리라는 얘기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크로스 게임>에 대한 폄하가 될 수는 없다. 비교대상이 '엄마'나 마찬가지인 <터치>와 <H2>라는 건 너무 사정없이 높은 잣대니까. 그저 이 대목에서는 '엄마'를 둘(혹은 셋-<러프>도 훌륭하다)이나 세상에 내어놓은 아다치 미츠루의 능력에 새삼 경탄할 따름이다(아, <크로스 게임>도 물론 괜찮다. '엄마'는 아니지만 좋은 '아빠'쯤은 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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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에 저자의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는 데에는 대체로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해당 책이 다름 아닌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책에서 풀어내는 내용과 관련된 분야에서 저자가 상당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경우이다. 이러한 구분 하에서 보자면 지난 7월과 8월, 이 두 달 동안에 읽었던 책 중에서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와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 그리고 <진산 무협 단편집>은 모두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존 듀어든은 한국 축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따뜻한 애정이 공존하는 칼럼으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저자이고, 빌 브라이슨은 약간의 과장과 주관이 개입되어 있는 표현이긴 해도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기를 쓰는" 저자이며, 진산은 상당한 이견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단편 무협'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들을 읽은 건 순전히 그 세 사람의 이름 덕택이었던 셈이다.

존 듀어든이 '한국축구'에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 날아온 파란 눈의 사람이 하필 '한국축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데 대해 까닭모를 반감이 생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글을 지속적으로 읽어보다 보면 그가 '한국축구'에 대해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그래서 그의 날선 비판들에조차도 고마운 마음이 들곤 할 정도다. 단적인 증거로, <존 듀어든의 거침없는 한국축구>에는 'K리그'가 한 100번쯤 언급되는데(실제로 세어 보지 못해서 장담은 못하겠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그 정도쯤 되는 것 같다), 과연 세상의 그 어느 책에서 'K리그'라는 단어를 이렇게까지 많이 볼 수 있겠는가. 이쯤 되면 'K리그'를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데에 이 책을 강제로 읽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진정 애정 어린 비판을 보여주는 존 듀어든의 글이 축구팬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부 (높은 자리에 있는) 축구관련 종사자들에게는 그의 글이 그리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유감스럽다. 얼마 전 울산의 김호곤 감독은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해 존 듀어든의 칼럼에 화가 나서는 그를 고소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런 일화는 존 듀어든의 날카로운 펜에 대응하는 일부 축구인들의 고압적인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존 듀어든의 글이 언제나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존 듀어든의 비판에 대해 김호곤 감독도 얼마든지 지면을 통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극단적인 방식을 고려한다는 게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간다). 이와 관련해 존 듀어든은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지적을 하는데, 이 지적은 축구 종사자들과 언론인 모두 새겨들을 만하며(비단 축구계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축구팬들이 그의 글이라면 덮어 놓고 신뢰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쓰지는 말라"는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왜 안 되는 건가? 그들의 요점은 내가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만 써야 한다는 것인 듯하다.
한국 축구계의 지도자들과 언론이 편안하고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국 축구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다. 서로를 위해서는 좋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실패하고 바보처럼 행동해도 비난을 받지 않으며, 기자들은 유명 인사들과 꾸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물론 나는 영국에서 왔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측면도 있다. 또한 영국이나 유럽에서 보던 언론과 대표팀의 극한 상황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비판도 없고 토론도 없는 세상은 감독들에게는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축구 전체를 위해서는 결코 건강한 일이 아니다. (p253)

물론 감독들은 언론에 대한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하지만 축구와 언론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도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언론은 감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팬들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서 선수, 감독들이 내 기사를 좋아한다면 기분이 괜찮겠지만, 그들이 내 글을 싫어한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축구계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내 글을 좋아한다면, 오히려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것 같다. (p430) 

