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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반복 ㅣ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2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09.05.22]
II - 1.
고진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핀볼'과 오에 겐자부로의 '풋볼'의 차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본 격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가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풋볼이라는 경기를 가져온 이유는 구조 바깥에 있는 역사를 구조적인 관점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반면에 핀볼 그 자체는 승패를 판가름할 수 없는 단순한 놀이다. 다른 플레이어와 승부를 한다면 경기가 될 수 있겠지만 그건 핀볼 밖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결국 하루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역사가 구조(규칙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이제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대칭적이지 않은 관계 속에서의 교통으로 생겨"(157)나는데, 핀볼에서는 승자와 패자라는 비대칭 관계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핀볼은 그저 반복적인 게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게임에 열중하는 것처럼 보일 때, 경험적 자기는 '축소'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초월론적 자기는 극단적으로 비대화된다."(159)
II - 2.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구절을 발췌하여, 고진은 이러한 의식을 정보이론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루키 소설의 인물들, 특히 208과 209라 불리는 쌍둥이의 경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실재'가 아니라 단순한 차이, 즉 정보일 뿐이다. "물론 '정보'는 '의미' 또는 '물질'에 대응하여 사용되고 있다."(160)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조나 체계라는 것이 이미 그것을 성립시키는 주체를 전제"(161)한다는 점이고, 이는 물질을 정보로 환원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주체란 결국 '초월론적 주관'이 된다. 말하자면, "정보나 구조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의식에서 그리고 괄호 넣기(현상학적 환원)에 의해서 발견"(162)되는 것이다. 이는 초월론적 의식을 말하는 것이고 하루키의 소설에선 정확히 이것이 우위성을 확보한다.
II - 3.
고진은 <1973년의 핀볼>이 <만엔원년의 풋볼>의 (일종의) 패러디라고 말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프레드릭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특질을 언급하며 말한 바, (패러디가 아니라) 패스티쉬다. 패스티쉬는 "패러디가 가지고 있던 숨겨진 동기 즉 해학적인 자극이나 조소나 모방되는 것이 그것과 비교하여 골계로 보이는 노말한(규범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기분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패스티쉬란 무표정한 패러디 즉 유머의 센스를 잃은 패러디다."(163,164) 하지만 (하루키의 작품이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일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작품은 "강한 집착과 전도의 의지를 숨기"(164)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양을 둘러싼 모험>에 나오는 '양'이라는 관념(근대일본의 담론공간에서 아시아와 민권이라는 축에 존재하는 '폭력'의 영역)에 대해, 그리고 미시마 유키오 자결("'양'이라는 관념을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과시"(167)했으며, "미시마에게 자살이란 경험적인 자기를 최대한 경멸하는 '초월론적 자기'의 증명이다"(168))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결국 그런 예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수렴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모든 것이 마음 밑바닥부터 숨김없이 이야기됨과 동시에, 모든 것이 깊숙이 숨겨지는' 타입의 작가(*아이러니적 작가)"이며 그의 작품에는 "'규질과 확률의 세계'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자기의식의 우월성(*초월론적 자기)"(168)이 나타난다.
II - 4.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기하학, 소쉬르의 언어학 등을 인용해 고진이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루키가 임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세계가 임의적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임의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고가 파탄에 이르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외부가 아니라 타자로서의 외부성에 의해서"(172,173)이고 이 때문에 고유명이 중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고유명은 늘 타자에 의해 주어져 있기 때문이고, 바꿔 말하면 "고유명은 초월론적 주관이 넘어설 수 없는 세계의 외부성을 보여주고 있(173)"기 때문이다. 결국 하루키는 이름(고유명)에 집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시도하는 것은 고유명을 지우는 일이고, "그것은 달리 말해 이 세계를 임의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175) 하지만 하루키의 고유명 속에도 임의성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어떤 현실성이 있다. 여기서 현실성이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가능성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것으로서 있는 것"(176)이며, 고진이 말하는 역사란 이런 맥락에서의 '현실성'을 가진다. 다른 말로 말하면, 역사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II - 5.
이제부터 고진의 결론이다. 하루키의 정보론적 세계인식, '역사의 종언'이라는 인식은 결국 현실성으로부터의 도망이고 낭만파적인 거부이며 또한 고유명의 거부다. 하지만 <1973년의 핀볼>에는 유일하게 임의적이지 않은 이름, '나오코'가 등장하며 이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다시 등장한다. 고유명이 회복됐다는 점에서, 그리고 (1969년에 대한 1980년대 중반의) 회고와 (풋볼에 대한 핀볼의) 패러디의 측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오에 겐자부로는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로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그렇다면 도대체 "1980년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177)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는, "일본의 자본주의 경제는 아메리카를 넘어 세계를 제패한 것처럼 이야기"되고,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의 문맥에서 '근대의 초극'이라는 슬로건이 실현"되었다는 의미이고, "메이지 이래 고민해왔던 '아포리아(*난관)'는 소멸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그것은 "일본 근대문학(소설)을 존립시켜 온 것의 소멸"(178)되었다는 의미였다. "아포리아의 소멸이 작가들에게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를 회고하게 만"(178)든 것이었다. 더불어 하루키가 "가치전도(*무의미의 의미화)에 의해 발견한 '풍경(*낭만적 아이러니)'은 지금 세계적으로 자명하게 된 풍경인 것이다."(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