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끝내 쟁취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야 적어도 전쟁(한 개인의 전쟁이라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끝없이 삶을 대면하고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전쟁이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매우 혼란스러운 구조로 흘러간다. '나'라는 일인칭 화자가 풀어나가는 이야기와 그 화자가 객관적으로 바라보는'두오미'...이 두 인물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둘이다. 이런 구성상의 문제는 어느정도 이 소설의 독특한 매력이다. 이 흐트러진듯한 문체는 주인공의 모순이자 동시에 인간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성공하고자 하는 한 여성의 모습에서 남들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폐쇄적인 한 여성의 모습까지, 전혀 다른 인간형을 하나의 인간 안에 속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를 두려워하는 여자의 껍질깨기'란 너무 흔한 소재가 아니었던가? 그것도 꿈, 첫사랑, 강간, 유산, 실연 등의 순서로 흘러간다면 말이다. 틀에 박힌 인간의 삶을 소재로 다루었다면, 그 안의 인간의 갈등은 새로워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린바이가 '나오미'의 감정을 풀어가는 능력은 매우 탁월했다. 마치 흐트러진 실뭉치에서 고운 색의 실을 한올 한올 풀어내는 것처럼 신비로울 정도였다. 솔직히 감정이라는 것을 문자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시도인지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심지어 학교 백일장에서라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기본적으로 감정이라는 것은 문자화되게 만들어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작가는 물컵안에 풀려가는 잉크의 '색깔의 실'을 한올 한올 건져 올리는 것이다. 한 여성의 난폭하면서도 흐트러진 심리를 말이다. 가장 큰 폭력은 가장 큰 두려움에서 나온다. 두오미도 마찬가지다. 버려짐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커서 '인간관계'에 한해 자신에게 폐쇄성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끝없이 이상형이자 연인의 모습을 아름다운 여성에게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매우 모순된 양태라는 생각이 들지만...어쩌랴. 그것이 작가가 쓰고자 한 바인데...하지만 이 소설의 주제는 동성애도 아니고, 여성성도 아니고, 그저 한 작가의 개인적인 독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속에서도 나오듯이 그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스스로의 중얼거림이라고 해야 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