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의론 - 법과 사회 정의의 토대를 찾아서
로널드 드워킨 지음, 박경신 옮김 / 민음사 / 2015년 4월
평점 :
드워킨의 <(고슴도치를 위한) 정의론>은 광범위한 법적, 도덕적, 윤리적, 정치적 논의들을 다룬다. 철학에 있어 회의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해서 도덕적 책임성에 관해 논의하고 이를 상술하기 위해 해석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도덕과 윤리의 통합이라는철학적 기획을 시도하려고 한 드워킨은 이런 기획에 있어 막강한 적수인 자유의지의 부재로부터 도덕적 책임의 부재를 주장하는 규정론을 비판한다. 자유의지의 난제로부터 도덕적 책임성를 구원한 드워킨은 윤리적 삶의 핵심을 규정하며 이런 삶을 위한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이 두 원리를 칸트의 도덕철학과 연계하여 윤리와 도덕을 연관시킨다. 이렇게 두 개념의 기반을 마련한 다음에 부조, 위해 등 도덕적 문제들을 나름 규명한다. 드워킨은 존엄성의 두 근본적인 원리로부터 자유와 평등이란 개념이 도출됨을 지적하며 앞서 두 원리의 관계처럼 평등과 자유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남은 장에 할애한다.
드워킨은 종류를 불문하고 철학적 회의주의를 거부한다. 철학에서, 특히 현대 도덕철학에서는 도덕적 명제의 진리를 확정할 수 없으므로 어떠한 도덕적 가치 판단도 존재할 수없다는 회의주의가 성행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크게 외적 회의주의와 내적 회의주의로구분된다. 외적 회의주의는 도덕적 명제를 1층위의 실체적 문제가 아니라 2층위의 메타적문제로 다룬다. 그들에 따르면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진리성을 지닐 수 없다. 드워킨은이에 대해 외적 회의주의가 전제하거나 주장하는 바 역시 도덕적 판단이고 이는 곧 자기모순에 해당하므로 오류를 지닌 입장이다. 반면에 내적 회의주의는 도덕적 명제를 2층위의 실체적 문제로 다룬다. 이런 입장은 자유의지의 문제에서 비관적 양립불가주의, 신의 부재에 따른 선악의 부재 등의 주장에서 나타난다. 드워킨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은 특정도덕적 논거 위에 토대를 두고 있으므로 겉으로 보기에 회의주의에 해당하지만 실제로는특정 도덕적 신념의 표명에 불과하다.
이런 회의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드워킨은 도덕적 문제를 다룸에 있어 어떠한 회의주의도 발을 디딜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도덕철학에서는 도덕적 책임성이 중요하게 논의된다. 왜냐하면 도덕적 책임성은 도덕 문제를 어떠한 방법으로 숙고할 것인가를 다루는 도덕 인식론의 문제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우선 드워킨은 일반적인 책임에 대한 개념 분석을 시작한다. 책임은 크게 덕성으로서의 책임성과 사람과 사건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적 책임성으로 구분된다. 또 덕성으로서의 책임성은 지적, 실친적, 윤리적, 도덕적 책임성으로 구분된다. 마찬가지로 관계적 책임성은 인과적, 소망상의, 배상적, 평가적 책임성으로 구분된다. 드워킨은 이 중 덕성으로서의 책임성에 속하는 도덕적 책임성을 다루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으로 책임성이 있는 사람이란 정합적인 원칙 또는 신념 체계를 진정성 있게 추구하는 사람을 뜻한다. 즉 도덕적 책임성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실효성, 정합성, 진정성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빈번히 자기합리화를 일삼는 사람들은 진심 없는 신념에 따라 행위하는것이므로 아예 신념체계 자체가 실효적이지 못하다. 또한 추상적인 원칙에 대해 적극적인 해석의 노력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진정성있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상충하는 도덕 원칙들로 인해 도덕적 분열증을 보이거나 도덕을 구획하여 상황에 따라 상이한 도덕 원칙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정합적이지 못한 신념체계를 구성했다고볼 수 있다. 그런데 드워킨에 따르면 사람이 도덕적 책임성을 준수하는 정도와 그러한 행위가 옳은 정도는 큰 연관성이 없다. 