다른 모든 일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 역시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보기 위해 모인 6만 5000명의 관중들은 맨유와의 친선전이 한국 축구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일인 양 기뻐할 것이고, 언론들은 맨유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기사로 만들어 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내가 한국에서 접한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다. 내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축구 팬으로서 이번 일이 흘러온 모습에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것은 한국 축구계를 이끌어나가는 힘 있는 분들께서 보여준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태도였던 것 같다. (p453)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국산책>은 기대보다는 못했다.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지난 해 알라딘의 '올해의 저자' 투표에서 기꺼이 빌 브라이슨에게 표를 던진 바 있는데, 이것은 내가 빌 브라이슨의 책을 좋아한다는 것과 그렇기에 빌 브라이슨의 책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 높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다. 정당하게 말하자면, 빌 브라이슨의 영국 여행기도 나쁘지는 않았다. 초반에는 약간 지루한 느낌도 있었고 그가 즐겨하는 일 중 하나인 언어유희도 별로 재미있지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책이 흥미로워졌다. 그가 사물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 각 도시들을 여행하는 방식에 익숙해질수록 그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기 시작했고, 특히 커다란 나라에서 온 그가 지난 20여 년간 산, 작은 섬나라 영국이 지닌 매력들을 하나하나 짚어줄 때쯤엔-그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그러했듯-결국 때로는 악의적이라고까지 느껴지는 독설을 서슴지 않는 이 저자를 내가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여전히 과장과 허풍을 일삼고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살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로 이따금 드러나는 그의 통찰과 따뜻함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도.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읽은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과 비교하면 역시 이 책이 상대적으로 더 지루하고 집중이 안 되었던 건 사실인데, 여기에는 이 번역된 책 자체의 책임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하건대'를 '-하건데'로, '개중에는'과 '대개'를 마치 '게'가 좋아 미치겠다는 듯한 태도로 각각 '게 중에는'과 '대게'로 고집하고 있는 걸 우선 지적할 수 있겠다('대게'는 족히 수십 번쯤 쓰이는데, 책에서는 단 한 번도 그게 '큰 게'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지 않는다). 물론, '게 중에는' 역시 '대게'가 최고라는 데에 동의하거니와, '개'보다는 '게'를 사랑하는 누군가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할 뿐더러, 무엇보다도 나는 모든 책이 국어맞춤법을 완벽하게 준수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생각도 없다(물론 가급적 그러면 좋겠지만, 그러기에 국어는 지나치게 까다롭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그러나 아주 약간의 주의만 기울이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오류들이 지나치게 빈번하게 나타나는 책에서 정확하고 매끄럽게 번역된 문장들이 이어질 거라고 믿는 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고는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과연 실제로도 그랬다.

내가 집중하며 읽은 책 후반부에서 나는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널따란 부지가 있었다."나 "입김을 크게 불어 휙 날려버리고 건물들이 있다."와 같은 명백히 틀린 문장들을 더러 발견했고, 그러자 새삼 앞부분을 집중하지 못하고 읽었던 건 순전히 앞부분에 모호하고 틀린 문장들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오류가 심각하거나 완전히 엉망진창이라거나 할 정도는 아니지만, 역시 가벼이 볼 것도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의 관계자 분들은 이 책이 몇 번씩 거듭해서 읽을 만큼 재미있지는 않아서 그냥 한 번 보는 것으로 대충 교정을 갈음하고는 서둘러 출간을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적어도 만약 나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거듭 읽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한 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그게 이 책의 유감스러운 점이다.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서 조금 긍정적인 이야기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만약 누군가 혹 이 책을 통해 빌 브라이슨을 처음 접한다면, 부디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책은 빌 브라이슨의 매력을 드러내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이 책으로 빌 브라이슨과 만나자마자 곧 안녕이라고 작별을 고하는 것은 조금 이르다는 말이다. 특히 누군가 이 책을 중간쯤 읽다가 집어던져버렸다면, 다시 집어 들기를 권하는 바이다. 뒤로 갈수록 이 책은 좀 더 재미있어질 뿐더러, 책의 후반부에는 실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될 법한 대화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매번 불필요한 메뉴를 권하는 점원의 입을 막게 하는 것은 물론, 종교나 신문을 강권하는 사람에게도 응용하여 써먹을 수 있는 기가 막힌 기술이다. 다만,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과감성이 필요해 보이는데, 다행히 평생 한 번이라도 이 대화를 써먹을 수 있다면 삶이 좀 더 흥미진진해질 것 같을 정도다. 사설이 길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다음에 인용하는 대목 하나만으로도 빌 브라이슨의 이 책은 용서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책이 나쁘지 않은 이유가 단지 이것 하나만이 아님도 물론이다).

