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위한 투쟁 고전의세계 리커버
루돌프 V.예링 지음, 윤철홍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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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은 로마법 연구의 선구자이자 목적법학의 창시자로서 당대 유럽전역에서 인기를 구가했다. 예링은 자신의 사상이 원숙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법조협회에서 어떤 강연을 진행했고 그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 출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책 ‘권리를 위한 투쟁’이 탄생했고 이 책으로 예링은 세계적인 법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예링은 학창 시절에 법학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나 극작과 같은 예술 분야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예링의 문장들은 논리적이면서도 그 표현이 매우 문학적이다. 그는 핵심이 되는 내용을 매우 간단하지만 인상적으로 문장에 담아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법학이란 학문에 관한 책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편이다. 물론 이 책은 법학 자체에 대한 이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 내에서 개인과 공동체에 어떤 기능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다룬 책이니 일반적인 법학 서적과는 거리가 있다. 어찌되었건 예링은 법의 실천적 측면을 다루면서도 매우 강렬한 필체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에 여러 번 정독할 가치가 있다.


  예링은 이 책을 쓰던 당시 시대상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 같다. 우선 예링이 활동하던 19세기 유럽에서는 낭만주의가 꽃피던 시기였다. 당대의 낭만주의적인 사고는 단지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역사법학의 이름으로 법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역사법학에 따르면 마치 길가의 꽃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법도 고대에 우연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고 법이 변화하는 것도 단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그런 설명에서는 예링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이 자리잡을 수 없다. 예링은 역사법학이 법의 생성과 변화의 모습을 경험적으로 잘못 묘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법 제정의 절차는 그와는 정반대임을 주장한다. 즉 새로운 법의 제정, 기존의 법의 개정 또는 폐지는 이 법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간의 대립과 투쟁을 전제로 한다. 오래전에 활기를 잃은 법들이 아직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법체계의 존속을 요구하는 자들의 저항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나타난다. ‘투쟁은 법의 과제이며, 법은 투쟁의 산물이다.’ 


  역사법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예링은 인간들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법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법이 인간의 의지의 산물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법이 나에게 부여한 권리를 누군가가 침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나는 권리를 평화에 희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권리에 희생시킬 것인가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예링이 살던 19세기는 근대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의 물결을 거치며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인간사를 통틀어 경제적인 부유함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예링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본주의의 영향력 아래 위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을 것이다. 권리를 주장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는 순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에 속한다. 대개의 소송은 금전상의 이익 문제와 결부되어 있을 뿐이니, 내가 소송을 통해 얻는 이익과 소송을 함으로써 잃게 되는 평화를 마치 경제학자들이 비용편익분석을 하듯이 저울질함으로써 선택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예링은 권리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 아니라 의무의 영역에 속함을 주장한다. 이때 의무는 개인에 대한 의무와 공동체에 대한 의무 모두를 포함한다. 우선 스스로에 대한 의무의 측면을 살펴보자. 인간은 동물과 달리 육체적 생존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생존 또한 요구된다. 그래서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존엄할 권리도 생명권뿐만 아니라 인격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생존 조건 즉 인격의 보존을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려는 자의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자는 자기 생애 가운데서 한순간이나마 무권리 상태를 허용하는 것이고 도덕적 자살을 택하여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자이다. 물론 예링은 불법을 객관적 불법과 주관적 불법으로 구분하며 후자의 경우만 법이념의 부정과 개인의 인격침해가 문제될 뿐 전자의 경우는 단순히 이익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주관적 불법과 주관적 불법의 구분은 이론적으로는 의미가 있으나 현실적으로 둘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불법이 나의 권리를 침해 침해하는 것이 단순히 착오에 의한 것인지, 고의에 의한 것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보존하기 위해 이에 대항해야 한다. 


  실제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채무의 변제가 문제가 될 경우 양 당사자는 상대가 자신의 정당한 이익을 무시한다고 전제하며 소송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예링에 따르면 이때 그들 사이에 문제가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법감정(Rechtsgefuehl)이라고 보아야 한다. 법감정은 자신의 인격이 자의에 의해 침해되었다고 개인이 판단할 때 발현된다. 법감정이 나타나는 것은 도덕적 생존이라는 사회적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직업 또는 계급에 따라 민감하게 느끼는 동기는 다양하다. 농민의 경우는 소유권이 침해되었을 때, 장교 계급의 경우 명예가 실추되었을 때, 상인의 경우 신용이 의심받을 때 법감정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다. 예링은 법의식, 법적 확신 등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학문적 개념을 사용하기 보다는 법감정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이것이 모든 권리의 (심리적) 원천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법감정이 자신에 대한 침해에 반응하는 힘은 고통을 느끼는 능력과 침해에 저항하는 실천력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법감정의 건전성을 측정하는 시금석이 된다. 


  예링에 따르면 권리침해에 대응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이는 독일어 Recht가 의미하는 객관적 의미의 법과 주관적 의미의 권리 간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도출된다. 통상적인 견해는 둘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 다룬다. 즉 권리의 존재 토대는 법규가 마련해 준 것이므로 권리는 법에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링은 권리가 법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법이 권리에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권리는 스스로의 실제적 실현을 통해 법규가 존속되도록 하므로 법규의 유지를 위해서는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링은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병사를 예시로 들었다. 수만명이 싸우는 전쟁터에서 한 병사가 무기를 내던지고 전장에서 이탈하는 행위가 만약에 보편화된다면, 적군과 격렬하게 맞서 싸우는 병사들의 사기마저도 바닥을 치게 되어 결국에는 적군에게 승리를 내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의 규정에 따라 권리를 부여받은 자들이 하나둘씩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게 되면 언젠가는 그 권리는 소멸될 것이고 그로부터 그 권리를 규정하는 법규 또한 사문화될 것이다. 즉 권리는 법규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력을 법규에 되돌려준다. 이렇게 법과 권리의 쌍방적 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인에게 주어진 권리는 자신의 이익 범주 내에서 법률을 방어하고 불법에 대항하도록 국가가 그에게 준 수권(授權)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자의와 무법이 대담하게 머리를 쳐든다면 이는 법규를 방어하도록 소명된 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증표다. 예링은 불법이 권리를 제자리에서 밀어낼 경우 불법을 탓할 일이 아니라 이를 허용한 권리를 탓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개인의 권리 주장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했다. 개인이 권리주장의 공동체적 의무를 자각하며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경우 그에게 의무감에 따른 법감정이 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법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반영된 것으로 예링은 이를 권리침해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성질의 항의라 하며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의 개인적 의무와 사회적 의무를 고찰함으로써 법의 실천적,수행적 측면을 강조했다. 권리침해에 대응하는 개인의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그 동기의 (도덕적) 수준에 따라 가장 낮은 것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구분한 것인데, 순서대로 계산적 이익에 따른 것, 인격 보존을 위한 법감정의 발현에 따른 것, 의무감에 의거한 법감정의 발현에 따른 것이 있다. 그런데 예링은 개념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계산적 이익에 따라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이기주의조차 자기 권리를 초월하여 법률의 대변자가 되는 이상적인 곳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자의에 대한 투쟁이란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비추어볼 때 예링은 권리 투쟁의 세 가지 유형의 위계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어떻든 권리 침해에 대응하는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예링이 살던 시기에 사람들은 대개 소송을 이익의 문제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오늘날도 심하면 심했지 마찬가지이다) 예링이 진단하기에 이는 재산의 비윤리적 취득에 따른 건전한 소유권 의식의 변질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즉 부동산 및 주식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등 극단적 물질주의가 성행함으로써 소유권의 연원과 도덕적 정당화 근거가 노동에 있지 않게 되어간 것이다.  예링은 이런 현실을 목도하고 나서 사람들 간의 이해관계를 투쟁의 원인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당대 사람들이 물질적인 기준에 의거해서만 소송을 제기하거나 자신의 호주머니가 두둑해 지는 경우에만 행동하려는 잘못된 가치관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따름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논지에는 계몽주의를 거쳐 대두된 자연권 사상과 이전 세대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흔적이 보인다. 예링은 이 책을 통해 인격(권)의 보존 또는 법에 대한 존경심이란 이유에서 개인이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도 있음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려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예링이 울리는 경종은 오늘날의 시대에서도 유효하다. 


