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종종 이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로 회자되곤 하는데, 이는 아마도 아빠들의 가여운 기대를 차마 야멸치게 잘라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와 엄마 중에 누가 더 좋냐니? 바른대로 말해서 이런 한숨 나올 만큼 쉬운 질문이 세상에 또 있단 말인가. 단언하건대 나는 두 가지 대상 중에 더 좋고 덜한 것이 있음을 인식한 이후로 줄곧,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했다. 나를 세상에 내어놓고 먹인 것도, 입힌 것도, 기른 것도 엄마였으니, 어쩌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줄곧 나는 엄마를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빠라고 해서 나를 위해 한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비교 대상이 '엄마'라면, '아빠'에게는 불행하게도, 절대로 승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얼마 전에 화제가 되었던 한 초등학생의 주옥같은 시('아빠는 왜')는, 기실 많은 이들이 알면서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이 진실을 거침없이 폭로하여 세간에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은근슬쩍 엄마와 비교대상이 되면서, 설령 엄마보다는 못할지라도 그래도 엄마 다음쯤은 될 것이라는 아빠들의 기대는 도덕 교과서와 같은 철저한 진실성으로 무장한 한 초등학생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던 것이다. 도덕적이고 명민한 초등학생의 시에 따르면, 아빠는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멍멍이나 냉장고보다도 못한 존재로 드러났는데, 돌이켜 보면 확실히 어린 시절의 나 역시 아빠보다는 변신합체로봇을 더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아빠는 그게 불만이었던지 어느 날 내 변신합체로봇을 집어 던져서 변신합체로봇이 더 이상 변신도 합체도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그게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었음은 금세 분명해졌다. 결국 아빠는 변신합체'불가'로봇에게도 자리를 내어주어야만 했으니까. 

<아빠는 왜?>

엄마가 있어 좋다. / 나를 예뻐해 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빠가 언제나 변신합체'불가'로봇보다도 못한 존재였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 또 모든 아빠가 냉장고나 멍멍이보다도 못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빠를 엄마와 비교하려는 건 그야말로 아빠의 언감생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런 아빠에 관한 서글픈 진실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혹은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라고 해도 피해 가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예컨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책 <여보, 나좀 도와줘>를 보면 그는 아내의 항의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아내가 나를 구박할 때는 언제나 아이들 이야기를 내세운다. '아이들을 위해서 관심 가져 본 적이 있느냐.' '아버지 노릇한 거 뭐 있느냐.'는 거다." 엄마들이 서슴없이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아빠들에게 공세를 취할 수 있는 건 엄마들이 아이들과의 특별한 유대를 확고히 자신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또한 아이들에게 쏟아지는 엄마의 관심과 애정이 아빠에 비해 얼마나 월등한 것인지를 분명히 증명한다. 이런 사정은 아빠가 나중에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런가 하면 다산 정약용의 서간문을 모은 책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산의 높은 의기와 절개 그리고 뛰어난 학식과 인품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좋아하긴 어려운 아버지로군,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편지에서 다산은 아들들에게 이런 저런 '지극히 옳고 유교적인' 조언들을 하는데, 문제는 이 '지극히 옳고 유교적인' 조언이 지나칠 정도로 이상적이라 종종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라는 데 있다. 편지마다 효와 예를 언급하고 학문에 힘쓰기를 권하며 과제를 잔뜩 내주는 건 분명 마냥 불만을 쏟아내기 어려운 아버지의 가르침이라 할 만하지만, 벼슬길이 막힌 '폐족(廢族)'의 청년들에게 아버지의 유별난 결기는 때로 원망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런 편지를 보내주는 아버지를 그저 좋아만 할 수 있을까.

네가 양계(養鷄)를 한다고 들었는데 양계란 참으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이것에도 품위 있는 것과 비천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가 있다. ...(중략)... 이미 닭을 기르고 있으니 아무쪼록 앞으로 많은 책 중에서 닭 기르는 법에 관한 이론을 뽑아내어 차례로 정리하여 계경(鷄經) 같은 책을 하나 만든다면 육우(陸羽)라는 사람의 <다경(茶經)>,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의 <연경(煙經)> 같은 서적처럼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속사(俗事)에 종사하면서도 선비의 깨끗한 취미를 갖고 지내려면 언제나 이런 식으로 하면 된다. (p82)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 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말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p148)

물론, 나는 다산의 아들이 아니니 이런 편지를 받은 다산의 아들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시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니 미루어 짐작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할 요량으로 이제 닭을 기르려 하는데, 거기에서도 품위를 찾으며 책을 저술하기를 권하고, 더군다나 당장 가난한 마당에 '근'자와 '검'자가 기름진 땅보다 낫다는 데에는, 솔직히 너무 태평한 소리를 한다는 마음이 아주 없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시는 예를 말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인정을 살피십시오."라고 한 다산의 아내의 편지 한 구절은 다산의 '예'로 가득한 편지와 얼마나 비교가 되는지. 만약 다산이 우리 아버지였다면 내가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중에는,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불초하여 아버지를 편안히 모시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로써 아버지를 모시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한 글자는 건(健)이고 또 한 글자는 강(康)입니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음식이나 편안한 의복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농담만도 아니다. 어쨌건 다산이 나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 서로에게 다행스러운 일임은 분명하고, 아이들이 엄마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기 어려운 건 더욱 분명하다.