마침내 커피 한 잔과 에그 맥머핀을 주문하는데 내 주문을 받던 젊은 남자가 물었다.
"애플 턴오버 파이도 함께 드시겠어요?"
나는 잠깐 동안 질문 당사자를 쳐다보았다.
"죄송한데, 내가 머리에 총 맞은 사람처럼 보이오?"
"네?"
"내 말이 틀린 데가 있으면 틀렸다고 이야기를 해요. 내가 애플 턴오버 파이를 주문했었던가요?"
"어..., 아니세요."
"그럼 내가 애플파이를 먹고 싶어 하면서도 주문을 못하는 지적장애로 보이오?"
"아니. 저희는 그저 모든 손님들께 그런 질문을 하라고 지시를 받았어요."
"애든버러에 있는 사람들은 다 머리를 다쳤답니까?"
"저희는 그냥 손님들께 더 여쭈어 보라는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뭐, 좋아요. 나는 애플파이를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주문을 안 했죠. 자, 그럼 이번엔 또 어떤 음식을 안 먹을 건지가 궁금한가요?" (p388-389)
 

<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는 특히나 진산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집어 들기 어려운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 권은 기본이고, 언젠가부터 대여섯 권도 훌쩍 넘기기가 예사인 무협이라는 장르에서 '단편 무협'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그 '단편 무협'을 '진산'이 썼다면 얘기가 조금은 달라진다. 이 '단편 무협집'이 거의 유일무이한 경우이니 구체적인 비교는 어렵겠지만, 나는 '단편 무협'에 가장 어울리는 작가는 단연코 진산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이 책은 유려하고 서정적인 진산의 스타일이 매력적으로 드러나는 책이었다. 단지 몇몇 단편의 경우에 다소 뻔한 결말이 조금 아쉬운 느낌도 있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역시나 자연스럽고 괜찮은 결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결말이야 어쨌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진산의 글쓰기 솜씨는 정말로 발군이다. 한때 충성스러웠던 무협 팬으로서, 이 멋진 스타일의 '무협 작가'가 현재 무협을 떠나 있다는 게 정녕 아쉽다.

이제까지 언급했던 책들이 모두 작가의 이름을 믿고 읽은 책인 것과 달리,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는 순전히 흥미를 끄는 제목과 내용 때문에 읽은 책이다. 하지만 정작 책을 읽고 나서는 오히려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에게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다. 물론, 책에 대한 만족과 저자에 대한 호감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지만, 요네하라 마리의 경우에는 좀 더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 속에서 한결같이 느껴지는 따뜻함과 올곧음, 그리고 간간히 드러나는 엄격함과 엉뚱하고 싱그러운 유머감각까지. 이런 매력들이 글로 오롯이 나타난다는 점도 대단하지만, 이런 매력들이 전적으로 요네하라 마리 본인에게서 기인한다는 점은 더욱 대단하다. 설령 책에서 큰 만족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이런 저자에게는 역시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이런 저자의 글이 만족스럽지 않기도 어렵겠지만). 앞으로 요네하라 마리의 다른 책을 만나는 일에 대한 기대가 크다.