  권리를 위한 투쟁의 주체는 단지 사법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공법 영역에서는 국가 공무원들이 법위반을 감시하고 자의를 처벌하는 공적인 의무를 지니고 있다. 경찰관이 강도 혐의를 받는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 법관이 피고를 법률에 따라 심판하는 것 모두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들 공무원이 법의 수호자에서 법의 파괴자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것은 관헌 스스로가 직무를 유기하거나 위반함으로써 법규에 반기를 드는 것인데 예링은 이러한 공직자의 불법을 그 어느 불법보다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최악의 불법으로 인하여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은 법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를 잃게 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법의 영역을 떠나 자력 구제에 의해 스스로의 법감정을 관철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법 살인은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대표적인 불법의 유형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뇌물을 받은 재판관은 사형에 쳐해졌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몇 년전 우리나라에서 대법원장의 주도하에 바른 말하는 법관들을 사찰하거나 좌천시키고 심지어 청와대와 재판을 거래하기까지 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초유의 사법농단 사태가 생각났다. 아직까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버젓이 법복을 입고 있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기만 하다. 법을 최전선에서 수호해야 할 법관들이 오히려 불법을 일삼는데 이러한 현실에서 어느 누가 시민에게 법준수의 의무를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현실이 조속히 개선되지 않으면 머지않아 김명수 대법원장을 상대로 발생한 화염병 테러보다 더 심각한 형태로 미하엘 콜하스와 같은 인물에 의한 범죄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권리를 위한 투쟁은 시민과 공직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의무이다. (공적 영역은 제외하고) 개인 간 투쟁의 영역에서 대립하는 양 당사자가 내세우는 권리의 옳고 그름은 이 책의 관심사는 아니다. 단지 예링은 투쟁이 법을 작동시키기는 유일한 기제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 소송을 통해서든 입법을 통해서든 형식과 상관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금까지 예링이 전개한 기나긴 주장은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법은 스스로의 존재를 투쟁하는 가운데 쟁취하거나 주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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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론 - 법과 사회 정의의 토대를 찾아서
로널드 드워킨 지음, 박경신 옮김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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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워킨의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론>은 광범위한 법적, 도덕적, 윤리적, 정치적 논의들을 다룬다. 철학에 있어 회의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해서 도덕적 책임성에 관해 논의하고 이를 상술하기 위해 해석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도덕과 윤리의 통합이라는철학적 기획을 시도하려고 한 드워킨은 이런 기획에 있어 막강한 적수인 자유의지의 부재로부터 도덕적 책임의 부재를 주장하는 규정론을 비판한다. 자유의지의 난제로부터 도덕적 책임성를 구원한 드워킨은 윤리적 삶의 핵심을 규정하며 이런 삶을 위한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이 두 원리를 칸트의 도덕철학과 연계하여 윤리와 도덕을 연관시킨다. 이렇게 두 개념의 기반을 마련한 다음에 부조, 위해 등 도덕적 문제들을 나름 규명한다. 드워킨은 존엄성의 두 근본적인 원리로부터 자유와 평등이란 개념이 도출됨을 지적하며 앞서 두 원리의 관계처럼 평등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남은 장에 할애한다.

드워킨은 종류를 불문하고 철학적 회의주의를 거부한다. 철학에서, 특히 현대 도덕철학에서 도덕적 명제의 진리를 확정할 수 없으므로 어떠한 도덕적 가치 판단도 존재할 수없다는 회의주의가 성행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크게 외적 회의주의와 내적 회의주의로구분된다. 외적 회의주의는 도덕적 명제를 1층위의 실체적 문제가 아니라 2층위의 메타적문제로 다룬다. 그들에 따르면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진리성을 지닐 수 없다. 드워킨은이에 대해 외적 회의주의가 전제하거나 주장하는 바 역시 도덕적 판단이고 이는 곧 자기모순에 해당하므로 오류를 지닌 입장이다. 반면에 내적 회의주의는 도덕적 명제를 2층위의 실체적 문제로 다룬다. 이런 입장은 자유의지의 문제에서 비관적 양립불가주의, 신의 부재에 따른 선악의 부재 등의 주장에서 나타난다. 드워킨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은 특정도덕적 논거 위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겉으로 보기에 회의주의에 해당하지만 실제로는특정 도덕적 신념의 표명에 불과하다.

이런 회의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드워킨은 도덕적 문제를 다룸에 있어 어떠한 회의주의도 발을 디딜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도덕철학에서는 도덕적 책임성이 중요하게 논의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책임성은 도덕 문제를 어떠한 방법으로 숙고할 것인가를 다루는 도덕 인식론의 문제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선 드워킨은 일반적인 책임에 대한 개념 분석을 시작한다. 책임은 크게 덕성으로서의 책임성과 사람과 사건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적 책임성으로 구분된다. 또 덕성으로서의 책임성은 지적, 실친적, 윤리적, 도덕적 책임성으로 구분된다. 마찬가지로 관계적 책임성은 인과적, 소망상의, 배상적, 평가적 책임성으로 구분된다. 드워킨은 이 중 덕성으로서의 책임성에 속하는 도덕적 책임성을 다루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책임성이 있는 사람이란 정합적인 원칙 또는 신념 체계를 진정성 있게 추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도덕적 책임성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실효성, 정합성, 진정성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빈번히 자기합리화를 일삼는 사람들은 진심 없는 신념에 따라 행위하는것이므로 아예 신념체계 자체가 실효적이지 못하다. 또한 추상적인 원칙에 대해 적극인 해석의 노력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진정성있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상충하는 도덕 원칙들로 인해 도덕적 분열증을 보이거나 도덕을 구획하여 상황에 따라 상이한 도덕 원칙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정합적이지 못한 신념체계를 구성했다고볼 수 있다. 그런데 드워킨에 따르면 사람이 도덕적 책임성을 준수하는 정도와 그러한 행위가 옳은 정도는 큰 연관성이 없다. 즉 책임성과 진리의 상관성은 어느 정도 약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덕에 있어 진리를 추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리에 관심을 두어 회의주의와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적으로 책임성을 지닌 사람들 각각이 지닌 신념 체계의 내용은 불일치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도덕적 신념을 올바르게 구성하는 방식에는 일치를 보일 수 있으므로 도덕적 책임성과 진리가 아예 무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드워킨은 도덕과 윤리의 연관성을, 나아가 통합성을 기획하려고 한다. 이는 도덕적 원리의 정당화는 윤리적 삶의 고려에 기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칸트의 도덕 기획처럼 개인적 목표 설정이 타인의 대한 의무와 부합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선 드워킨은 윤리적인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한다. 윤리적 삶에는 잘 사는 삶과 좋은 삶이 있다. 전자는 마땅한 윤리적 의무를 따랐다는 사실에, 후자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드워킨은 윤리적 삶의 두 가지 개념을 예술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잘 사는 삶의 가치는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그리는 수행으로서의 가치에 비견되며 좋은 삶의 가치는 그렇게 해서 창조된 예술 작품이란 산물로서의 가치에 비견된다.

