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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 프랑스 현대문학선 6 ㅣ 프랑스 현대문학선 6
르 클레지오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1990년 6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면 자기 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물음들과 사고들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풍경들 속에서 하나하나 새로운 의미를 찾았을 때의 기쁨처럼 말이다. 공부에, 또는 일에 지친 마음으로 귀가하는 저녁 문득 하늘을 보면 붉은 노을이 매일 다른 색깔로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도 이처럼 매번 다른 색깔의 층으로 움직이는 삶인 것이다.
이 책은 짧은 단상들... 한 페이지의 반을 겨우 채우는 아주 짧은 의미 덩어리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의 머리에서 태어난 이 수많은 생각의 덩어리들이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왔던 질문이며, 인류가 후세의 인류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여백이 많은 이 책에는 작가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가 들어 있다. 짧은 글 하나에 삽화 하나. 하지만 이 삽화는 어떤 인물의 모습이나 풍경이 아닌 태초에 생명이 존재하기 전의 물질같이 단순하고 조잡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작가의 짧지만 순수한 정신이 드러나는 글을 읽고 이 아메바같은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 내 속에 깨끗하게 비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극도의 정신, 극도의 순수 그 자체가 남아 온갖 불순한 마음과 생각들을 말끔히 비워주는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의 제목이 왜 침묵인 것일까를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삶에서 침묵해버리는, 침묵해버릴 수 밖에 없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부분들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유년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인간은 왜 살까’라던지,‘죽음이란 무엇일까’라는 등의 추상적인 질문들을 했었던 어린 철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들은 나름대로의 해답도 찾지 못한 채 덜익혀진 채, 의식의 뒷편으로 접히고 말았다. 작가는 이렇게 뒤안길로 보내져 버린 많은 질문들에 대해 사색하고 나름대로의 대답을 찾아내고 있으며, 때로는 다시 독자들에게 질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존재, 또는 죽음에 대한 수많은 작가의 생각들은 독백이면서 침묵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사람의 머릿속을 샅샅이 들여다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책을 쓸 수 있다니...라는 생각이 내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세상에 어떤 책을 보더라도 이렇게 자기의 생각을, 의문을 통째로 던져준 책이 있었던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작가의 짧은 글 아래에, 내 나름의 생각을 적었다. 도저히 그냥 이 작가의 물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구나’라고 고개를 주억거릴 수가 없었다.
환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보며 아, 햇빛은 원래 그런거구나라고 생각할 수 없고, 그 어떤 축복처럼 느끼게 되는 것처럼....그저 존재하는 작가의 수많은 물음들이 잠들어 있던 나의 의식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햇빛처럼 느껴졌다. 역시 이렇게 삶을, 나 자신을 의식하게 만드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생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