끝으로 오타니 준코의 글에 오타니 에이지의 사진을 실은 <다이고로야, 고마워>는 괜찮은 책이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원숭이 다이고로가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생애를 있는 힘껏 살아내는 모습도 적지 않은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특히 그런 다이고로를 가족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한 가족의 모습은 더욱 감동적이었다. 곧 죽을지 모르는 다이고로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로 받아들이는 아버지 오타니 에이지로와, 자신의 몸조차 힘든 와중에도 다이고로에게 애정을 다하는 어머니 오타니 준코, 그리고 장애를 지닌 다이고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주는 아이들. 그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엮어내는, 의지와 애정이 가득한 삶의 모습을 보는 건 실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사 읽은 데에는 무엇보다도 반값 할인이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나는 160여 페이지에 큼지막한 글자 크기를 자랑하는 이 책의 본래 가격에 대해서는 조금 불만이 있다. 生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시켜 준 다이고로가 고맙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얇은 책들이 그 몸집을 불릴 요량으로 양장을 입는 건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어도, 그게 다이고로를 더욱 기리기 위함이나 혹은 다이고로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이 아닌 한. 

그나저나 연초에 세웠던 세심하고 사려 깊은 내 '독서계획'에 따르면, 본래 지난 7월과 8월에는 각각 <슬픈 미나마타>와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를 읽어야 했다. 하지만 역시나 '계획'이 본래 그렇듯, 6월에 어긋나기 시작한 올해의 '독서계획'은 태풍과 함께 완전히 방향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이래서야 과연 애초 계획의 절반 수준이나마 달성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데, 이제서야 말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관심을 끄는 책들은 계속해서 늘어나게 마련이니 연초의 '독서계획'이란 건 태생부터 사뭇 미련하고 융통성 없는 어리석은 짓에 다름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이제부터 '독서계획'을 대놓고 무시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역시 '독서계획'은 그저 거들 뿐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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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그런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헤아려 보니 월드컵이 임박했던 5월과 월드컵이 개막했던 6월, 이 두 달 동안에는 특히 축구 관련 서적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사놓고 계속 쌓아두기만 했던 <축구장을 보호하라>를 마침내 읽었고, 꽤 만만치 않은 값을 치르고 <월드컵 1930-2010>을 사 보았으며, 계속해서 관심만 두고 있던 <일본인과 천황>(이 책은 사실 '축구'라는 카테고리로만 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도 드디어 사 보았다. 게다가 장원재의 <유럽축구에 길을 묻다>는 심지어 두 권을 사기까지 했으니ㅡ물론 그 이유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들고 간 이 책을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 가방에 넣은 채 홀연히 작별을 고하고 돌아 온데다, 다행히 책값이 비싸지 않았기 때문이지만ㅡ확실히 이런 자세는 월드컵을 맞이하는 축구팬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자평할 만하다(와중에 박상의 야구소설 <말이 되냐>를 읽은 것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일단 물량으로 압도하는 형국이니 지난 두 달 간 읽은 몇 안 되는 책들 중에서 탁월했던 건 역시 축구 관련 서적으로, 정윤수의 <축구장을 보호하라>와 헤르만 악셀의 <월드컵 1930-2010>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정윤수의 책 같은 경우에는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책이 월드컵을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을까 짐작했었는데, 정작 이 책은 몇몇 월드컵의 비순수성을 지적하기는 해도 대체로 여전히 계속되는 월드컵의 순수성을 예찬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이것은 기존의 내 마음마저 바꾸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월드컵을 꽤나 못마땅해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월드컵을 마음껏 즐기되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 쪽으로 선회했고, 이것은 결국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의외로 월드컵이 훨씬 즐거워지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알려준 건, '월드컵은 일단 즐길 만한 세계적인 이벤트다'라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책은 2002년 월드컵을 다양한 문화적,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해내며 2002년 월드컵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재생해 놓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풍성한 수사에 대한 약간의 강박관념과 환원주의적 오류(비록 저자가 이를 경계함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이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2002년 월드컵에 관한 책들 중에서는 세계를 둘러봐도 이보다 더 나은 책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한편, <축구장을 보호하라>가 다양한 스펙트럼과 세심히 쓴 듯한 문장으로 즐거움을 주었다면, <월드컵 1930-2010>은 흥미로운 시선과 재기 넘치는 그림으로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이 책의 출판사에서는 책을 사자마자 곧 책 가격이 떨어진 걸 조금 억울해 하던 내게, 알지도 못했던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박지성 사인본'으로 한 권을 더 주겠다고 연락을 해 와서 나를 기쁘게 했는데, 사실을 말하면 나는 박지성 사인본을 받게 되는 것과 책값이 2분의 1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점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욱 마음에 드는 건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이건 실제로 사인본 책을 받아봐야 알겠는데, 불행히도 이후 출판사에서는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가타부타 말이 없고, 들리는 소식으로는 박지성이 한국에 들어왔다지만 그게 내가 받을 책에 사인을 해주기 위한 목적은 아닌 것 같으니, 과연 내가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출판사에서는 박지성의 사인을 이제부터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는데,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아무쪼록 그 일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장원재의 <유럽축구에 길을 묻다>는 책보다도 저자가 <100분 토론>에 나온 것이 더욱 인상 깊었다. 장원재는 지난 6월 10일, "다시 월드컵! '광장'을 말하다"를 주제로 한 <100분 토론>에서 패널로 출연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어퍼컷>의 저자인 정희준이 함께 출연하면서 나는 당시 근자에 읽었던 두 책의 저자의 모습과 육성을 TV로 확인하는 셈이 되었다. 그런데 장원재는 정희준과 나란히 앉은 진중권의 반대편에 앉아서 꽤나 유감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중권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언제나' 악당이었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게 문제다. 그 토론에서 장원재는 악당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악당이군 하는 생각이 드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덕분에 장원재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사라져버렸다. 물론 저자의 정치적 성향(그것도 극히 부분적인)으로 저자의 책을 예단하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건 이후에 장원재의 신간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가 나온 걸 알았을 때 나는 간단히 그 책을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실은 알라딘에서는 그 책의 저자를 '정원재'라고 잘못 표기해 놓고 있었는데, 나는 이걸 결코 신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인지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장원재든 정원재든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말이다(하지만 내가 앞으로 장원재의 책을 절대로 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는 제법 많은 축구 관련 서적의 저자다).

