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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를 위한 투쟁 ㅣ 고전의 세계 리커버
루돌프 V.예링 지음, 윤철홍 옮김 / 책세상 / 2018년 4월
평점 :
19세기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은 로마법 연구의 선구자이자 목적법학의 창시자로서 당대 유럽전역에서 인기를 구가했다. 예링은 자신의 사상이 원숙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법조협회에서 어떤 강연을 진행했고 그 내용을 텍스트로 옮겨 출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 책 ‘권리를 위한 투쟁’이 탄생했고 이 책으로 예링은 세계적인 법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예링은 학창 시절에 법학뿐만 아니라 피아노 연주나 극작과 같은 예술 분야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예링의 문장들은 논리적이면서도 그 표현이 매우 문학적이다. 그는 핵심이 되는 내용을 매우 간단하지만 인상적으로 문장에 담아내는 솜씨가 뛰어나다. 일반적으로 법학이란 학문에 관한 책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편이다. 물론 이 책은 법학 자체에 대한 이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 내에서 개인과 공동체에 어떤 기능하는지를 실천적으로 다룬 책이니 일반적인 법학 서적과는 거리가 있다. 어찌되었건 예링은 법의 실천적 측면을 다루면서도 매우 강렬한 필체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에 여러 번 정독할 가치가 있다.
예링은 이 책을 쓰던 당시 시대상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 같다. 우선 예링이 활동하던 19세기 유럽에서는 낭만주의가 꽃피던 시기였다. 당대의 낭만주의적인 사고는 단지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역사법학의 이름으로 법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역사법학에 따르면 마치 길가의 꽃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법도 고대에 우연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고 법이 변화하는 것도 단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그런 설명에서는 예링이 강조하는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이 자리잡을 수 없다. 예링은 역사법학이 법의 생성과 변화의 모습을 경험적으로 잘못 묘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법 제정의 절차는 그와는 정반대임을 주장한다. 즉 새로운 법의 제정, 기존의 법의 개정 또는 폐지는 이 법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간의 대립과 투쟁을 전제로 한다. 오래전에 활기를 잃은 법들이 아직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법체계의 존속을 요구하는 자들의 저항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나타난다. ‘투쟁은 법의 과제이며, 법은 투쟁의 산물이다.’
역사법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예링은 인간들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법의 모습을 나타냈다. 그런데 법이 인간의 의지의 산물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법이 나에게 부여한 권리를 누군가가 침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나는 권리를 평화에 희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평화를 권리에 희생시킬 것인가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예링이 살던 19세기는 근대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의 물결을 거치며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인간사를 통틀어 경제적인 부유함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관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태동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예링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자본주의의 영향력 아래 위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했을 것이다. 권리를 주장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는 순전히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영역에 속한다. 대개의 소송은 금전상의 이익 문제와 결부되어 있을 뿐이니, 내가 소송을 통해 얻는 이익과 소송을 함으로써 잃게 되는 평화를 마치 경제학자들이 비용편익분석을 하듯이 저울질함으로써 선택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예링은 권리침해에 저항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 아니라 의무의 영역에 속함을 주장한다. 이때 의무는 개인에 대한 의무와 공동체에 대한 의무 모두를 포함한다. 우선 스스로에 대한 의무의 측면을 살펴보자. 인간은 동물과 달리 육체적 생존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생존 또한 요구된다. 그래서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인간으로서 존엄할 권리도 생명권뿐만 아니라 인격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생존 조건 즉 인격의 보존을 위한 조건 중 하나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려는 자의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 자는 자기 생애 가운데서 한순간이나마 무권리 상태를 허용하는 것이고 도덕적 자살을 택하여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자이다. 물론 예링은 불법을 객관적 불법과 주관적 불법으로 구분하며 후자의 경우만 법이념의 부정과 개인의 인격침해가 문제될 뿐 전자의 경우는 단순히 이익의 문제에 불과하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주관적 불법과 주관적 불법의 구분은 이론적으로는 의미가 있으나 현실적으로 둘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불법이 나의 권리를 침해 침해하는 것이 단순히 착오에 의한 것인지, 고의에 의한 것인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인격을 보존하기 위해 이에 대항해야 한다.
실제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 채무의 변제가 문제가 될 경우 양 당사자는 상대가 자신의 정당한 이익을 무시한다고 전제하며 소송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예링에 따르면 이때 그들 사이에 문제가되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법감정(Rechtsgefuehl)이라고 보아야 한다. 법감정은 자신의 인격이 자의에 의해 침해되었다고 개인이 판단할 때 발현된다. 법감정이 나타나는 것은 도덕적 생존이라는 사회적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직업 또는 계급에 따라 민감하게 느끼는 동기는 다양하다. 농민의 경우는 소유권이 침해되었을 때, 장교 계급의 경우 명예가 실추되었을 때, 상인의 경우 신용이 의심받을 때 법감정을 가장 강렬하게 느낀다. 예링은 법의식, 법적 확신 등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학문적 개념을 사용하기 보다는 법감정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이것이 모든 권리의 (심리적) 원천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법감정이 자신에 대한 침해에 반응하는 힘은 고통을 느끼는 능력과 침해에 저항하는 실천력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법감정의 건전성을 측정하는 시금석이 된다.