 산물로서의 가치는 객관적이지만 예술에 있어서나 윤리적 삶에 있어서나 근본적인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예술가의 예술적 행위나 그를 모방한 기계의 예술적 행위 모두 산물로서의 가치는 동일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술가의 창조물의 가치만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동일한 신념, 가치관에 따라 인생을 살더라도 외부적 환경 또는 도덕적 운에 따라 삶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윤리적 삶의 가치로 좋은 삶을 고려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행위의 결과에 상관없이 잘 사는 삶을 윤리적 삶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드워킨의 생각이다. 물론 잘 사는 삶이 항상 좋은 삶인 것은 아니며, 나쁜 삶이 항상 잘 못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드워킨의 요지는 윤리를 결과가 아니라 의무의 관점에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삶이란 곧 자신의 삶을 잘 사는 것이다. 이러한 잘 살기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들 요건은 자기 존중의 원리와 진정성의 원리로 구성된다. 자기 존중의 원리는 우리에게 잘 사는 것의 객관적중요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중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란 삶에 대한 비판적 고찰를 통해 단지 좋아하게 된 것들이 아니라 경외하고 타당하게 여기는 것들의 중요성을 인식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쾌락주의와 같은 삶의 방식은 단순히 삶의 의미만을 맹목적으로 쫒을 뿐이므로 중요성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진정성의 원리는 각자가 자신의 상황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들의 결에 어긋나지 않게 살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삶을 진정성있게 대한다는 것은 우선 우리의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또한 이는 비록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는 없으나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 또한 거부하고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삶을 의미한다.

드워킨은 두 가지 윤리적 삶의 원리의 도덕적 함의를 고찰함으로써 윤리와 도덕을 통합하려고 한다. 두 존엄 원칙 중 첫째인 삶의 객관적 중요성 인식 문제는 해석의 문제를 야기한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삶을 존중한다면, 타인의 삶의 객관적 중요성 역시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단지 우리 자신의 삶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될 뿐인가? 이에 대해 칸트는 삶의 객관적 중요성이 보편적 중요성을 반영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만약 우리가 칸트의 원칙을 따른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기 때문에 이리하여 우리는 윤리와 도덕의 연결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보편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면, 윤리적 삶의 둘째 원리인 진정성의 원리의 훼손은 불가피해 보인다. 왜냐하면 타인의 삶을 비중있게 고려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은 제약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철학자들은 보편주의적 견해를 취하더라도 두 원리 사이의 타협을 통해 적절한 균형점을 모색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드워킨은 이러한 균형점 모색은 두 원칙 모두가 훼손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타협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한다. 즉 우리가 칸트의 원칙이라고 통상 부르는 것을 드워킨은 가치에 기초하여 해석하려고 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격 또한 한낱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할 것을 명한다. 또한 이는 자신을 자율적 존재로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전자와 후자 각각 자기 존중의 원리와 진정성의 원리에 대응된다. 그런데 이때 자율적 존재라는 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제기된다.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특정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자유롭다는 통상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의 제정자인 개인이 도덕법을 준수함으로써 자유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이렇게 해석한 칸트의 도덕이론을 받아들여 우리가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을 제정해 이에 따라 행위한다면 윤리와 도덕의 통합과 동시에 자기 존중의 원리와 진정성의 원리의 양립을 달성할 수 있다.

윤리와 도덕의 통합이란 토대를 마련한 뒤 드워킨은 부조의 문제를 다룬다. 칸트의 원칙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 이에 따른다면 우리는 안녕(Well-being)과 같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를 목표로 두어야 한다. 타인의 삶의 객관적 중요성을 인정하는 태도만 보이면 될 뿐, 필연적으로 타인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그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곤경에 처한 사람의 삶을 객관적으로 존중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건네줄 필요는 없다. 단지 그가 처한 상황과 어려움을 인정해주는 태도만 보이면 될 뿐이다. 그러나 타인을 적극적 행위가 아니라 태도로 존중하는 것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매우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만난 걸인이 배고픔과 추위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경우라면 우리에게 태도만이 아니라 행동 또한 요구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한계를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드워킨에 따르면 이 기준이 해석적이고 이 기준은 다음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위해, 구조자에게 초래될 비용, 그리고 피해자와 잠재적 구조자 간의 마주하기가 이에 포함된다.

드워킨에 따르면 위해의 측정 기준은 최소한 공평하게 대우받아야 할 기회, 몫 들로부터 그 피해자가 얻거나 박탈을 당했는지 고려해야 한다. 이는 객관적 기준이다. 즉 피해자의 위험을 측정할 때, 피해자가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비용 측정 기준은 구제 행위가 스스로 볼 때 잘 사는 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비추어 그에게 중요한 것에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는 주관적 기준이다. 즉 그의 비용을 측정할 때, 구제 행위자 스스로 볼 때 잘 사는 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제 비용을 측정할 때 우리의 선호도에 따라 판단하는 것에도 제한은 있다. 왜냐하면 어떤 근거-예를 들어 종교 또는 인종-에 의한 선호는 인류 존중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주하기는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우선 특정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나의 개입이 없을 경우 누가 해를 입을 것인지가 명확할 때 내가 개입할 필요성이 커짐을 뜻한다. 그리고 근접성 측면이 있는데, 이는 내가 위험이나 필요를 더 직접적으로 마주하면 할수록, 내가 의무를 부담해야 할 정도가 커짐을 뜻한다. 이렇게 기준들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타인에 대한 책무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드워킨은 위해의 문제를 다룬다. 탈개인적 결과주의에 따르면 작위에 의한 살인이나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나 결과의 측면에서는 동일하기에 둘을 같게 취급해야 한다. 그러나 본능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우리는 둘을 상이하게 다루며 일반적으로 후자보다 전자의 경우에 책임성이 더욱 경감되거나 아예 조각된다. 드워킨 이를 위해의 종류를 구분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위해에는 경쟁으로 인한 위해와 고의에 의한 위해 등이 포함된다. 스포츠 경기에서 1등을 한 선수는 2,3등을 한 선수에게 경쟁으로 인한 위해를 끼쳤지만 우리는 그 선수에게 도덕적 또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경쟁으로 발생하는 위해는 불가피하며 허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고의에 의한 위해는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시 된다. 윤리적 삶의 두 번째 원칙은 우리 개개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소임상의 책임을 부과한다. 우리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 대한 통제력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고의에 의한 위해는 우리가 이런 통제력을 행사를 방해한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위해를 가한 자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드워킨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은 해석적 개념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많은 철학자들은 마치 그것들이 가치나 중요성에 대한 가설을 동반하지 않는 중립적 분석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규준 의존적 개념으로 다루었다. 앞서 해석의 문제를 두 장에 할애하여 다룬 드워킨은 이런 철학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자유와 평등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한다.