즉 책임성과 진리의 상관성은 어느 정도 약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덕에 있어 진리를 추구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진리에 관심을 두어야 회의주의와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적으로 책임성을 지닌 사람들 각각이 지닌 신념 체계의 내용은 불일치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이 도덕적 신념을 올바르게 구성하는 방식에는 일치를 보일 수 있으므로 도덕적 책임성과 진리가 아예 무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드워킨은 도덕과 윤리의 연관성을, 나아가 통합성을 기획하려고 한다. 이는 도덕적 원리의 정당화는 윤리적 삶의 고려에 기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칸트의 도덕 기획처럼 개인적 목표 설정이 타인의 대한 의무와 부합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선 드워킨은 윤리적인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한다. 윤리적 삶에는 잘 사는 삶과 좋은 삶이 있다. 전자는 마땅한 윤리적 의무를 따랐다는 사실에, 후자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드워킨은 윤리적 삶의 두 가지 개념을 예술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잘 사는 삶의 가치는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그리는 수행으로서의 가치에 비견되며 좋은 삶의 가치는 그렇게 해서 창조된 예술 작품이란 산물로서의 가치에 비견된다.
산물로서의 가치는 객관적이지만 예술에 있어서나 윤리적 삶에 있어서나 근본적인 가치가 될 수는 없다. 예술가의 예술적 행위나 그를 모방한 기계의 예술적 행위 모두 산물로서의 가치는 동일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술가의 창조물의 가치만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동일한 신념, 가치관에 따라 인생을 살더라도 외부적 환경 또는 도덕적 운에 따라 삶의 결과가 좋은지, 나쁜지는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윤리적 삶의 가치로 좋은 삶을 고려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행위의 결과에 상관없이 잘 사는 삶을 윤리적 삶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드워킨의 생각이다. 물론 잘 사는 삶이 항상 좋은 삶인 것은 아니며, 나쁜 삶이 항상 잘 못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드워킨의 요지는 윤리를 결과가 아니라 의무의 관점에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적 삶이란 곧 자신의 삶을 잘 사는 것이다. 이러한 잘 살기는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들 요건은 자기 존중의 원리와 진정성의 원리로 구성된다. 자기 존중의 원리는 우리에게 잘 사는 것의 ‘객관적’ 중요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중요성을 객관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란 삶에 대한 비판적 고찰를 통해 단지 좋아하게 된 것들이 아니라 경외하고 타당하게 여기는 것들의 중요성을 인식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쾌락주의와 같은 삶의 방식은 단순히 삶의 의미만을 맹목적으로 쫒을 뿐이므로 중요성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수준에 머무를 뿐이다. 진정성의 원리는 각자가 자신의 상황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가치들의 결에 어긋나지 않게 살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삶을 진정성있게 대한다는 것은 우선 우리의 삶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다. 또한 이는 비록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는 없으나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 또한 거부하고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삶을 의미한다.