마지막으로, <맛의 달인>의 원작자인 카리야 테츠가 쓴 <일본인과 천황>은 솔직히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사실 이 책은 예전에 축구잡지에 소개되어 관심을 가졌었는데, 줄거리만 보자면 '축구 관련 서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더욱이 일단은 '만화책'이다. 간략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일본 도토 대학 축구부의 스미카와 준이 전 일본 대학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국가 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주인공도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의 역할은 주로 천황제의 해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교 이사장의 말을 '들어' 주는 것으로, 가령 이사장이 "'교육칙어가 일본인을 속박해왔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리라도 들은 듯이 깜짝 놀라서는 앵무새처럼 이사장의 말을 되풀이한다. 또한 질문은 언제나 이사장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질문만 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럴 바에야 그냥 이사장이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다. 물론, 기실 이 책의 목적은 천황제의 해악에 대해 저자가 이사장의 입을 빌어 비판하는 것이고, 그러니 이런 방식인 건 한편으로 당연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개성 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스토리가 그닥 중요하지 않은 만화에 재미를 기대하기란 확실히 어려운 것도 또한 당연하다. 더욱이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일본의 역사적 사건과 제도 등에 관련된 각주들도 대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만화책'이 맞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용의 진정성을 따지자면 이 책은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천황제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바라고 썼다는 이 책은 천황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점들을 거듭 짚어주면서 최대한 독자들이 쉽게 그리고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는 게 느껴진다(그럼에도 그게 쉽지 않다고 느끼는 건 독자 탓도 있겠지만). 더욱이 기본적으로는 이 책의 대상이 당연히 일본인들, 특히 천황제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일본의 현 젊은 세대들이겠지만, 저자의 비판은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과 관련해서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가령, 사회 내에 만연한 엄격하고 기계적인 상하관계라든지, 인맥과 학연이 무시 못 할 힘으로 작용한다든지, 혹은 천황으로 대변되는 어떤 '상징'을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손쉽게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든지 등의 모습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만은 않거니와, 특히 '천황'을 '국가'로 대치해서 보자면 결국 그러한 시스템과 제도가 '개인'의 건강하고 자유로운 의식과 행동을 의도적으로 통제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추천사에서 김규항이 지적하듯이, "천황제의 특징은 천황을 신처럼 떠받들면서도 정작 천황이 누구인가는 상관이 없다는 데 있고", 따라서 "우리 안의 천황제"를 직시하고 경계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의문 하나는 왜 천황제가 없는 우리나라가 '천황제'의 해악을 그대로 답습하는가가 아닐까 싶은데, 이와 관련해서는 <포포투>의 한 구절을 곱씹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포포투>는 이제 내게 마치 밥상의 김치와 비슷하고, 그런 이유로 <포포투>를 보았다고 굳이 언급하는 건 오늘 점심에 김치를 먹었다고 말하는 것만큼 불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포포투>를 읽고 나서도 가끔은 그 안의 몇몇 대목을 굳이 어딘가에 옮겨 적어 놓고 싶은 때가 있고, 바로 지금도 그러하다. <포포투>에 칼럼을 연재하는 사이먼 쿠퍼는 '왜 잉글랜드를 응원하나'라는 제하의 칼럼(<포포투> 6월호)에서 케냐의 작가 은구기와 티옹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그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나 또한 그의 말로 이 글을 끝내는 게 꽤나 적절할 듯하다. 물론, 그의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 안의 천황제"를 마주하는 데 있어서 티옹오의 말이 중요한 밑그림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정복이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가치에 대해 칭송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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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의 상을 한 준수한 얼굴은 육색(肉色)에 윤기가 역력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자못 삼엄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압도해버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 역정이 이 작은 화폭에 완벽하게 담겨 있다. (p58)

