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시점에 지난 1년 간 읽었던 소설을 모아 베스트 10을 정하는 게 얼마나 공평하지 못한 일인가를 깨닫고(왕창 다시 읽어보면 또 모를까) 그냥 다 적어두기로 한다. 공개적인 "좋아하는 소설 순위 목록" 작성은 그만뒀지만 개인적으로는 계속 하고 있다. 지난 12월부터 오늘까지 총 예순두 편의 (경)장편소설을 읽었고, 그중 스물두 편을 꼽았다. (너무 많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 orz) 읽은 순으로 나열했고 지금까지 읽은 횟수와 간략한 감상과 완독한 날짜를 덧붙였다.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 [1]
21세기에도 이런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축복이지만 동시에 어마어마한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와 장르가 판을 치는 한국 소설 세계에서, 이런 팔리지도 않을 낯선 세계의 '불편한' 소설을 펴내준 출판사에 고마울 따름이랄까. 이 소설은 성장소설이고 전쟁소설이며 레바논소설이고 리얼리즘+모더니즘+미니멀리즘 소설이지만 동시에 이런 분류가 아무 짝에도 필요없는 그냥 소설이다. 번역은 정말 출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번역된 글을 읽어보면 역자가 한국어 글쓰기에 얼마만큼 관심이 있는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제목이 주인공의 친구 별명을 따서 "드 니로의 게임"인 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말 잔인하고도 서글픈 일이다. (100111)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 [1]
<토요일>을 읽으며 "와아, 진짜 잘 쓴다"는 탄복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조금 달린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책 뒤표지 추천 코멘트를 빌려보자면 <토요일>은 "현대 문학의 중요한 사건"이며 21세기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다.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 혹은 근대문학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있는 (벗어날 수밖에 없는) 소설이, 장르적 효과나 마술적 서사에 기대지 않은 채 현대를 어떻게 문학적으로 그릴 수 있는지 혹은 그려야만 하는지, 한 사례를 제시한 것 같다. (100115)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 [2]
많은 멋진 소설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결말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보네거트 형님 스스로도 <제5도살장>에는 A 플러스의 점수를 부여하긴 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 소설이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소설 형식과 이야기와 주제가 가장 적절하게 호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뭐... 그렇고 저렇고를 다 떠나서 보네거트 형님은 정말 멋진 사람이다. (100206)
존 쿳시, <추락>(1999) [2]
어떤 의미에서건 나를 공황상태에 빠트리는 작품은 무조건 사랑스럽다. 점점 오락화 위로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 소설판에서 여전히 소설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건 앞서 언급한 '공황상태'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00208)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 [1]
좀 더 알았으면 좀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읽는 내내 들었다. 지인의 코멘트에 따르면 여기 나온 인물들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실제 작가들의 패러디적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아무튼 궁금한 점이 많다. 어느 대화에서, 굳이 자주 만나거나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내 과'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는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나에겐 볼라뇨가 그렇다. (100214)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 [2]
볼라뇨는 문학이 무엇을 해야 하며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만의 인식이 정확하게 있는 것 같고, 그중에 후자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 (100216) 수많은 상징과 은유로 석양처럼 붉고 어둡게 빛나는 칠레의 밤. 처음 볼 때 147쪽의 "습관은 모든 조심스러움을 무디게 하고 일상은 모든 끔찍함을 누그러뜨리는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 너무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놓친 게 한두 개가 아닐 거야. 나는 시를 좀 봐야 해. <신곡>도 좀 제대로 봐야... (100218)
하 진, <전쟁쓰레기>(2004) [1]
잘 쓴 이야기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단한 에너지가 있다. <기다림> 때도 그랬거니와, <전쟁쓰레기>를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휘몰아치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이를테면 소설의 고전적 미덕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외국인이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 아닌가. 읽는 내내 도대체 이 작가는 자료 조사를 얼마나 꼼꼼이 했을까 하는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원서를 찾아보면 되긴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엔 하 진이 참조했다는 도서목록이 나와 있지 않아 아쉬웠다. <기다림>과 <전쟁쓰레기>는 비슷한 듯 다른 소설이며, 각각의 주인공들은 다른 듯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225)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 [2]