드워킨은 자유의 개념을 하기 위해 자유와 자유로움을 구별한다. 자유는 자유로움에 속하는 것으로 그에게 있어 자유의 영역에 해당되는 권리만이 진정한 자유의 권리로 인정된다. 자유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움은 단지 방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영역의 자유를 다룸으로써 드워킨은 자유와 평등의 충돌 가능성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자유지상주의들이 과세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절도라는 주장을 하며 자유와 평등의 긴장관계를 묘사하고 있을 때, 그들은 사실 자유가 아닌 자유로움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양립을 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드워킨은 평등에 대한 잘못된 개념관을 비판하며 자신의 개념관을 전개한다. 드워킨은 윤리적 삶의 두 원리와 비슷한 정부의 정당성을 위해 필요한 두 원리를 제시한다. 첫째, 정부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동등하게 배려해야 한다. 둘째, 정부는 그들 자신의 삶에 대한 각자의 책임에 존중을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두 원리를 통해 평등을 왜곡하는 잘못된 개념관들을 비판할 수 있다. 자유방임주의와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동등하게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반면에 복지의 지향은 국가가 개인들에게 어떤 삶이 윤리적인 삶인가에 대한 공동체의 판단을 강요하기 때문에 개인들 각자의 책임에 존중을 표하지 않게 되므로 이 역시 잘못되었다. 드워킨은 복지가 아니리 자원에 집중해야 함을 역설한다. 복지를 통해 평등을 실현하려는 국가는 그 수단으로 사후적 평등을 사용하는 반면 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시행하는 국가는 그 수단으로 사전적 평등을 사용한다. 드워킨은 가설적 보험 시장이라는 가상의 장치를 동원해 이런 사전적 평등을 가능하게 만든다.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정부는 복지국가와 달리 개인의 책임을 온전히 존중해주면서도 모든 국민들을 동등하게 배려해줌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다음 세 가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윤리와 도덕의 통합, 과학적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도덕의 고유한 영역 그리고 도덕적 가치들의 통합성말이다. 드워킨 일생의 지적탐구가 이 책에 들어있다. 그는 평생 동안 철학 밖의 적들과 철학 내의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학자들로부터 철학의, 그 중에서도 도덕철학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 내에서도 공리주의처럼 도덕에 대한 윤리의 종속을 요구하거나 실존주의처럼 도덕에 대한 윤리의 부정(거부)을 요구하는 사상들에 저항해 칸트의 지적 탐구를 이어받아 도덕과 윤리의 통합성을 기획했다. 드워킨의 이러한 노력이 학계 내에서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드워킨이 말했듯이, 윤리적 삶은 좋은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잘 산 삶을 산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일생을 거쳐 일관되게 지적 탐구를 개진했던 드워킨은 그 성과에 상관없이 윤리적으로 가치있는 삶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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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스캇 R. 해리스 지음, 박형신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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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중 1장


  감정사회학은 감정을 연구대상 혹은 연구주제로 하는 사회학의 분과다. 그런데 감정이 학술적 연구대상이 될 수 있는지 여러 논란이 있다. 

  

  첫째, 다른 주제들과 비교했을 때 감정은 사회학의 주제로서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사실 감정은 우리 생활 어디서나 존재하며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이슈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사회학의 주요한 문제인 실업을 고려해보자. 실업은 단지 실업자의 경제적 문제만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실업자의 자존심, 인격 등에 위해를 가하는 점에서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낳기도 한다. 따라서 감정은 사회학의 여타 주제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그 중요성이 결코 뒤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 

  

  둘째, 오늘날 급속도로 발전하는 자연과학의 입장에서 감정을 전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부당하다. 만약 감정에 어떠한 사회적 차원도 없이 순수하게 생물학적이라면, 문화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특정 감정을 특정 상황에 일률적으로 표출할 것이다. 그러나 장례식의 경우를 고려해보면 이는 그렇지않다. 일반적으로 장례식이란 상황에서는 매우 엄숙함의 감정이 요구되지만, 몇몇 문화권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하다. 따라서 감정이 전적으로 생물학적이지 않고 감정은 사회적 차원을 지닌다. 


  셋째, 감정의 발생 혹은 표현은 필연적이라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인간은 감정을 통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결혼식장의 손님으로 초대받을 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우리가 장례식장의 손님으로 가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우리는 긍정적인 감정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즉 우리는 상황에 알맞게 적절히 감정을 통제한다. 


  넷째, 일반적으로 감정은 이성과 대비되어 비이성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흔히 감정은 비논리적이고 충동적인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감정사회학의 주요 이론인 교환이론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공식적인 경제적 환경과 비공식적인 상호작용 동안에 재화와 서비스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거래한다. 그리고 흔히 이런 거래가 매우 이해타산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감정의 거래 또는 교환도 매우 이성적으로 진행됨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흔히 감정은 개인에게 배타적인 성질을 띤다고 여겨진다. 즉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알 수 없고 타인도 우리의 감정을 알 수 없으니 감정은 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감정의 성질이 전적으로 사적이라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정은 우리 내부의 의지 혹은 무의식에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외부적 요인의 영향을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감정은 말로 표현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있다. 이는 미디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문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타인에게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감정의 표출은 우리는 감정 표출의 대상이 되는 청중과 우리가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달성하려는 목표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우리의 감정은 상당 부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어휘에 달려있다. 따라서 감정의 표현 혹은 분류는 가능하고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는 청중, 목표, 어휘가 있다.


  일곱째, 감정은 심리학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회학자들도 감정을 연구한다.


  감정이란 무엇인가는 정의하기 어렵지만, 사회학적으로 사고의 단서를 제시하는 기능을 기능을 수행한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중 2장


  앞서 1장에서 우리는 감정의 발생 혹은 표현은 필연적이라는 편견이라는 편견에 맞서 감정은 우리의 통제를 받음을 지적했다. 그런데 우리의 감정 통제는 순전히 우리 개인의 자유에 따른 것인가? 즉 감정 통제에 영향을 끼치는 외부적 요인이 있느냐는 것이다. 감정 사회학자들은 이런 외부적 요인이 존재하며 이 중 대표적인 것으로 ‘감정규범’을 든다. 감정규범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기 위해서는 감정규범의 상위 개념인 사회적 규범의 정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규범이란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관련한 문화적 기대를 의미한다. 사회적 규범은 문화적 기대인 만큼 문화에 따라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차이가 있다. 감정규범은 사회적 규범의 정의 중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감정인 규범이다. 이런 감정규범은 우리가 경험하고 표출하는 감정의 적절성을 평가하는 기준의 기능을 수행한다. 


  감정규범은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닌다. 이런 특징에는 비가시성, 제재성, 학습성, 다양성, 모호성, 불평등 재생산성이 있다. 평소에 감정규범은 비가시적이다. 대인관계에서 서로 간에 감정의 주고받음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감정규범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감정규범이 위반되는 순간에 직면하면, 우리는 감정규범을 인지하게 된다. 인간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감정에 대한 기대와 사실이 불일치할 경우에도 감정규범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감정규범은 제재성을 지닌다. 우리가 법을 위반하면 법에 의거해 제재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감정규범을 위반하면 타인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심지어 우리는 감정규범을 어겼을 때 우리 자신으로부터 통제를 받기도 한다. 다음으로 감정규범은 사회화를 통해 학습된다. 즉 우리는 선천적으로 감정규범을 마음속에 지닌 채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화를 통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감정규범을 익혀나간다. 앞서 감정은 사회적이라고 했는데, 감정이 사회적인 이유는 감정규범이 사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감정규범이 다른 이유 중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감정규범의 학습성이다. 따라서 감정규범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성을 지닌다. 동일한 사회에서 과거의 감정규범과 현재의 감정규범은 다를 수 있다. 또한 동시대에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감정규범과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감정규범은 다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감정규범은 동일하게 지니고 있을지라도 이에 대한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법의 성질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법 또한 감정규범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을 규제하는 제도로서 기능한다. 상식적으로 성문화된 법은 감정규범보다 명시적이다. 그런데 이런 법도 법문의 해석과 법률의 적용에 있어 논란이 자주 발생한다. 법이 이러한데 하물며 감정규범은 그 모호성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감정규범에서 모호성 문제는 인간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 내부에서도 발생하는데, 이를 양가감정이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감정규범은 은밀하게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또한 법의 경우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일부 사회학자들에 따르면 법의 제정과 집행에 있어 지배집단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법은 기존의 불평등을 유지하고 재생상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감정규범이 우리 일상생활에서 위계가 존재하는 대인관계에 적용될 경우 해당 위계관계를 은밀하게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가부장 사화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위계적이며 이런 관계에서 감정적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할 것을 아내는 요구받는다. 