<화인 열전> '공재 윤두서' 편에서 유홍준은 공재의 <자화상>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지만 나로서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유홍준은 다분히 그의 주관으로, 특히 공재의 삶을 부득불 그의 자화상에 투영하여 보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내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공재의 자화상은 깊은 산속에서 결코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얼굴을 완벽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발그레한 얼굴빛에 형형한 눈빛과 고집스레 다문 뭉툭한 입술, 그리고 마치 호방하고 외향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구레나룻은 <삼국지>의 장비 익덕이나 <수호지>의 흑선풍 이규를 연상시키고, 솔직히 이러한 외향은 '고뇌'보다는, 심지어 산적조차도 산속에서 만나면 무서워 벌벌 떨게 할 만한 '기세'를 담고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한마디로 말해, 공재의 <자화상>은 확실히 자꾸 보고 싶어지는 얼굴을 그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태 전, 나는 이 '겁나는' 공재의 <자화상>을 보기 위해 해남을 찾았었다. 공재 자화상에 대한 내 불경한 평가와 그림에 대한 내 무지를 고려하면 스스로도 꽤나 놀라운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해남을 찾은 건 비단 '그림'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화인 열전>의 '공재 윤두서' 편을 보면서 매력적이었던 건, 공재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공재가 보여준 어떤 '문인의 멋'이었다. 출신 성분 탓에 벼슬길이 막혔지만 그런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선구자적 면모를 보였다는 점도 감탄할 만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재와 그가 사귄 벗들에 관한 일화는 공재의 풍모를 진정 매력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특히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옥동 이서가 공재가 세상을 떠난 이후 쓴 제문에는 공재가 살아있던 당시(심지어 죽음과 마주했을 때조차도) 그들의 교우의 깊이와 공재의 면모를 실로 멋스럽게 웅변하고 있었다.