2년여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면서 몇 가지 점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어떤 소설을 처음 볼 땐 그 소설의 주제 혹은 소설의 의도에 굉장히 주목하면서 본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소설이 좋게 다가왔다면 반드시 한 번 더 봐야한다. 소설에는 주제나 의도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 처음 볼 때 놓쳤던 것들을 다시 볼 때 하나하나 거둬들여야지. 그밖에 이 소설은 정말 끝내주게 멋진 소설이라는 점과, 소위 진지한 소설을 쓴다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과, 처음 볼 때도 너무 좋아했지만 특히 열 번째 "기소" 챕터는 톡 뜯어내서 들고다니며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다는 점과, 2년 동안 나는 플로베르를 전혀 보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자책과... <추락>과 더불어 믿음직스러운 친구가 생겼다는 기분이다.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100322)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 [4]
(위에 친구라는 비유를 사용했는데) 이 소설은 내게 친구라기보다는 연인에 가깝다. 그래서 그저 사랑스울 뿐이다. 어쩌겠나, 그래서 이성적인 관점으로 소설을 읽어내는 게 몹시 어렵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해보자면, 소설만이 다룰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동원하여 소설이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의도를 내포한 소설 정도? (091206)(100330)
존 파울즈, <콜렉터>(1963) [2]
어떤 특수한 상황을 설정해 그 속에 인간을 집어 넣어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와 유사하지만, 단순히 이야기적 재미(혹은 상상력)가 아니라 추상적이지만 확고한 상징(적 의도 및 목적)을 가졌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과 심리의 흐름이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다음에 볼 땐 책이 편집된 순서대로가 아니라 1부와 2부를 번갈아가며 사건과 주인공들의 심리의 흐름에 맞춰 봐야겠다. 1부는 가둔 자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2부는 갇힌 자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1부와 2부를 써나갈 때, 존 파울즈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조직하고 구성했을지 너무 궁금하다.) 3부와 4부는 (다시 가둔 자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결말인데, 4부는 모파상의 "목걸이"처럼 한 번 더 치고 나간 결말인 동시에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나타난 소위 '포스트모던'적 결말을 배태하고 있는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 읽는 내내 소설의 제목이 왜 "컬렉터"인지 궁금했는데 결말을 보고 나니 제목을 납득할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겠으나 소설을 다 읽은 후 씨익, 미소를 짓게 되었다. (100413)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 [2]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경우 많지 않은 분량(총267쪽)임에도 단번에 읽는 일이 힘든 소설이다. 주인공이 되뇌는 의문을 곱씹어봐야 하고, 이성을 가장한 비이성적인 짓거리들을 보며 발생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 30년 전쯤에 쓰인 소설을 보며 자꾸만 오늘의 한국이 환기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소설의 내용과 함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소다. (가독성과 작품성에 도대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건가?)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히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형상화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작년 초에 보고 1년 몇 개월 만에 다시 보는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여전히 나를 (역자인 왕은철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불편하게 만들고, 사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든 내 변덕스러운 이성을 얼얼하게 만들고 편협한 가치관을 뒤흔들어주는 작품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고, 쿳시의 소설이 정확하게 그러한 역할을 한다. (100430)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 [2]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쿳시가 그간의 작품 속에 내재시켜 온 사유 내지는 문제의식을 총결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장편소설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서. 