  우리가 감정규범에 위반되게 행위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의 유형, 강도, 지속시간, 시의적절성, 청중과 장소의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중 3장


  앞선 장을 통해 우리는 감정규범에 따라 우리의 감정을 통제함을 알게 되었다. 즉 감정규범은 인간들로 하여금 규칙에 부합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 이때 ‘규칙에 부합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감정통제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전략 즉 감정관리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는 거짓된 감정을 진실인 척 가장하는 표면연기와 진실한 감정이 내부에 형성되기 위해 노력하는 심층연기로 나뉜다. 표면연기는 겉으로 진실이나 속으로는 거짓인 감정을 연기한다. 반면 심층연기는 겉으로 진실이고 속으로는 진실이 될 감정을 연기한다. 전자는 우리의 감정 중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초점을 두는 반면 후자는 우리 내면에 초점을 둔다. 


  표면연기를 위한 전략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를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언어적인 것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내용과 목소리의 톤이 있다. 비언어적인 것에는 감정을 연기할 때 우리가 짓는 표정과 우리의 제스처 그리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등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와 친분이 먼 분의 장례식장에 참석하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다면 친분의 정도와 관계없이 고인의 죽음을 마땅히 애도할 것이나 그렇지 못한 대부분은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가장하게 겉으로 표출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부도덕하다거나 상식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우리가 고인의 유족과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가 말하는 내용이 기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에 관한 것이어야 하고 그 목소리 톤 또한 너무 높아서는 안되고 무게가 깔린 중저음이어야 한다. 또한 그렇게 말을 할 때 우리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서는 안되며 매우 엄숙한 표정을 띠고 있어야 한다. 또 특별한 일이 아니면 장례식장에서 크게 몸짓을 하며 주변의 시선을 끌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장례식에 참여하는 우리는 밝은 색 계열의 옷을 입어서는 안되고 어두운 색 계열의 옷을 입고 가야한다. 


  심층연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이는 신체적 심층연기, 표출적 심층연기, 인지적 심층연기로 나뉜다. 사실 나중에 설명되듯이 이들 심층연기의 종류는 서로 간에 배타적이지 않고 또한 이들이 모든 심층연기의 경우를 포괄하는 것도 아니다. 책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논리적으로 표출적 심층연기는 신체적 심층연기 또는 인지적 심층연기를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심층연기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내면적 감정에 초점을 둔다. 그런데 표출적 심층연기는 내적 감정이 우리의 외적 감정에 부합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점을 살펴보면, 표출적 심층연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에도 신경을 쓴다. 따라서 표출적 심층연기는 내적 감정이 적절하게 형성되는 것과 그 감정이 겉으로 적절하게 드러나는 것까지 연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 내적 감정이 적절하게 형성되는 방식에 바로 신체적 심층연기와 인지적 심층연기가 있는 것이다. 


  감정관리의 주체는 흔히 우리 개인이지만 때로는 둘 이상의 개인들이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때 그들은 감정관리를 협력적이거나 적대적으로 진행한다. 예를 들어 대학교 팀플 과제를 수행할 때 어떤 조가 큰 문제에 봉착할 경우 조원들은 일반적으로 표면연기의 방식으로 서로 협력하려는 감정을 연기할 것이다. 반대로 원래 라이벌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표면연기든 심층연기든 둘 사이에는 적대적인 감정을 연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다. 

  감정관리는 흔히 거짓이라는 점에서 부정직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런데 모든 감정관리가 부정직한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부정직한 감정관리가 반드시 부도덕한 것도 아니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중 4장


  교환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 쾌락주의자이다. 즉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이해득실 계산을 통해 이뤄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친구 또는 연인을 사귐에 있어 우리는 여러 가지 합리적 요인을 고려한다. 그들의 인격적 특성을 고려해보기도 하고 그들과 보내는 시간의 기회비용을 따져보기도 한다. 경제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관계에서도 한계효용의 감소와 같은 합리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을 살펴보면 우리가 타인을 상당히 합리적으로 대함을 알 수 있다.


  교환이론에 대한 비판은 모든 인간이 합리적 쾌락주의자는 아니라는 점에서 제기될 수 있다. 비판에 따르면 부모와 활동가 등의 인물상은 교환이론에서 가정하는 인간의 반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환이론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그들의 활동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합리적 계산을 지적한다. 부모가 자녀를 정성껏 양육하는 것도 사실은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 자신의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할 수 있고 미래의 경제적후생을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활동가가 사회적 문제 해결에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명예와 자존심, 권위 등이 주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타주의적 행동을 교환이론에서 가정하는 인간의 합리성만으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렵기는 한다. 따라서 클라크는 세 가지 교환논리를 제시하며 인간 사이의 재화,서비스,감정의 주고받음이 항상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교환논리에는 상보성의 원리, 자선의 원리, 호혜성의 원리가 있다. 교환논리는 어떤 상황에서 교환이 발생하게 되는지 즉 교환발생의 원인을 제시한다. 상보성의 원리에서 교환은 당사자가 지닌 역할에 따른 책임의식에서 비롯한다. 자선의 원리에서 교환은 곤경에 처한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된다. 호혜성의 원리에서 교환은 교환을 함으로써 예상되는 이득을 고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물론 이들 세 가지 교환논리가 배타적으로 감정교환시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논리가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클라크가 지적한 대로 인간 사이의 교환이 항상 합리성에 기초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의 경우에는 합리성이 핵심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러한 일반적인 경우에서 교환이 이루어질 때 감정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교환이론에서 답하고자 하는 문제이다. 교환이론에 따르면 감정과 교환이론의 관련성은 교환의 배경, 과정, 결과에서 나타난다. 사회적 교환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인간은 교환 논리, 그 중에서도 특히 비용-이익 분석에 의거해 교환의 가치를 매긴다. 이때 그 분석에 핵심되는 지표가 바로 교환의 결과로서 예견되는 감정이다. 즉 감정이 사회적 교환의 인풋으로 작동한다. 교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교환을 원활히 진행하여 의도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통제할 것이다. 이때 앞선 장에서 살핀 감정규범 및 두 가지 감정관리가 개입한다. 교환이 이루어진 뒤 사람들은 교환의 결과에 대해 만족 또는 불만족을 느낄 것이고 이를 감정을 통해 표현한다. 즉 감정이 사회적 교환의 아웃풋으로 작동한다.


  교환이 이루어진 뒤 사람들이 보이는 감정은 일치하거나 불일치할 수 있다. 교환이 공정하게 이루어졌느냐는 사람들이 교환의 결과로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주요한 기준이다. 교환이 적절하게 이루어졌으면 당사자들 모두 만족감을 느낄 것이고 교환을 통해 서로의 관계는 이전보다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한쪽 당사자가 교환을 통해 득을 보고 다른 당사자는 손해를 본 제로섬인 경우 혹은 당사자들 모두 손해를 본 경우 교환에 대해 서로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의 관계는 이전보다 손상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교환의 적절성에 대한 의구심은 인간 간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한 인간 내부에서 양가감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중 5장


  인간의 노동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지성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지성과 사고력 등을 요구하는 인지적 노동이 있다. 또 육체와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적합한 체력과 손재주 등을 요구하는 신체적 노동이 있다. 마지막으로 감정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적합한 감정을 관리할 것을 요구하는 감정적 노동이 있다. 특정 직업의 업무가 이 세 가지 노동 중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과업에 따라 각 노동에 대해 요구하는 비중이 다를 뿐,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감정노동을 수반한다. 즉 일의 전문성, 일의 상호작용의 빈번함과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들은 감정노동을 수행하기 마련이다. 