드워킨은 두 가지 윤리적 삶의 원리의 도덕적 함의를 고찰함으로써 윤리와 도덕을 통합하려고 한다. 두 존엄 원칙 중 첫째인 삶의 객관적 중요성 인식 문제는 해석의 문제를 야기한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삶을 존중한다면, 타인의 삶의 객관적 중요성 역시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단지 우리 자신의 삶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될 뿐인가? 이에 대해 칸트는 삶의 객관적 중요성이 보편적 중요성을 반영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만약 우리가 칸트의 원칙을 따른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하기 때문에 이리하여 우리는 윤리와 도덕의 연결을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보편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이면, 윤리적 삶의 둘째 원리인 진정성의 원리의 훼손은 불가피해 보인다. 왜냐하면 타인의 삶을 비중있게 고려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은 제약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철학자들은 보편주의적 견해를 취하더라도 두 원리 사이의 타협을 통해 적절한 균형점을 모색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드워킨은 이러한 균형점 모색은 두 원칙 모두가 훼손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하며 타협이 아니라 해석을 통해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한다. 즉 우리가 칸트의 원칙이라고 통상 부르는 것을 드워킨은 가치에 기초하여 해석하려고 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격 또한 한낱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할 것을 명한다. 또한 이는 자신을 자율적 존재로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전자와 후자 각각 자기 존중의 원리와 진정성의 원리에 대응된다. 그런데 이때 자율적 존재라는 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제기된다.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특정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자유롭다는 통상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의 제정자인 개인이 도덕법을 준수함으로써 자유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이렇게 해석한 칸트의 도덕이론을 받아들여 우리가 보편적 법칙으로 의욕할 수 있는 준칙을 제정해 이에 따라 행위한다면 윤리와 도덕의 통합과 동시에 자기 존중의 원리와 진정성의 원리의 양립을 달성할 수 있다.
윤리와 도덕의 통합이란 토대를 마련한 뒤 드워킨은 부조의 문제를 다룬다. 칸트의 원칙에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 이에 따른다면 우리는 안녕(Well-being)과 같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를 목표로 두어야 한다. 타인의 삶의 객관적 중요성을 인정하는 태도만 보이면 될 뿐, 필연적으로 타인을 돕지 않았다고 해서 그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곤경에 처한 사람의 삶을 객관적으로 존중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에게 적극적인 도움을 건네줄 필요는 없다. 단지 그가 처한 상황과 어려움을 인정해주는 태도만 보이면 될 뿐이다. 그러나 타인을 적극적 행위가 아니라 태도로 존중하는 것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매우 추운 겨울날 거리에서 만난 걸인이 배고픔과 추위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경우라면 우리에게 태도만이 아니라 행동 또한 요구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한계를 판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드워킨에 따르면 이 기준이 해석적이고 이 기준은 다음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위해, 구조자에게 초래될 비용, 그리고 피해자와 잠재적 구조자 간의 마주하기가 이에 포함된다.
드워킨에 따르면 위해의 측정 기준은 최소한 공평하게 대우받아야 할 기회, 몫 들로부터 그 피해자가 얻거나 박탈을 당했는지 고려해야 한다. 이는 객관적 기준이다. 즉 피해자의 위험을 측정할 때, 피해자가 자신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비용 측정 기준은 구제 행위가 스스로 볼 때 잘 사는 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비추어 그에게 중요한 것에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이는 주관적 기준이다. 즉 그의 비용을 측정할 때, 구제 행위자 스스로 볼 때 잘 사는 것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제 비용을 측정할 때 우리의 선호도에 따라 판단하는 것에도 제한은 있다. 왜냐하면 어떤 근거-예를 들어 종교 또는 인종-에 의한 선호는 인류 존중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주하기’는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우선 특정화 측면이 있는데, 이는 나의 개입이 없을 경우 누가 해를 입을 것인지가 명확할 때 내가 개입할 필요성이 커짐을 뜻한다. 그리고 근접성 측면이 있는데, 이는 내가 위험이나 필요를 더 직접적으로 마주하면 할수록, 내가 의무를 부담해야 할 정도가 커짐을 뜻한다. 이렇게 기준들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타인에 대한 책무의 정도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드워킨은 위해의 문제를 다룬다. 탈개인적 결과주의에 따르면 작위에 의한 살인이나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나 결과의 측면에서는 동일하기에 둘을 같게 취급해야 한다. 그러나 본능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우리는 둘을 상이하게 다루며 일반적으로 후자보다 전자의 경우에 책임성이 더욱 경감되거나 아예 조각된다. 드워킨 이를 위해의 종류를 구분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 위해에는 경쟁으로 인한 위해와 고의에 의한 위해 등이 포함된다. 스포츠 경기에서 1등을 한 선수는 2등,3등을 한 선수에게 경쟁으로 인한 위해를 끼쳤지만 우리는 그 선수에게 도덕적 또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경쟁으로 발생하는 위해는 불가피하며 허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고의에 의한 위해는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문제시 된다. 윤리적 삶의 두 번째 원칙은 우리 개개인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소임상의 책임을 부과한다. 우리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에 대한 통제력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고의에 의한 위해는 우리가 이런 통제력을 행사를 방해한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위해를 가한 자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드워킨에 따르면 자유와 평등은 해석적 개념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많은 철학자들은 마치 그것들이 가치나 중요성에 대한 가설을 동반하지 않는 중립적 분석만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규준 의존적 개념으로 다루었다. 앞서 해석의 문제를 두 장에 할애하여 다룬 드워킨은 이런 철학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며 자유와 평등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제시한다.
