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매진 1
마키무라 사토루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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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현실'이라는 말과 '환상'이라는 말은 반의어인듯 하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는 그 현실과 환상을 반반쯤 섞어 놓은 듯 하다. 성격이 정반대인 엄마와 딸의 각각의 사랑 이야기가 어떨 땐 너무 부러울만치 꿈인듯 하다가도, 한참 환상에 빠져 들다 보면 어느새 현실이다.

엄마 미츠코의 사랑은 매우 특이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덜렁거리는 엄마, 하지만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하는 건축가의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겉으로는 자신감 넘치는 활달함을 가지고 있지만,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않는 소극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사랑의 모습은 화려하지만, 역시 그 안에도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사랑은 '환상'처럼, 인간은 '현실'처럼 보인다.

딸 유우는 겉으로 매우 단단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다. 사랑하는 상대에게조차 편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는 유우는 고독한 사랑을 한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진 것이다. 아무리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라도 어느 순간엔 서로 다른 곳을 보며 서로를 잊어버리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유우는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솔직함을 가졌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연인의 속마음을 알아버리자, 죽을만큼 괴로워면서도 자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떠나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말이다.

직장을 다니는 일본 여성을 소재로 한 만화는 참 많다. 하지만, 이렇게 그 인물들의 관계와 심리를 파헤친 만화는 드문 것 같다. 미츠코의 사랑과 유우의 사랑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이 만화의 특별한 재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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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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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미' 또한 유한한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미'라는 것도 순간적으로 느끼는 것이니 말이다. 사고나 편견이 끼어 들지 않은 시선으로 작품을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미술 이론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런 사고나 편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미술에 흥미를 가지고 한발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안내인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좋은 안내인의 구실을 충분히 소화해 내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림을 보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기독교나 천주교 등의 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터라, 성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 성화에도 얼마든지 당대의 현실과 사상, 사고를 담을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솔직히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그림은 골백번도 더 본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같은 주제를 다룬 수많은 그림들이 각각 의미를 가지는 것은 '어떻게 그렸느냐'라는 부분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전주의 시대의 그림이나, 르네상스를 전후한 그림 등에 대한 흥미도 전혀 없던 나에게 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던져주었다.똑같은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바로 관건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그림을 보는 방법이 하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솔직히 르네상스 그림과 야수파의 그림을 같은 기준에서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초현실주의 화가인 미로의 그림과 관련된 책을 얼마 전에 읽었다. 솔직히 고전적인 그림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둘을 비교해 본다면, 솔직히 둘 다 어렵다는 느낌을 준다. 미로의 그림이 어떤 사상적 기반으로, 어떤 표현양식으로 바뀌어 갔는가, 또는 고전 그림이 나타내고자 했던 상징과 은유는 무엇인가? 등등의 생각을 하다보면 그림으로 보고 충분히 마음으로 다가가기에 앞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럴 때 나는 '유명'과 상관 없이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먼저 생각한다. 이 책에도 유디트를 주제로 한 많은 그림도판이 실려 있다. 우선은 내가 느끼기에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먼저 살펴 본다. 그리고 그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읽어 본다. '천천히 그림 읽기'라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시대가 바뀌면 미의 기준도 변하고, 동시대의 개개인 또한 미의 기준이 다르다. 내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지...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미술 뿐만 아니라 여타의 예술 장르도 이는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여러 그림을 보여 주며 각각 다르게 그림을 읽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하지만 어떤 방법이 더 좋거나 우월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기 내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힘을 키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 말이다. 책에서는 단지 방법을 제시할 뿐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 정하는 것은 독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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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 프랑스 현대문학선 6 프랑스 현대문학선 6
르 클레지오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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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 자기 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물음들과 사고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풍경들 속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의미를 찾았을 때의 기쁨처럼 말이다. 공부에, 또는 일에 지친 마음으로 귀가하는 저녁 문득 하늘을 보면 붉은 노을이 매일 다른 색깔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도 이처럼 매번 다른 색깔의 층으로 움직이는 삶인 것이다.