  노동은 피고용자와 고용자 사이에 거래되는 재화가 아닌 어떤 것으로 정의된다, 고용자는 피고용자가 감정노동을 그 자신의 일에 적합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사용한다. 이런 전략은 고용, 훈련, 평가 시에 나타나고 또한 광고를 통해서 나타난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고용할 때, 고용조건 중 하나로 적절한 감정표현 수행력을 요구한다. 또한 고용주는 노동자를 고용한 후에도 그에게 감정적 교육을 시킨다. 이런 교육은 표면연기 교육과 심층연기 교육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고용주는 노동자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충실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넘어서 지니는 것 또한 요구하므로, 고용주는 표면연기 교육보다 심층연기 교육에 더 큰 가치를 둔다. 또한 고용주는 노동자가 행한 감정노동을 평가를 한다. 이때 평가의 주체로 고용주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감정노동의 대상이 된 고객 및 노동자의 감정노동을 옆에서 지켜본 동료들 또한 동반된다. 마지막으로 고용주는 광고를 통해서 노동자가 수행해야 하는 감정노동의 양과 질을 높이려고 한다, 광고는 이상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연출하며 광고를 보는 고객들로 하여금 실제 노동자가 그에 적합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이 대면하는 고객들에 대해 그들이 본 광고에 적합하게 감정노동을 수행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고객들의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에 따른 불만을 참아야 하는 충격흡수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에서는 불일치가 발생한다. 즉 모든 노동자들이 동일한 양과 종류의 감정노동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의 분업을 생각하면 이런 불일치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으나 특정 요인에 의해 부당한 일의 분리가 발생한 경우 이런 불일치는 불평등으로 심화된다. 감정노동의 불평등를 야기하는 원인으로 젠더, 인종, 지위 등이 있다. 젠더의 경우 일의 부당한 분리는 소위 말하는 유리천장 즉 직업별 분리가 있고 소위 말하는 유리벽 즉 동일 직업 내의 업무별 분리가 있다. 또한 동일 직업, 동일 업무에 불구하고 일의 차별적 분리가 있다. 인종 또한 젠더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분리가 일어난다. 지위에 의한 일의 부당한 분리는 앞의 두 요인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권력과 권위로 구성되는 지위는 일의 직접적 분리와 간접적 분리를 부당하게 야기한다. 일의 직접적 분리는 ‘조직의 보호물’을 통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비해 고된 감정 노동을 덜 수행해도 되므로 소극적 의미의 불평등을 가져온다. 일의 간접적 분리는 ‘지위 보호물’을 통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비해 다소 자유롭게 감정노동을 수행할 수 있으므로 적극적 의미의 불평등을 가져온다. 


  감정노동의 결과는 대인관계 기술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모든 노동이 그렇듯 부정적인 면이 더 강하다. 이런 부정적 결과에는 노동자의 쇠진과 양가감정으로 인한 혼란 등이 있다. 감정노동의 부정성을 덜 느끼게 되는 요인으로 일 친화적 성격과 일에 대한 헌신적 태도, 노동자가 대하는 손님의 낮은 지위와 양식적 반응 등이 있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중 6장


  감각의 분류는 생리적-신체적 현상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훌륭히 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체 감각은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특정 생리적 현상을 통해 우리 마음에 어떤 감정이 형성되었는지 확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상이한 감정이 유사한 생물학적 표현으로 나타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외부로 표현된 감각적 반응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또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유일한 하나의 감정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일련의 감정을 느끼고 난 후 우리의 신체에 특정 현상이 생겨났을 경우, 이 현상은 어떤 감정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명확히 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또 우리는 감정을 수치적으로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체계를 지니지 못하고 있다. 즉 ‘모호성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느 정도 행복함의 감정이 들고 이것이 어느 정도로 외부에 표현되어야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행복함이란 감정을 모호하게 사용한다. 따라서 신체적 감각의 정도를 두고 감정을 분류하는 것은 반직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감정이 생리적 현상을 동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감정들에 대해서는 아예 생리적 현상으로 감정을 확인하기가 불가능하다.


  이상과 같이 신체 감각의 불명료함은 우리가 감정을 분류함에 있어 사회적 요소을 주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이끌어낸다. 이런 사회적 요소 중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모든 문화권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에 언어에 따른 감정어휘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마다 사용하는 감정어휘를 고려해야 문화권 간 감정 분류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어휘는 명시적으로 감정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관용적 표현을 통해 감정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를 은유라고 한다. 은유의 사용 또한 언어에 따라 차이가 보이지만 이와 더불어 문화적 규범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감정을 정확히 분류하기 위해서는 해당 은유를 사용하는 문화권의 언어뿐만 아니라 그 문화권 내에서 통용되는 규범 또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의 감정어휘는 일반적으로 생리적 상태를 반영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상황이란 특정 사건에 따라 발생한 감정을 분류하는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험에서 훌륭한 점수를 받은 사건을 가정해보자. 이때 우리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관점에서는 기쁠 수 있지만, 나보다 점수가 낮은 친구들도 존재한다는 관점에서는 안타까울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맥락, 청중, 목적에 따라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의 감정을 관리한다. 즉 공적인 상황이냐 사적인 상황이냐에 따라, 우리의 대화상대에 따라, 우리가 표현하느 감정을 상대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냐 아니냐에 따라 우리의 감정 표현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감정분류는 타인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이뤄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특정 감정을 매우 강하게 또는 약하게 느끼고 있는데 타인은 이런 나에게 특정 감정을 좀더 약하게 또는 강하게 느낄 것을 권유할 수 있다. 이때 우리가 그런 권유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감정분류를 스스로한 것이 아닌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거쳤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호작용을 거쳐 분류되는 감정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개인적 감정의 확실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즉 내가 나의 감정을 제일 잘 안다고 단정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감정노동을 함으로써 감정분류를 알맞게 조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회적 요소들은 우리의 감정분류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생물학의 방식처럼 우리의 반응을 통해 반응을 산출한 감정을 추론하는 방식은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 중 7장 


  모든 학문은 각각이 추구하는 목적이 있다. 어떤 학문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는 그 학문이 추구하는 목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따라서 감정사회학을 왜 공부해야하는지는 감정사회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목적의 연계 속에서 고찰될 수 있다. 우선 감정사회학은 구체적인 삶 속 우리들을 다룬다. 즉 감정사회학은 추상적이고 거대한 어떤 주제가 아니라 사화 속에서 다양한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며 감정을 표출하는 우리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사회학을 공부함으로써 감정을 지닌 인간들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는 효용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효용이 단지 즐거움 또는 신선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하기까지 하다. 일상적인 것들을 감정사회학적 개념들을 동원해 살펴보면 기존의 관점으로는 포착할 수 없던 것들까지 분석하고 이해하게 되어 세상에 대해 보다 나은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일상에서 우리가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처리하는데 중요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 또한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로서 일종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키우는데 매우 도움이 된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그것을 무관해 보이는 별개의 상황을 연결하고 그 둘의 유사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사회학적 상상력을 감정사회학에서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의사와 스트립댄서은 그들이 벌거벗음을 대하는 데 있어 일종의 감정관리를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 또는 형태는 유사할 수 있음을 고려해보면, 감정사회학을 공부하는 것은 사회적 현상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한 감정사회학은 일상적인 것을 연구하지만 그렇다고 일상적인 것만 연구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감정사회학은 우리가 일상에서 관리하고 표현하고 교환하는 감정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문화적 가정과 믿음에 주목하고 그것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하는 등 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지닐 것을 요구한다. 사회학의 학문적 목적은 사회 내 다양한 불평등을 분석하고 이를 시정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정사회학도 단순히 인간들이 사이를 오가는 감정을 이해하는 것만이 학문적 목적은 아닐 것이다. 앞선 장에서 살펴본 대로 감정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다양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감정과 관려한 불평등이 존재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감정사회학의 주요한 학문적 과제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감정사회학은 감정을 중심으로 우리와 세상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지만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학의 분과가 그러한 것처럼)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구상하는데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를 읽고난 후