읽는 거의 내내, 쿳시 매니아를 위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동시에 쿳시의 소설(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면 큰 매력을 못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각 (단편적) 이야기에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 상황을 코스텔로라는 인물에 투사하고 다시 그것을 극단적인 쪽으로 밀어붙여, 그것에 대응되거나 적대적인 생각이나 관념, 상황과 힘겨루기를 하게"(299p) 한다. 그리하여 문제에 대한 정답을 유예하며 정답의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애쓰는데, 이러한 소설 속 "끝장 토론"을 보며 내 사고가 풍부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다른 의견들이 두루 존재할 수 있는지 그저 의아하고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대화의 방식에서 도선생의 작품 스타일이 떠올랐지만, 도선생보다는 쿳시가 훨씬 더 간결하면서도 극단적이고 합리적이며, 주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큰 것 같았다(만 도선생의 작품을 읽다보면 생각이 또 바뀔지도 모르겠다). 쿳시는 정말 대화를 잘 구사하는 작가다. 내가 미처 관심을 갖지 못한 부분, 아예 지식이 부족한 부분들이 너무 많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100505)
존 파울즈, <만티사>(1982) [1]
존 파울즈는 <만티사>에서 소설을 완벽하게 가지고 논다. 소설을 가지고 노는 수준을 넘어 유머마저 가지고 노는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은근히 야하면서 동시에 노골적으로 외설적인 1장을 불편 없이 보고 나면, 기존의 소설들에서 접하기 어려운 짜릿한 내용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존 파울즈가 소설 속에서 화자에 대해, 작가에 대해,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비판할 수 있었던 건 그가 42년간 써온 일기의 영향 탓이 컸을 것이다.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결국 일기(쓰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소설에서 '대화'는 연극에서의 대화와도 달라야 하고, 일상생활에서의 대화와도 어느 정도의 차별성을 지녀야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보면, 처음 접하는 소설을 판별하기 위한 기준으로, 작품 속에서 대화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는가만 보아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 고수들은 소설에서의 대화가 무엇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엄청나게 잘 구사한다. 쿳시가 그렇고 또한 존 파울즈가 그렇다. 후반부, 설명과 의미 부여에 너무 공을 들인 것 같다. 맥락상 필요했다는 생각과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다는 생각이 함께 든다. <콜렉터>에 이어 다시 한번 씨익, 미소를 짓게 만드는 소설이다. (100516)
하비에르 세르카스, <살라미나의 병사들>(2001) [1]
"가독성이 좋다"거나, "순식간에 다 읽을" 정도로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덮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소설이다. 영화를 미리 봐서 이미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몇 가지 인물 설정이 바뀌고, "2부 살라미나의 병사들"의 내용을 축소시켰다는 점만 빼면 영화는 소설과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소설이 영화보다 "절대적으로"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3부에 등장하는 로베르토 볼라뇨 때문이다. 내가 볼라뇨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살라미나의 병사들> 소개 구절만 봤을 땐 볼라뇨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잠깐 등장하고 말 거라 예상했는데 직접 읽어보니 아니었다. 뜻밖에 꽤 많은 분량을 통해 목소리를 냈다. 볼라뇨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서 더 좋았다. (100723)
톰 매카시, <찌꺼기>(2006) [2]
'기억'에 관심이 많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억이라는 매커니즘의 불가해함. 이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작품이 기억에 대해 다룬다는 소개글을 봤기 때문이었다. 초반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이게 뭐지? 근데 갈수록 더했다. 그리고 급기야... 이거 완전히 물건이잖아! 머릿속의 퓨즈가 펑 터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하애졌다. 너무 좋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 후 조만간 다시 한 번 읽고 긴 리뷰를 써봐야겠다. 하여간 이런 소설이 있다. 이러니 소설을 끊을 수 없는 거지. (100801) 길기만 한 리뷰 링크 (100914) (불공평함 따위 무시하고 올해 단 한 편의 소설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 소설을 꼽을 것이다.)
필립 K. 딕, <유빅>(1969) [1]
볼라뇨가 필립 K. 딕을 좋아했다는 얘기를 듣고 동네 도서관에 열람실에 있는 장편소설 중 <유빅>을 골랐다. 다른 소설들과 비교할 만한 어떤 무언가가 잡히지/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다른 세계엣 온 소설 같았다. 소설을 읽고 받은 감탄/충격/자극 등만 놓고 보면 쿳시의 <추락>이나 톰 매커시의 <찌꺼기>, 마이조 오타로의 <아수라 걸>과 유사한데... 아무튼 다르다. 모르겠다, 뭘 어떻게 써야할지. 발터 벤야민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는데 나에겐 이 책이 정확히 그랬다. (매력적인 건 분명하지만) 문제는 좋은 소설인지 아닌지 확신이 안 선다는 점. (101018) (며칠 전 친구와 <유빅>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을 수식하는 데 가장 많이 동원된 형용사는 '이상하다'. 어쨌거나 볼라뇨도 <유빅>의 광팬이었다고...)
