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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형이상학 정초 - 개정2판 ㅣ 대우고전총서 16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8년 9월
평점 :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도덕성의 최상원리를 설명하며 이를 위한 정언명령을 도입하는 전반부와 이런 정언명령의 가능성을 다루는 후반부로 나뉜다. 칸트는 자신의 도덕철학이론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 통계나 사례에 기초한 경험적 방식이 아닌 선험적 접근을 택했다. 그래서 세밀한 논증으로 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 일반의 상식에 호소하는 식으로 논증 사이의 도약이 빈번하게 일어나기에, 책을 읽어 나감에 있어 주목해야 할 점은 이론의 현실적 타당성 보다는 이론에 대한 온전한 이해인 것 같다. 칸트가 정의하고 분류하는 개념들과 이런 개념들 간의 관계, 이를 바탕으로 연속되는 논증을 이해하고 나면 책에서 칸트가 내세우는 이론의 큰 줄기는 보이는 것 같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집필함에 있어 다음 세 가지를 주요하게 염두해 두었던 것 같다. 우선 그는 동시대의 다른 윤리이론들이 가지는 한계성을 비판하고자 했다. 이런 이론들에 통칭하여 ‘일반실천철학’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자신의 이론인 ‘윤리형이상학’과 철처히 구분하고자 했다. 또한 그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에 주목하였지만, 이성만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은 이성만큼이나 경향성 또는 이해관심 등 비이성적인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선한 삶과 행복한 삶을 구분지었다. 인간에게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마땅한 따라야할 법칙들에 위배된 행위를 하기에 이 때문에 선한 삶을 위해서는 행복을 누림에 있어 이성과 의지에 의한 제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를 통해 도덕성의 최상원리의 탐색과 확립이란 목표를 이루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논의를 최고선이란 개념부터 시작하며 어떻게 하면 이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연속적으로 살펴보았다. 칸트는 세계를 초월하여 그 자체만으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을 ‘선의지’라고 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선의지가 행위의 가치판단에 있어 최상의 척도이기 까지 하다며 선의지의 내포 및 기능을 제시하였으나 외연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의지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제시해주었다. 재능, 기질, 인격적 속성 따위의 것들은 선의지에 해당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이 바람직한 가치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선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우연적인 요소로 인해 조건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 선의지의 개념을 심화시키기 전에 선의지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를 짚고 간다. 인간을 비롯한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이 가진 이성을 통해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자체로 선한 의지를 세우려는 목적과 그러한 능력을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것이 이성의 제1의 의도이고 나머지 행복감을 비롯한 감정을 얻는 것은 부차적인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
칸트는 선의지의 개념을 심화시키기 위해 의무의 개념을 도입한다. 개념의 도입과 함께 칸트는 행위에 대한개념의 분류를 시작한다. 행위는 의무에 어긋나는 행위와 의무에 맞는 행위로 나누어 진다. 의무에 어긋나는 행위는 이미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그렇지만 의무에 맞는 모든 행위가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는 않는다. 의무에 맞는 행위는 또다시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와 의무에서 비롯되지 않은 행위로 나뉘기 때문에, 행위가 의무에 맞으면서도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이어야 비로소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구호단체의 광고 등장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서 동정심이 느껴져 기부를 한다고 했을 때, 이 행위가 비록 의무에 맞는 행위일 수는 있으나,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행위의 주체는 동정심이란 경향성에서 비롯된 행위를 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행위가 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를 존중하며 의무로서 행위를 이행하는 동기(동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냉혈한의 의무에 따른 기부 행위가 동정심 많은 사람의 기부 행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어디서 기인했을까? 칸트는 의무에 따라 결의되는 준칙에서 찾는다. 칸트는 준칙과 법칙을 이항대립적으로 분석한다. 준칙은 욕구의 주관적 원리를, 법칙는 의욕의 객관적 원리를 뜻한다. 즉 전자는 그에 따라 주관이 행위하는 원칙이고, 후자는 그에 따라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행위해야만 하는 원칙으로, 각각 사실과 당위를 나타낸다. 만약 이성이 욕구능력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가지면 인간은 행위 원리로서 법칙을 따르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기에, 인간은 행위 원리로서 준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칙에 대한 존경은 가능하고 이를 실제로 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칸트는 ‘의무’를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라고 정의하며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가 곧 법칙에 대한 표상으로 여겼다. 의무에서 비롯된 행위는 경향성의 영향 및 의지의 대상을 일체 배제하기에 행위 주체자의 의지에서 질료적인 것은 없어지고 의지에는 형식만이 남는다. 의지란 이성이 경향성에서 독립하여 필연적으로 선하다고 인식되는 것들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 즉 의지는 법칙의 표상에 맞추어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능력으로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의지가 항상 이성에 의해서만 규정되지는 않기에, 불완전한 인간이 악하고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칸트는 이런 의지에 ‘훈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의지를 객관적 법칙에 맞게 규정하는 것을 ‘강요’라고 하며, 객관적 원리의 표상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 이를 ‘지시명령’이라고 한다. ‘명령’이란 지시명령의 정식(定式)이다. 명령은 선하지 않은 의지에 의욕(하고자 함) 형식의 일반적 원리를 따를 것을 지시한다. 결국 선의지는 의욕 형식의 일반적 원리에 따른 행위를 의미한다.
칸트는 기존의 일반실천철학과 달리 자신의 윤리이론을 경험에서 도출하지 않았다. 즉 실례에서 윤리적 행위의 표준을 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였다. 우선 실례는 최고선의 원형에 대한 모방이 될 수 없다. 또한 경험에 기초한 윤리적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과 항상 선한 가치로 인식될 수 있는 필연성이 결여되어 있다. 경험적 분석으로는 도저히 최고선의 가치를 도출할 수 없다고 본 칸트는 선험적 분석을 통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춘 최고선의 조건을 탐색하려고 했다. 따라서 선의지에 내재하는 의욕 형식의 일반적 원리 또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성적 존재자를 대상으로 한 명령 또한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녀야 한다.