  고등학생 시절 사회문화를 배우며 사회학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뉨을 알게 되었다. 개인을 구속하는 구조나 제도를 연구하는 거시적 관점과 구조와 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유롭게 행위하는 인간들을 연구하는 미시적 관점이 있고, 이 중 어느 것을 택하는지에 따라 사회학 연구는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고 하였다. 사회학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사회학의 주요 문제인 사회질서, 불평등, 복지, 실업, 세계화 등은 대부분 거시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가 사회학과에 진학한 것도 사회 속 개인을 이해하는 미시적인 주제가 아니라 불평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거시적인 주제를 염두하고 내린 결정의 결과였다. 물론 미시적인 것을 연구하는 사회학의 분과도 그 나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사회학 연구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감정사회학으로의 초대>는 사회 속 개인들을 감정을 지닌 존재라는 관점에서 사회학을 연구하는 감정사회학의 학문 전반을 간단하게 개괄하여 소개한다. 감정이란 주제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만큼 상당히 미시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본다. 우리 일상과 밀접한 감정을 학문적 차원의 논의로 끌어올려 심층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지적 호기심 증진이라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신선하기는 했다. 그러나 평소 미시사회학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편견 때문인지, 그 호기심은 마치 물리학에서 물리세계 이면의 운동원리를 배우는 것과 유사했다. 즉 사회 내 개인들이 감정규범에 따라 감정을 표면적으로든 심층적으로든 연기하고 이것이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주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흥미롭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사회학 문제들이 나에게 지적 탐구 욕망을 불어넣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해당 책의 4장까지는 어 정도 이런 생각이 들면서, 사회학개론 수업의 첫 번째 과제로 사회학을 다루는 수많은 책 중 왜 하필 이 책을 교수님께서 요약하라고 하셨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책의 5장을 넘기면서부터 상당히 달라졌다. 5장의 주제는 노동의 한 종류인 감정노동을 다루며 감정노동에 바탕을 둔 사회적 불평등의 모습을 다룬다. 이 장을 읽으며 나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번뜩이는 것을 느꼈다. 왜 교수님께서 이 책을 사회학개론의 첫 번째 수업과제로 제시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5장을 통해 미시적인 관점과 거시적인 관점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5장은 감정을 다루는 미시적인 관점으로도 불평등이라는 거시적인 주제를 고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나에게 사회적 불평등은 개인이 아니라 관습과 제도에서 기인한 것이 때문에 거시적 관점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했다. 그리고 거시적 차원의 고찰만으로도 모든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가능하리라고 순진하게 생각해왔다. 그런 나를 책은 사회학의 주제들을 조금 더 넓은 시각에서 유기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했다. 불평등이 단순히 경제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 간 상호작용에서 암묵적이고 은폐된 채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에서도 발생한다. 따라서 불평등은 거시적으로 고찰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개인들의 행위를 탐구하고 이것의 바탕에 깔린 부정의한 통념과 믿음을 고발하는 노력이 이뤄졌을 때 적절히 해결될 수 있다.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 사이에 적절한 다리가 놓여졌을 때야 비로소 사회학이란 학문을 적절히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값진 교훈이다. 


  언젠가 '균형'이란 대립되는 양자 사이의 중간쯤에 고정된 위치를 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균형점을 탐색하려는 노력이라는 생각을 접한 적이있다. 마찬가지로 학문으로서 사회학의 매력도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두 관점 사이를 오가며 규정할 수 없는 균형을 끝없이 찾으려는 노력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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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형이상학 정초 - 개정2판 대우고전총서 16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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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도덕성의 최상원리를 설명하며 이를 위한 정언명령을 도입하는 전반부와 이런 정언명령의 가능성을 다루는 후반부로 나뉜다칸트는 자신의 도덕철학이론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 통계나 사례에 기초한 경험적 방식이 아닌 선험적 접근을 택했다그래서 세밀한 논증으로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 일반의 상식에 호소하는 식으로 논증 사이의 도약이 빈번하게 일어나기에책을 읽어 나감에 있어 주목해야 할 점은 이론의 현실적 타당성 보다는 이론에 대한 온전한 이해인 것 같다칸트가 정의하고 분류하는 개념들과 이런 개념들 간의 관계이를 바탕으로 연속되는 논증을 이해하고 나면 책에서 칸트가 내세우는 이론의 큰 줄기는 보이는 것 같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집필함에 있어 다음 세 가지를 주요하게 염두해 두었던 것 같다우선 그는 동시대의 다른 윤리이론들이 가지는 한계성을 비판하고자 했다이런 이론들에 통칭하여 일반실천철학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자신의 이론인 윤리형이상학과 철처히 구분하고자 했다또한 그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하였지만이성만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인간은 이성만큼이나 경향성 또는 이해관심 등 비이성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던 것이다마지막으로 그는 선한 삶과 행복한 삶을 구분지었다인간에게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마땅한 따라야할 법칙들에 위배된 행위를 하기에 이 때문에 선한 삶을 위해서는 행복을 누림에 있어 이성과 의지에 의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통해 도덕성의 최상원리의 탐색과 확립이란 목표를 이루려고 하였다이를 위해 그는 논의를 최고선이란 개념부터 시작하며 어떻게 하면 이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연속적으로 살펴보았다칸트는 세계를 초월하여 그 자체만으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을 선의지라고 하였다칸트는 이러한 선의지가 행위의 가치판단에 있어 최상의 척도이기 까지 하다며 선의지의 내포 및 기능을 제시하였으나 외연은 제시하지 않았다그렇지만 선의지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제시해주었다재능기질인격적 속성 따위의 것들은 선의지에 해당할 수 없다이러한 것들이 바람직한 가치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선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우연적인 요소로 인해 조건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칸트는 이 선의지의 개념을 심화시키기 전에 선의지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를 짚고 간다인간을 비롯한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이 가진 이성을 통해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자체로 선한 의지를 세우려는 목적과 그러한 능력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았다이것이 이성의 제1의 의도이고 나머지 행복감을 비롯한 감정을 얻는 것은 부차적인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선의지의 개념을 심화시키기 위해 의무의 개념을 도입한다개념의 도입과 함께 칸트는 행위에 대한개념의 분류를 시작한다행위는 의무에 어긋나는 행위와 의무에 맞는 행위로 나누어 진다의무에 어긋나는 행위는 이미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그렇지만 의무에 맞는 모든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의무에 맞는 행위는 또다시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와 의무에서 비롯되지 않은 행위로 나뉘기 때문에행위가 의무에 맞으면서도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이어야 비로소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예를 들어 구호단체의 광고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동정심이 느껴져 기부를 한다고 했을 때이 행위가 비록 의무에 맞는 행위일 수는 있으나의무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왜냐하면 행위의 주체는 동정심이란 경향성에서 비롯된 행위를 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행위가 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를 존중하며 의무로서 행위를 이행하는 동기(동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따라서 칸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한의 의무에 따른 기부 행위가 동정심 많은 사람의 기부 행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어디서 기인했을까칸트는 의무에 따라 결의되는 준칙에서 찾는다칸트는 준칙과 법칙을 이항대립적으로 분석한다준칙은 욕구의 주관적 원리를법칙는 의욕의 객관적 원리를 뜻한다즉 전자는 그에 따라 주관이 행위하는 원칙이고후자는 그에 따라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행위해야만 하는 원칙으로각각 사실과 당위를 나타낸다만약 이성이 욕구능력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가지면 인간은 행위 원리로서 법칙을 따르나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에인간은 행위 원리로서 준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그러나 법칙에 대한 존경은 가능하고 이를 실제로 행해야 한다고 보았다따라서 칸트는 의무를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라고 정의하며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가 곧 법칙에 대한 표상으로 여겼다의무에서 비롯된 행위는 경향성의 영향 및 의지의 대상을 일체 배제하기에 행위 주체자의 의지에서 질료적인 것은 없어지고 의지에는 형식만이 남는다의지란 이성이 경향성에서 독립하여 필연적으로 선하다고 인식되는 것들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즉 의지는 법칙의 표상에 맞추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으로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가질 수 있다그런데 의지가 항상 이성에 의해서만 규정되지는 않기에불완전한 인간이 악하고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칸트는 이런 의지에 훈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이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의지를 객관적 법칙에 맞게 규정하는 것을 강요라고 하며객관적 원리의 표상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 이를 지시명령이라고 한다. ‘명령이란 지시명령의 정식(定式)이다명령은 선하지 않은 의지에 의욕(하고자 함형식의 일반적 원리를 따를 것을 지시한다결국 선의지는 의욕 형식의 일반적 원리에 따른 행위를 의미한다