공이 태어날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나는 약관 때부터 공과 더불어 서로 좋아하고 추종하여 강구하고 연마하기를 40여 년이 되었다. 공은 나의 마음을 믿고 나는 공의 도량을 좇았다. 내가 그것을 아교와 칠이라 일컬으면 공은 금란이라 말했고, 내가 관포(管鮑)라 하면 공은 범장(范張)이라 했다. 마음이 비록 서로 거스르지 않았으나 구차하게 합하지 않았다. 한마을에서 같이 늙어가기를 기대하였더니 뜻하지 않게 가난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장차 살아 되돌아와 서로 만나자고 했으나 뜻밖에 세상을 떠나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오호라,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 어찌 나의 분신(分身)을 빼앗아가는가. 어찌 나의 몸 반쪽을 잘라내는가. 오호라, 이로부터 다시는 마음을 합할 친구가 없으며, 다시는 마음의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으니, 쓸쓸하여 하늘과 땅 사이가 홀로 외롭고 쓸쓸하구나. (p71)

또한 <심득겸 초상>과 관련한 일화도 그림 자체의 뛰어남보다는 외려 공재 자신의 풍모를 은연중 드러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심득겸의 생전 모습을 그토록 실감 나게 그렸다는 건 공재의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일화에서 친우의 모습을 속속들이 기억하는 공재의 "금석 같은 사귐"의 요체를 확인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호 이익이 공재 사후 제문에서 썼듯 "장부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꼿꼿함과 진정으로써 벗을 대하는 공재의 태도에서 나는 한 문인의 '풍류와 멋'을 보았고, 바로 그러한 것들을 찾아 녹우당이 있는 해남으로 가고자 했었던 것이다.

공재는 선비인 심득겸과 금석 같은 사귐을 하였다. 심득겸이 죽으니 공재가 그의 모습을 생각하여 초상을 그렸는데 터럭 하나 틀리지 않았다. 이것을 그 집에 보내어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는데, 마치 죽은 이가 되살아온 것 같았다. (p72)

일단 해남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나자 이후의 일정은 자연스레 따라 나왔다. '땅끝'으로 유명한 해남이니만큼 '땅끝'을 찍고, 역시 해남에 위치한 미황사와 대흥사를 녹우당과 함께 둘러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에도 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해남에서 이틀 가량을 보내고 완도를 통해 제주도로 갈 생각이었기에 고산 윤선도가 머물렀던 보길도는 애초에 제외했었는데, 결국 차편을 맞추지 못해 다산 초당마저 못 들렀고, 그로 인해 여행의 단초를 제공했던 '공재'와 관련된 두 가지 인연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셈이 되었다. <화인열전>을 읽고 알게 된 바지만,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또한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만으로 꼭 보길도와 다산 초당을 들르는 것은 아니지만, '공재'에 좀 더 초점을 두고자 했다면 그와 같은 여행 일정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은 조금 아쉽게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해남에서 정녕 인상 깊었던 건 녹우당의 현판과 공재의 <자화상>이 아니었다. 물론, 뒤뜰의 비자림 숲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하여 이름 지은, 그리고 공재의 '분신' 옥동 이서가 직접 글씨를 쓴 녹우당의 현판과, 유명한 공재의 그림을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그보다 해남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든 건 해남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인심이었다. 조금 성급한 결론이긴 하지만, 나는 해남에서 진정과 선의로 이방인을 대하는 사람들을 만났었고, 그들의 모습은 마치 <자화상>의 겉모습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공재의 매력적인 면모와 닮은 데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친절했던 해남은 이제 내게 그저 공재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공재의 '멋'을 아울러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되고 있고, 그런 이유로 나는 '자꾸 보고 싶어지는 얼굴은 아닌' 공재의 <자화상> 속 얼굴을 또 보기 위해, 좀 더 정확하게는 공재의 <자화상> 너머에 있는 '인간' 공재를 찾아, 문득 '해남'을 다시 찾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한다.

화가의 전기는 인물사(人物史)로서 미술사이기 이전에 인간학(人間學)으로서 미술사라고 할 만한 것이다. (p3)

 

 

 

 

 

 

 
 


덧. 해남 여행기1( http://blog.aladin.co.kr/JogaBonito/2358229 )
     해남 여행기2( http://blog.aladin.co.kr/JogaBonito/2359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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