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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영화관과는 거리가 멀었던 어린 시절...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도 모를 무렵...주말의 명화 시간은 유난히 잠이 많았던 내 눈동자를 반짝반짝하게 만들었다. 특히 한여름 주말의 꿈속엔 유명한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이 무더기로 등장해 나를 긴장시켰다. 아마 내 키 한뼘정도는 괴물들에게 매번 도망다니다가 허방을 밟고 떨어졌던 수많은 꿈 덕택이리라. 이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는 왠지 그때의 공포영화를 떠올린다. 표범 여인, 감옥, 동성애자, 맑스주의자, 좀비...전혀 어울리지도 않을 법한 소재들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긴장시켰다.
소설 자체의 줄거리보다, 몰리나와 발렌틴이 나누는 영화얘기가 더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몰리나와 발렌틴의 밀고 당기는 관계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서,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 영화를 한편 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글로 영상미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완고한 맑스주의자인 발렌틴은 몰리나가 쳐놓은 거미줄에 점점 빠져든다. 그가 가진 정보를 캐기 위해 몰리나는 그를 점점 약하게 만들어 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몰리나 자신도 그 거미줄에 얽매여버린다.
인간이 어떤 틀에 얽매인다고 해도...인간일 수 있는 것은...바로 이런 인간적인 면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이해하고 그 와중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튼다는 것. 이 소설의 진정한 재미는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몰리나는 그 어떤 사상 속에도 속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지만, 그것은 자유라기 보다 속박에 가깝다. 교도소장과의 몰리나의 관계가 바로 그러하다. 반면에 발렌틴은 비록 감옥에 있지만, 자신의 혁명적 사상속에서 누구보다 자유롭다. 그 둘의 상황이나 역할 관계는 서로 엇갈리게 교차되며 둘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게 소설속에서 영화가 하는 역할이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런 재미를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사랑이야기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두지 않는다. 그는 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그 둘을 엮어주는 상황의 이미지에 천착한다. 소설의 두 주인공을 대변하는 영화속 주인공들의 관계가 점점 변화되고, 영화의 주인공들의 외양적인 모습들이 변하는 모습을 통해 발렌틴과 몰리나의 관계도 새로운 측면으로 열리게 되는 것이다.
마누엘 푸익은 이 두 주인공을 조명하는데 있어 카메라의 눈으로 이들을 바라본다. 이는 단순히 문체의 특수성을 떠나서 작가의 시선자체가 실험적이라는 뜻이다. 대중적인 인기와 작품성을 함께 얻었다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은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마누엘 푸익과 같은 작가들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