세르반테스, <돈 끼호떼>(1605) [2]
상대가 <돈 끼호떼>라면 침묵하는 편이 낫다. (101025) (이렇게 또 2편은 못/안 보고 넘어가는 건가... orz)
리카르도 피글리아, <인공호흡>(1980) [1]
소설은 크게 두 파트로 나뉜다. 1부에선 아르헨티나 역사에 대해, 그리고 그 역사의 정중앙에 있었던 한 인물에 대해, 편지 형식으로 전개된다. 2부에선 아르헨티나를 둘러싸고/떠받들고 있는 문학, 역사, 철학, 이른바 문사철에 대해 대화 형식으로 전개된다. (좋아하는) 소설에 대해 말하려면 말할수록 그 소설에서 멀어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리뷰는 쓰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리뷰를 못 쓴다.) 긴 말이 필요없다. 이 소설은 아주 매혹적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제임스 조이스가 나오고, 보르헤스에서 로베르토 아를트로 넘어가며, 데카르트와 히틀러와 카프카가 어떤 식으로 관계 맺고 있는지 보여준다. 소설에 서사 따위, 의미 따위, 필요 없어, 나 같은 덕후로선 그저 이런 떡밥들만 있어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내며 하악하악 대며 볼 수 있으니까. 인공호흡이 필요하다. 하악하악. (101031)
프란츠 카프카, <소송>(1925) [1]
이런 분위기의 이야기에서 어떻게 그런 색채의 대화를 구사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흑백 사진 속의 총천연색 인물화 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비슷하려나. 다음은 "대성당에서" 챕터에 나오는 구절 중 일부. "어떤 일을 옳게 파악하는 것과 그 일을 잘못 이해하는 것은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일'에는 수많은 일들이 포함되겠지만 이 소설 <소송> 역시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소송>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말은 결국 잘못 이해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는 얘기.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웠던 구절 역시 "대성당에서" 챕터에 나온다. 가장 마지막, 신부의 멘트. / "그러니까 난 법원에 속해 있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요구할 게 뭐 있겠습니까. 법원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오면 받아들이고, 당신이 가면 내버려둘 뿐입니다." / 이 구절이 무서웠던 이유는 '법원'을 내 나름대로의 알레고리로 치환해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기 곤란한 이유는 내 옳은 파악은 동시에 잘못된 이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고. 피글리아의 <인공호흡>에 나오는 대목으로 마무리 짓는 게 좋을 듯하다. "브레히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오늘날 작가 중에서 호메로스나 단테 혹은 셰익스피어처럼 자신의 시대와 철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을 고른다면, 첫번째로 고려해야 할 사람이 바로 카프카라는 겁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에요." (101104)
카렐 차페크, <도롱뇽과의 전쟁>(1936) [1]
상상력(아이디어)을 비롯, 구조적인 면, 기술적인 면에서의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소설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의도가 소설 속에 너무 강력하게 담겨서 이야기의 내적 추동에 의해 이끌려지는 부분을 별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파편적인 구조인데...) 신적인 위치에 있는 작가가 자유롭게 뛰놀고자 하는 이야기를 꽉 붙들어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실제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패러디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왕왕 있었는데 내 상식/지식의 부족으로 그런 부분을 읽으며 느꼈어야 할 재미를 놓친 것 같아 아쉽다. 어쨌거나 차페크에게서 빼앗아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그것을 살짝 비틀어 해학으로 풀어내는 능력이다. (101112)
로베르토 아를트, <7인의 미치광이>(1929)_[101117] (1)
소설에선 시종일관 도스토예프스키적/러시아적 냄새가 많이 풍겼는데 작품해설을 보니 다음과 같이 이 소설을 소개하고 있다. "아를트의 문학 세계에서는 유럽 문학, 즉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나 <지하생활자의 수기>, 그리고 19세기 러시아 작가들과 에드거 앨런 포, 또한 플로베르와 니체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392쪽) 부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아를트적 변주처럼 느껴졌다. 1929년에 발표된 아르헨티나 소설이지만 2010년의 우리 모습을 비춰주는 듯한 구절이 굉장히 많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작품해설의 구절을 빌리자면 "아를트의 텍스트는 따라서 경헙적 현실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未來]' 세계의 모습, '가능한 세계' 혹은 '허구적 진실'ㅡ폭력과 착취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의 현재와 미래ㅡ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포착할 수"(400쪽) 있었던 것이다. 흡인력이나 가독성이 좋은 소설이랄 수는 없지만,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이 작품이 머리를 울렸던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이 소설에 담긴 진실 때문이었다. 아무도 쉽게 보거나 알거나 말할 수 없는 그런 진실.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면밀히 의식하기란 쉬운일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쓴) 내 인식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에 의해 이미 얼마나 오염되어 있는지 조금쯤 자각할 수 있었다. (101117)
호르헤 볼피, <클링조르를 찾아서>(1999) [1]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존재했을지도 모를 "클링조르"라는 인물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을 중심 이야기로 담고 있다... 라고 서두를 끊고 나니 이어서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이 떠오른다.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 등장하는 '클링조르'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우선(아이디어), 그리고 2차 세계대전과 (물론 빠질 수 없는 히틀러와) 당시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내용), 마지막으로 소재만으로도 담보되는 방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매끄러운 구조로 담아냈는지에 대해서까지(형식).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난 후 지금까지 가장 궁금한 점은 멕시코/중남미 작가 호르헤 볼피가 왜 하필 자신과는 큰 관련이 없어보이는 이러한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썼느냐 하는 점이다. 작가 본인과 이 소설 사이에 과연 어떤 '끈'이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도출된 주제가 조금 허망하기는 해도(어쩔 수 없잖아), 더불어 작가의 창작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조금은 억지스레 삽입한/끌고나간 이야기가 소설의 큰 틀에서 놓고 보면 약간의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살짝 눈감아줘도 괜찮을 만큼 이 소설은 구조적으로 굉장히 까리한 작품이다. (10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