다산이 둘째 형님에게 보내는 편지에 보면 다산이 집주인 노파와의 문답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노파는 다산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선생은 책을 읽은 사람인데 이런 뜻을 아시는지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는 똑같고 더구나 어머니가 오히려 더 애쓰시는데도, 성인들이 교훈을 세우기를 아버지는 중히 여기고 어머니는 가벼이 하도록 했고 성씨도 아버지를 따르게 하였으며 복(服)을 입을 경우에도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한 등급 낮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혈통으로 집안을 이루게 해놓고는 어머니 집안은 도외시해 버리도록 하였으니 이거 너무 편파적이 아닌가요?" 다산과 노파는 성인의 말씀을 지극한 것으로 여겨 그에 맞도록 해석을 하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성인들이 모두 아버지이기 때문으로, 그들은 그런 예법을 애써 마련해 두지 않으면 아버지의 위치가 이내 땅에 떨어질 것임을 잘 헤아렸던 것이 틀림없다(오늘날 세계적으로 어머니날이 성행하는 것과 달리 아버지날은 썰렁하기 짝이 없는 것을 보라). 요컨대 심지어 성인이라 할지라도, 역시나 엄마에게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본래 아버지들이 엄마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해서 아버지들이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엄마보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는 어려워도, 여전히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있다. 가령, 딸과 함께 유럽으로 사진여행을 떠나는 아버지라면 어떻겠는가. 함께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으며 "인생의 선배로서, 같은 사진의 길을 가는 동료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딸을 이끌어주고 또 딸의 뒷모습을 지켜봐주는 아버지라면 참으로 든든하지 않을까(<사진가의 여행법>). 스스로 "나는 아이들로부터 존경받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수치감을 준 일도 없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아버지라면 또 어떤가. 아이들에게 위선만큼 해로운 게 없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하는 아버지를 아이들이 존경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여보, 나좀 도와줘>). 또한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내가 귀양이 풀려 돌아가느냐, 못 돌아가느냐 하는 일은 참으로 큰일은 큰일이나, 죽고 사는 일에 비하면 극히 잗다란 일이다."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아버지를 마음 깊이 우러르지 않을 수 있을까(<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그리하여 이미 아버지를 든든히 여기고 존경하며 마음 깊이 우러른다면, 어찌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아빠의 경쟁상대가 엄마가 아니라, 실은 멍멍이나 냉장고라는 건 꽤나 가혹한 진실이지만, 그렇다고 낙심하여 결국 멍멍이나 냉장고에게조차 뒤처지는 건 더욱 더 가혹한 노릇이다. 적어도 그 꼴이나마 피하려면 역시나 나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함은 자명하며, 게다 잘 생각해 보면 멍멍이나 냉장고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어쨌거나 멍멍이나 냉장고는 엄마 다음으로 시에서 언급될 정도니까. 하지만 달리 말하면, 멍멍이나 냉장고만큼만 해도 엄마 다음쯤은 될 수 있다는 얘기고, 끝내 멍멍이나 냉장고를 제칠 수 있다면 스스로 꽤 좋은 아빠임을 자부해도 좋으리라. 물론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그러나 실은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이 보지 못하는 아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항변이 마음속에 사무치지 않을 리 없겠지만, 어쩌랴. 아이가 자라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아이가 자라서 지니게 될 시선은 다름 아닌 지금의 시간 속에서 잉태되는 것임에야. 그러니 아무쪼록, 아빠들의 건투를 비는 바이다. 아이가 자라면 그때는 너무 늦다.

덧. 아다치 미츠루의 <크로스 게임>이 어느 틈엔가 완결이 된 걸 알고 다시 한꺼번에 몰아서 보았다. 역시나 재미있긴 했는데, 굳이 <크로스 게임>을 <터치>나 <H2>와 비교하자면 이는 마치 아빠를 엄마에 비하는 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마디로 말해 그건 무리라는 얘기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크로스 게임>에 대한 폄하가 될 수는 없다. 비교대상이 '엄마'나 마찬가지인 <터치>와 <H2>라는 건 너무 사정없이 높은 잣대니까. 그저 이 대목에서는 '엄마'를 둘(혹은 셋-<러프>도 훌륭하다)이나 세상에 내어놓은 아다치 미츠루의 능력에 새삼 경탄할 따름이다(아, <크로스 게임>도 물론 괜찮다. '엄마'는 아니지만 좋은 '아빠'쯤은 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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