예링에 따르면 권리침해에 대응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 이는 독일어 Recht가 의미하는 객관적 의미의 법과 주관적 의미의 권리 간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도출된다. 통상적인 견해는 둘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 다룬다. 즉 권리의 존재 토대는 법규가 마련해 준 것이므로 권리는 법에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링은 권리가 법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법이 권리에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권리는 스스로의 실제적 실현을 통해 법규가 존속되도록 하므로 법규의 유지를 위해서는 권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예링은 전쟁터에서 도망치는 병사를 예시로 들었다. 수만명이 싸우는 전쟁터에서 한 병사가 무기를 내던지고 전장에서 이탈하는 행위가 만약에 보편화된다면, 적군과 격렬하게 맞서 싸우는 병사들의 사기마저도 바닥을 치게 되어 결국에는 적군에게 승리를 내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법의 규정에 따라 권리를 부여받은 자들이 하나둘씩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게 되면 언젠가는 그 권리는 소멸될 것이고 그로부터 그 권리를 규정하는 법규 또한 사문화될 것이다. 즉 권리는 법규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생명력을 법규에 되돌려준다. 이렇게 법과 권리의 쌍방적 관계를 파악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인에게 주어진 권리는 자신의 이익 범주 내에서 법률을 방어하고 불법에 대항하도록 국가가 그에게 준 수권(授權)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 자의와 무법이 대담하게 머리를 쳐든다면 이는 법규를 방어하도록 소명된 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증표다. 예링은 불법이 권리를 제자리에서 밀어낼 경우 불법을 탓할 일이 아니라 이를 허용한 권리를 탓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개인의 권리 주장의 공동체적 성격을 강조했다. 개인이 권리주장의 공동체적 의무를 자각하며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경우 그에게 의무감에 따른 법감정이 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투쟁은 법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반영된 것으로 예링은 이를 권리침해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성질의 항의라 하며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예링은 권리를 위한 투쟁의 개인적 의무와 사회적 의무를 고찰함으로써 법의 실천적,수행적 측면을 강조했다. 권리침해에 대응하는 개인의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는 그 동기의 (도덕적) 수준에 따라 가장 낮은 것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구분한 것인데, 순서대로 계산적 이익에 따른 것, 인격 보존을 위한 법감정의 발현에 따른 것, 의무감에 의거한 법감정의 발현에 따른 것이 있다. 그런데 예링은 개념상으로는 구분이 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계산적 이익에 따라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이기주의조차 자기 권리를 초월하여 법률의 대변자가 되는 이상적인 곳으로 스스로를 끌어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자의에 대한 투쟁이란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비추어볼 때 예링은 권리 투쟁의 세 가지 유형의 위계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어떻든 권리 침해에 대응하는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예링이 살던 시기에 사람들은 대개 소송을 이익의 문제로만 보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오늘날도 심하면 심했지 마찬가지이다) 예링이 진단하기에 이는 재산의 비윤리적 취득에 따른 건전한 소유권 의식의 변질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즉 부동산 및 주식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등 극단적 물질주의가 성행함으로써 소유권의 연원과 도덕적 정당화 근거가 노동에 있지 않게 되어간 것이다. 예링은 이런 현실을 목도하고 나서 사람들 간의 이해관계를 투쟁의 원인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그는 당대 사람들이 물질적인 기준에 의거해서만 소송을 제기하거나 자신의 호주머니가 두둑해 지는 경우에만 행동하려는 잘못된 가치관을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따름이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논지에는 계몽주의를 거쳐 대두된 자연권 사상과 이전 세대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흔적이 보인다. 예링은 이 책을 통해 인격(권)의 보존 또는 법에 대한 존경심이란 이유에서 개인이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도 있음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려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예링이 울리는 경종은 오늘날의 시대에서도 유효하다.
권리를 위한 투쟁의 주체는 단지 사법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공법 영역에서는 국가 공무원들이 법위반을 감시하고 자의를 처벌하는 공적인 의무를 지니고 있다. 경찰관이 강도 혐의를 받는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 법관이 피고를 법률에 따라 심판하는 것 모두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의 모습들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들 공무원이 법의 수호자에서 법의 파괴자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것은 관헌 스스로가 직무를 유기하거나 위반함으로써 법규에 반기를 드는 것인데 예링은 이러한 공직자의 불법을 그 어느 불법보다도 심각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최악의 불법으로 인하여 법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개인은 법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를 잃게 되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법의 영역을 떠나 자력 구제에 의해 스스로의 법감정을 관철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법 살인은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대표적인 불법의 유형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뇌물을 받은 재판관은 사형에 쳐해졌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몇 년전 우리나라에서 대법원장의 주도하에 바른 말하는 법관들을 사찰하거나 좌천시키고 심지어 청와대와 재판을 거래하기까지 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초유의 사법농단 사태가 생각났다. 아직까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버젓이 법복을 입고 있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씁쓸하기만 하다. 법을 최전선에서 수호해야 할 법관들이 오히려 불법을 일삼는데 이러한 현실에서 어느 누가 시민에게 법준수의 의무를 강요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현실이 조속히 개선되지 않으면 머지않아 김명수 대법원장을 상대로 발생한 화염병 테러보다 더 심각한 형태로 미하엘 콜하스와 같은 인물에 의한 범죄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정리하자면 권리를 위한 투쟁은 시민과 공직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의무이다. (공적 영역은 제외하고) 개인 간 투쟁의 영역에서 대립하는 양 당사자가 내세우는 권리의 옳고 그름은 이 책의 관심사는 아니다. 단지 예링은 투쟁이 법을 작동시키기는 유일한 기제라는 사실을 강조하려 했다. 소송을 통해서든 입법을 통해서든 형식과 상관없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금까지 예링이 전개한 기나긴 주장은 다음의 문장으로 요약된다. ‘법은 스스로의 존재를 투쟁하는 가운데 쟁취하거나 주장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