  칸트는 기존의 일반실천철학과 달리 자신의 윤리이론을 경험에서 도출하지 않았다즉 실례에서 윤리적 행위의 표준을 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다우선 실례는 최고선의 원형에 대한 모방이 될 수 없다또한 경험에 기초한 윤리적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과 항상 선한 가치로 인식될 수 있는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경험적 분석으로는 도저히 최고선의 가치를 도출할 수 없다고 본 칸트는 선험적 분석을 통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춘 최고선의 조건을 탐색하려고 했다따라서 선의지에 내재하는 의욕 형식의 일반적 원리 또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추어야 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적 존재자를 대상으로 한 명령 또한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녀야 한다.

  

  칸트는 당위(해야 함)으로 나타나는 명령을 가언적 명령과 정언적 명령으로 구분했다가언적 명령은 명령을 통해 의욕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으로 도구적-조건적 가치를 지닌다반면 정언적 명령은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명령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표상하는 것으로 내재적-무조건적 가치를 지닌다정언 명령과 달리 가언 명령은 명령의 내용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주어져야 하는 제한이 있다명령은 의욕 일반의 객관적 법칙과 이성적 존재자의 주관적 준칙과의 관계를 나타내야 하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그런데 가언 명령은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 명령을 지시할 수 없으므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고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으므로 필연성 또한 결여되어 있다따라서 정언명령만이 의욕 형식 일반의 원리에 적합한 명령의 정식이 된다이에 따라 칸트는 첫번째 최상의 실천원리를 도출한다.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이를 순수 실천이성의 원칙이라고 한다.

  

  ‘의욕은 하고자 함을 의미하는데이는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모두 함유한다따라서 보편적 법칙으로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으로 적합한 행위는 행위가 단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보편적 법칙으로 존재하기에 타당해야 한다예를 들어 자살 또는 이행불가능한 약속은 보편적 법칙으로서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반면에 자기계발 보다 쾌락을 우선시 하거나 이기적 개인주의를 보이는 삶의 태도는 보편적 법칙으로 가능하기는 하지만보편적 법칙으로 존재하기에 타당하지 않다따라서 보편적 법칙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 가치가 있는 행위가 실천원칙으로 적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정언명령의 준수가 의무이어야 할까즉 앞서 도출된 실천 법칙의 근거가 무엇일까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칸트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과 도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을 가정했다인간을 비롯한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며특정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따라서 인간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반면에 이성적 존재자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단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칸트에 따르면 정언 명령은 최상의 가치를 지닌 실천을 강요하기에만일 실천의 주체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고 모든 존재가 조건적 가치를 가진다면결코 윤리성의 최상원칙을 도출해 낼 수 없다고 보았다칸트는 이를 정언명령에 대한 최상의 실천 근거라 부르며 이에서 파생되어 나온 다른 실천명령을 제시한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그렇게 행위하라.’ 이러한 인간 존엄성의 원칙을 칸트가 두 번째로 제시한 의욕 형식의 일반적 원리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곧바로 칸트는 이 둘째 실천 원리로 부터 셋째 실천 원리인 보편적 법칙수립의 의지로서의 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을 도출했다즉 칸트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준칙을 통해 보편적 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즉 입법자로 보았던 것이다그렇다면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의 법칙수립 능력에서 찾았던 것이다준칙을 통해 법칙을 수립한 인간은 주관적인 준칙을 세운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신의 준칙 하에 놓여있기에 한편으론 종속적이라고 보았다이러한 인간의 양가성에 도달하는 것을 칸트는 의도했던 것 같다왜냐하면 칸트는 기존의 윤리학과 자신의 윤리학을 대조하고자 했고이러한 차이가 두 이론이 인간을 자유와 종속 사이 어디에 위치시켰는지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기존의 윤리학에서는 인간을 단지 보편적인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그렇다면 인간의 의지는 단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일 뿐이다반면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을 단지 자기 자신의그러면서도 보편적인 법칙수립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인간의 의지는 내부에서 수립된 것이다칸트에 따르면 전자에 따라 인간이 법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법칙에 강요하게끔 인간에게 특정 이해관심이 주어져야 하는데그렇다면 법칙 준수는 결국 조건적일 수밖에 없다반면 칸트의 윤리학의 관점에서는 인간은 자기법칙수립자이고 이를 의무로 받아들이므로 법칙 준수의 필연성을 담보할 수 있다칸트는 인간에게 법칙에 대한 종속을 의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도 그러한 법칙을 자신만의 준칙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자유의 길을 내주었기에 도덕성의 원칙이 지녀야할 필연성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고 기존의 윤리이론과 달리 최상의 원칙에 대해 탐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법칙수립자이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율적 존재임이 전제되어야 한다결국 칸트는 인간이 수단적 가치가 아닌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인간의 법칙수립 능력에서 찾았고또 이에 대한 근거를 인간의 자율성에서 찾은 것이다


  칸트는 세계를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로 구분하였다현실적 인간은 두 세계 모두에 속해있다전자에서 인간은 경향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의 법칙 아래에 종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후자에서 인간은 이성 이외의 것의 영향은 일체 배제한 채오로지 이성의 영향만을 받으며 자연에 독립하여 순수 이성에 기초하고 있는 법칙 아래 존재한다고 보았다감성세계에 속하는 한 인간은 종속적이고 오성세계에 속하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만약 인간 이성이 이성적 존재자에게 아무런 방해없이 실천적이라면즉 인간이 오성세계의 성원이기만 하다면 당위는 곧 의욕을 의미하며 자신이 의욕하는 것에 더 이상의 강요도 필요가 없다그러나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 행위가 촉발되기도 하는 인간에게 당위와 의욕은 불일치하며 따라서 인간은 주관적 목적 및 필연성을 배제하고 보편적 법칙에 알맞는 준칙에 따라 행위할 것을 요구받는다궁극적으로 칸트는 경향성과 이해관심 등에서 벗어나 이성에서만 자신의 행위의 근거를 찾는 인간이 선의지를 가진 존재이고이를 이상적 인간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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