이 책은 짧은 단상들... 한 페이지의 반을 겨우 채우는 아주 짧은 의미 덩어리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의 머리에서 태어난 이 수많은 생각의 덩어리들이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며, 인류가 후세의 인류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여백이 많은 이 책에는 작가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가 들어 있다. 짧은 글 하나에 삽화 하나. 하지만 이 삽화는 어떤 인물의 모습이나 풍경이 아닌 태초에 생명이 존재하기 전의 물질같이 단순하고 조잡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작가의 짧지만 순수한 정신이 드러나는 글을 읽고 이 아메바같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 내 속에 깨끗하게 비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극도의 정신, 극도의 순수 그 자체가 남아 온갖 불순한 마음과 생각들을 말끔히 비워주는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의 제목이 왜 침묵인 것일까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삶에서 침묵해버리는, 침묵해버릴 수 밖에 없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유년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인간은 왜 살까’라던지,‘죽음이란 무엇일까’라는 등의 추상적인 질문들을 했었던 어린 철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들은 나름대로의 해답도 찾지 못한 채 덜익혀진 채, 의식의 뒷편으로 접히고 말았다. 작가는 이렇게 뒤안길로 보내져 버린 많은 질문들에 대해 사색하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찾아내고 있으며, 때로는 다시 독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존재, 또는 죽음에 대한 수많은 작가의 생각들은 독백이면서 침묵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머릿속을 샅샅이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책을 쓸 수 있다니...라는 생각이 내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세상에 어떤 책을 보더라도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의문을 통째로 던져준 책이 있었던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작가의 짧은 글 아래에, 내 나름의 생각을 적었다. 도저히 그냥 이 작가의 물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가 없었다.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아, 햇빛은 원래 그런거구나라고 생각할 수 없고, 그 어떤 축복처럼 느끼게 되는 것처럼....그저 존재하는 작가의 수많은 물음들이 잠들어 있던 나의 의식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햇빛처럼 느껴졌다. 역시 이렇게 삶을, 나 자신을 의식하게 만드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생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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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역 민음의 시 87
김영남 지음 / 민음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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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펴고 시의 제목을 살펴보고 우선 당황했다. 보통 다른 시인들의 시와는 달리 제목이 대부분 긴 문장이었다. 게다가 그 제목들은 각각 도발적이며 감각적이었다.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벽은 우리들에게 넓이와 높이를 갖게 한다.', '그들은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는 속성이 있다', '요즈음 가슴들에는 가짜가 많다.', '입구가 숨겨져 있을수록 여자는 아름답다.'

이 도발적인 제목들을 작가는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시집을 펼치면 우선 호기심이 생긴다. 당최 말이 되는 듯도 하고 안되는 듯도 한...긴 문장을 늘어 놓고, 독자에게 '뭔지 알고 싶으면 읽어봐라'라고 말하며 의뭉스럽게 자기 속내를 눙치는 시인의 넉살이 독자들을 우선 자기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에로틱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시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를 살펴보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가 보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가서
한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

가쁜 숨을
기쁘게
내쉴 것들을 고르다 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워 있는 침대, 누워 있는 천장, 누워 있는 하늘......
저기 한 여자도
한사코 누워만 있는
바위를 올라타느라
가쁜 숨을
크게 내뿜고 있다.
여자가 슬슬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니까
귀엽다.
용감해 보인다.
아니, 불행해 보인다.
세상에!
오죽했으면 여자가 하늘을 올라타야 할까?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번 올라타 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전문-

이만하면 시인의 상상력이 어떤 폭인지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생경하게 갖다놓으면서도...시인의 시각을 통해 보는 세상이 매우 즐거워진다. 누워 있는 것이란, 실제로 바위였을 뿐 아니라....일도 제대로 못하며 게으름 피우는 상사며, 느릿느릿한 행정이며, 좀체 발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학문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바위를 타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약간 가벼운 투로 시를 진행시킨다 했더니...막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누워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진지한 공감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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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다는 것 창비시선 205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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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나온 이 시집에 나온 시인의 사진을 살펴보면, 1991년에 나온 첫시집 '뿌리에게'에 나온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선한 시인의 눈매와 치아를 약간 드러낸 수줍은 웃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91년에는 약간의 장난기가 감도는 웃음이고 2001년의 시인은 좀더 작고 서투른 웃음이지만 그 따뜻함은 그대로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람의 겉모습이 조금 바뀌는 동안 시는 많이 바뀌었다.

[어두워진다는 것]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거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시 전문-

이 시집은 매우 고요하다. 뭉근히 끓고 있는 곰국처럼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시간이 참 많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첫시집에서 보여주었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이제 차분히 제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위 시에서 단 1분 사이에 변해버린 것은 무엇일까? 그 1분은 그저 쉽게 쉽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으리라. 찰나의 시간을 순간 정지시켜 놓은 시인은 그 속에서 어둠을 본다.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시인은 조금 멈춰진 공간에서 쉬고 있는 듯 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 쌓여왔던 피로를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으며 삭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른스러움이 이 시집의 매력인 듯 하다. 혈기 왕성하여 아이들을 한소끔 아름답게 키워냈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그 지친 팔다리를 잠시 쉬어가며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인의 모습도 아름답다. 66년생인 시인은 이제 30대의 중반을 넘었다. 한고비를 넘겼달까? 삶을 되돌이켜 보며 조금은 멈칫하며 어딘가 미진한 듯한 삶의 공백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물에 닿으면 제일 먼저 젖어드는 곳이 있어/ 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 보지만/ 참 알 수가 없다/ 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 있을 뿐'

[흔적]이라는 시의 한 부분에서 시인의 마음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시 말고도 '뛰어내리는 것의 비애'나 '나이든 노부부의 길 떠남'이 시인의 시선에 잡히는 것을 보면 시인은 조금 회한에 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희덕 시인의 이 멈칫거림이 더 소중해 보인다. 오래 서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고단함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열심히, 충실히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 시집은 이렇듯 사색과 휴식의 공간이 되기보다는, 후회와 반성의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삶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나이를 천천히 숙성시켜가고 있는 듯 하다. 젊음도 아니고 늙음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에서 중간점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면 함께 휴식할 수 있다. 팽팽히 긴장되었던 마음을 조금 느슨히 풀어놓고 '어두워지는 것'조차 '아파오는 곳' 조차 곱게 쓸어안으며 시인과 함께 고요히 사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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