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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의 상을 한 준수한 얼굴은 육색(肉色)에 윤기가 역력하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초리가 자못 삼엄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단숨에 압도해버린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속에서 느꼈던 온갖 고뇌가 서려 있는 듯하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 역정이 이 작은 화폭에 완벽하게 담겨 있다. (p58)

<화인 열전> '공재 윤두서' 편에서 유홍준은 공재의 <자화상>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지만 나로서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유홍준은 다분히 그의 주관으로, 특히 공재의 삶을 부득불 그의 자화상에 투영하여 보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내 주관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공재의 자화상은 깊은 산속에서 결코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얼굴을 완벽하게 묘사해 놓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발그레한 얼굴빛에 형형한 눈빛과 고집스레 다문 뭉툭한 입술, 그리고 마치 호방하고 외향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구레나룻은 <삼국지>의 장비 익덕이나 <수호지>의 흑선풍 이규를 연상시키고, 솔직히 이러한 외향은 '고뇌'보다는, 심지어 산적조차도 산속에서 만나면 무서워 벌벌 떨게 할 만한 '기세'를 담고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한마디로 말해, 공재의 <자화상>은 확실히 자꾸 보고 싶어지는 얼굴을 그린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태 전, 나는 이 '겁나는' 공재의 <자화상>을 보기 위해 해남을 찾았었다. 공재 자화상에 대한 내 불경한 평가와 그림에 대한 내 무지를 고려하면 스스로도 꽤나 놀라운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해남을 찾은 건 비단 '그림'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사실 <화인 열전>의 '공재 윤두서' 편을 보면서 매력적이었던 건, 공재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 공재가 보여준 어떤 '문인의 멋'이었다. 출신 성분 탓에 벼슬길이 막혔지만 그런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선구자적 면모를 보였다는 점도 감탄할 만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재와 그가 사귄 벗들에 관한 일화는 공재의 풍모를 진정 매력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특히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옥동 이서가 공재가 세상을 떠난 이후 쓴 제문에는 공재가 살아있던 당시(심지어 죽음과 마주했을 때조차도) 그들의 교우의 깊이와 공재의 면모를 실로 멋스럽게 웅변하고 있었다.

공이 태어날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나는 약관 때부터 공과 더불어 서로 좋아하고 추종하여 강구하고 연마하기를 40여 년이 되었다. 공은 나의 마음을 믿고 나는 공의 도량을 좇았다. 내가 그것을 아교와 칠이라 일컬으면 공은 금란이라 말했고, 내가 관포(管鮑)라 하면 공은 범장(范張)이라 했다. 마음이 비록 서로 거스르지 않았으나 구차하게 합하지 않았다. 한마을에서 같이 늙어가기를 기대하였더니 뜻하지 않게 가난으로 인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장차 살아 되돌아와 서로 만나자고 했으나 뜻밖에 세상을 떠나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오호라, 하늘이 나를 돕지 않는구나. 어찌 나의 분신(分身)을 빼앗아가는가. 어찌 나의 몸 반쪽을 잘라내는가. 오호라, 이로부터 다시는 마음을 합할 친구가 없으며, 다시는 마음의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수 없으니, 쓸쓸하여 하늘과 땅 사이가 홀로 외롭고 쓸쓸하구나. (p71)

또한 <심득겸 초상>과 관련한 일화도 그림 자체의 뛰어남보다는 외려 공재 자신의 풍모를 은연중 드러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심득겸의 생전 모습을 그토록 실감 나게 그렸다는 건 공재의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 일화에서 친우의 모습을 속속들이 기억하는 공재의 "금석 같은 사귐"의 요체를 확인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호 이익이 공재 사후 제문에서 썼듯 "장부라고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꼿꼿함과 진정으로써 벗을 대하는 공재의 태도에서 나는 한 문인의 '풍류와 멋'을 보았고, 바로 그러한 것들을 찾아 녹우당이 있는 해남으로 가고자 했었던 것이다.

공재는 선비인 심득겸과 금석 같은 사귐을 하였다. 심득겸이 죽으니 공재가 그의 모습을 생각하여 초상을 그렸는데 터럭 하나 틀리지 않았다. 이것을 그 집에 보내어 벽에 걸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는데, 마치 죽은 이가 되살아온 것 같았다. (p72)

일단 해남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나자 이후의 일정은 자연스레 따라 나왔다. '땅끝'으로 유명한 해남이니만큼 '땅끝'을 찍고, 역시 해남에 위치한 미황사와 대흥사를 녹우당과 함께 둘러볼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강진에 있는 다산 초당에도 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해남에서 이틀 가량을 보내고 완도를 통해 제주도로 갈 생각이었기에 고산 윤선도가 머물렀던 보길도는 애초에 제외했었는데, 결국 차편을 맞추지 못해 다산 초당마저 못 들렀고, 그로 인해 여행의 단초를 제공했던 '공재'와 관련된 두 가지 인연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셈이 되었다. <화인열전>을 읽고 알게 된 바지만,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또한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만으로 꼭 보길도와 다산 초당을 들르는 것은 아니지만, '공재'에 좀 더 초점을 두고자 했다면 그와 같은 여행 일정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고 지금은 조금 아쉽게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해남에서 정녕 인상 깊었던 건 녹우당의 현판과 공재의 <자화상>이 아니었다. 물론, 뒤뜰의 비자림 숲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가 마치 빗소리 같다 하여 이름 지은, 그리고 공재의 '분신' 옥동 이서가 직접 글씨를 쓴 녹우당의 현판과, 유명한 공재의 그림을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그보다 해남을 더욱 매력적으로 느끼게 만든 건 해남에서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인심이었다. 조금 성급한 결론이긴 하지만, 나는 해남에서 진정과 선의로 이방인을 대하는 사람들을 만났었고, 그들의 모습은 마치 <자화상>의 겉모습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운, 공재의 매력적인 면모와 닮은 데가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친절했던 해남은 이제 내게 그저 공재의 '그림'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닌, 공재의 '멋'을 아울러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기억되고 있고, 그런 이유로 나는 '자꾸 보고 싶어지는 얼굴은 아닌' 공재의 <자화상> 속 얼굴을 또 보기 위해, 좀 더 정확하게는 공재의 <자화상> 너머에 있는 '인간' 공재를 찾아, 문득 '해남'을 다시 찾아 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한다.

화가의 전기는 인물사(人物史)로서 미술사이기 이전에 인간학(人間學)으로서 미술사라고 할 만한 것이다. (p3)

 

 

 

 

 

 

 
 


덧. 해남 여행기1( http://blog.aladin.co.kr/JogaBonito/2358229 )
     해남 여행기2( http://blog.aladin.co.kr/JogaBonito/23591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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