드워킨은 자유의 개념을 하기 위해 자유와 자유로움을 구별한다. 자유는 자유로움에 속하는 것으로 그에게 있어 자유의 영역에 해당되는 권리만이 진정한 자유의 권리로 인정된다. 자유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움은 단지 방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제한된 영역의 자유를 다룸으로써 드워킨은 자유와 평등의 충돌 가능성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자유지상주의들이 과세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절도라는 주장을 하며 자유와 평등의 긴장관계를 묘사하고 있을 때, 그들은 사실 자유가 아닌 자유로움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양립을 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드워킨은 평등에 대한 잘못된 개념관을 비판하며 자신의 개념관을 전개한다. 드워킨은 윤리적 삶의 두 원리와 비슷한 정부의 정당성을 위해 필요한 두 원리를 제시한다. 첫째, 정부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동등하게 배려해야 한다. 둘째, 정부는 그들 자신의 삶에 대한 각자의 책임에 존중을 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두 원리를 통해 평등을 왜곡하는 잘못된 개념관들을 비판할 수 있다. 자유방임주의와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운명을 동등하게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반면에 복지의 지향은 국가가 개인들에게 어떤 삶이 윤리적인 삶인가에 대한 공동체의 판단을 강요하기 때문에 개인들 각자의 책임에 존중을 표하지 않게 되므로 이 역시 잘못되었다. 드워킨은 복지가 아니리 자원에 집중해야 함을 역설한다. 복지를 통해 평등을 실현하려는 국가는 그 수단으로 사후적 평등을 사용하는 반면 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시행하는 국가는 그 수단으로 사전적 평등을 사용한다. 드워킨은 가설적 보험 시장이라는 가상의 장치를 동원해 이런 사전적 평등을 가능하게 만든다.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함으로써 정부는 복지국가와 달리 개인의 책임을 온전히 존중해주면서도 모든 국민들을 동등하게 배려해줌으로써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다음 세 가지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윤리와 도덕의 통합, 과학적 영역으로부터 분리된 도덕의 고유한 영역 그리고 도덕적 가치들의 통합성말이다. 드워킨 일생의 지적탐구가 이 책에 들어있다. 그는 평생 동안 철학 밖의 적들과 철학 내의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철학적 문제를 다루려는 학자들로부터 철학의, 그 중에서도 도덕철학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 했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 내에서도 공리주의처럼 도덕에 대한 윤리의 종속을 요구하거나 실존주의처럼 도덕에 대한 윤리의 부정(거부)을 요구하는 사상들에 저항해 칸트의 지적 탐구를 이어받아 도덕과 윤리의 통합성을 기획했다. 드워킨의 이러한 노력이 학계 내에서 성공을 거두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드워킨이 말했듯이, 윤리적 삶은 좋은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잘 산 삶을 산 데에 있다. 그러므로 일생을 거쳐 일관되게 지적 탐구를 개진했던 드워킨은 그 성과에 상관없이 윤리적으로 가치있는 삶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