칸트는 당위(해야 함)으로 나타나는 명령을 가언적 명령과 정언적 명령으로 구분했다. 가언적 명령은 명령을 통해 의욕하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으로 도구적-조건적 가치를 지닌다. 반면 정언적 명령은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명령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표상하는 것으로 내재적-무조건적 가치를 지닌다. 정언 명령과 달리 가언 명령은 명령의 내용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주어져야 하는 제한이 있다. 명령은 의욕 일반의 객관적 법칙과 이성적 존재자의 주관적 준칙과의 관계를 나타내야 하고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언 명령은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 명령을 지시할 수 없으므로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고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으므로 필연성 또한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정언명령만이 의욕 형식 일반의 원리에 적합한 명령의 정식이 된다. 이에 따라 칸트는 첫번째 최상의 실천원리를 도출한다.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 이를 ‘순수 실천이성의 원칙’이라고 한다.
‘의욕’은 하고자 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모두 함유한다. 따라서 보편적 법칙으로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으로 적합한 행위는 행위가 단지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보편적 법칙으로 존재하기에 타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자살 또는 이행불가능한 약속은 보편적 법칙으로서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반면에 자기계발 보다 쾌락을 우선시 하거나 이기적 개인주의를 보이는 삶의 태도는 보편적 법칙으로 가능하기는 하지만, 보편적 법칙으로 존재하기에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보편적 법칙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 가치가 있는 행위가 실천원칙으로 적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정언명령의 준수가 의무이어야 할까? 즉 앞서 도출된 실천 법칙의 근거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칸트는 절대적 가치를 가지는 것과 도구적 가치를 지니는 것을 가정했다. 인간을 비롯한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하며, 특정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반면에 이성적 존재자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에 단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칸트에 따르면 정언 명령은 최상의 가치를 지닌 실천을 강요하기에, 만일 실천의 주체가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고 모든 존재가 조건적 가치를 가진다면, 결코 윤리성의 최상원칙을 도출해 낼 수 없다고 보았다. 칸트는 이를 정언명령에 대한 최상의 실천 근거라 부르며 이에서 파생되어 나온 다른 실천명령을 제시한다.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이러한 ‘인간 존엄성의 원칙’을 칸트가 두 번째로 제시한 의욕 형식의 일반적 원리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될 것 같다.
곧바로 칸트는 이 둘째 실천 원리로 부터 셋째 실천 원리인 ‘보편적 법칙수립의 의지로서의 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라는 이념을 도출했다. 즉 칸트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준칙을 통해 보편적 법칙을 수립할 수 있는, 즉 입법자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인간의 법칙수립 능력에서 찾았던 것이다. 준칙을 통해 법칙을 수립한 인간은 주관적인 준칙을 세운다는 점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신의 준칙 하에 놓여있기에 한편으론 종속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간의 양가성에 도달하는 것을 칸트는 의도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칸트는 기존의 윤리학과 자신의 윤리학을 대조하고자 했고, 이러한 차이가 두 이론이 인간을 자유와 종속 사이 어디에 위치시켰는지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기존의 윤리학에서는 인간을 단지 보편적인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는 단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일 뿐이다. 반면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을 단지 자기 자신의, 그러면서도 보편적인 법칙수립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인간의 의지는 내부에서 수립된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전자에 따라 인간이 법칙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법칙에 강요하게끔 인간에게 특정 이해관심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렇다면 법칙 준수는 결국 조건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칸트의 윤리학의 관점에서는 인간은 자기법칙수립자이고 이를 의무로 받아들이므로 법칙 준수의 필연성을 담보할 수 있다. 칸트는 인간에게 법칙에 대한 종속을 의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도 그러한 법칙을 자신만의 준칙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자유의 길을 내주었기에 도덕성의 원칙이 지녀야할 필연성 조건을 충족할 수 있었고 기존의 윤리이론과 달리 최상의 원칙에 대해 탐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법칙수립자이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율적 존재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국 칸트는 인간이 수단적 가치가 아닌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인간의 법칙수립 능력에서 찾았고, 또 이에 대한 근거를 인간의 자율성에서 찾은 것이다.
칸트는 세계를 감성세계와 오성세계로 구분하였다. 현실적 인간은 두 세계 모두에 속해있다. 전자에서 인간은 경향성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의 법칙 아래에 종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았다. 후자에서 인간은 이성 이외의 것의 영향은 일체 배제한 채, 오로지 이성의 영향만을 받으며 자연에 독립하여 순수 이성에 기초하고 있는 법칙 아래 존재한다고 보았다. 감성세계에 속하는 한 인간은 종속적이고 오성세계에 속하는 한 인간은 자유롭다. 만약 인간 이성이 이성적 존재자에게 아무런 방해없이 실천적이라면, 즉 인간이 오성세계의 성원이기만 하다면 당위는 곧 의욕을 의미하며 자신이 의욕하는 것에 더 이상의 강요도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다른 동기들에 의해서 행위가 촉발되기도 하는 인간에게 당위와 의욕은 불일치하며 따라서 인간은 주관적 목적 및 필연성을 배제하고 보편적 법칙에 알맞는 준칙에 따라 행위할 것을 요구받는다. 궁극적으로 칸트는 경향성과 이해관심 등에서 벗어나 이성에서만 자신의 행위의 근거를 찾는 인간이 선의지를 가진 존재이고, 이를 이상적 인간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