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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역 ㅣ 민음의 시 87
김영남 지음 / 민음사 / 1998년 2월
평점 :
품절
시집을 펴고 시의 제목을 살펴보고 우선 당황했다. 보통 다른 시인들의 시와는 달리 제목이 대부분 긴 문장이었다. 게다가 그 제목들은 각각 도발적이며 감각적이었다.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벽은 우리들에게 넓이와 높이를 갖게 한다.', '그들은 스크럼을 짜고 행진하는 속성이 있다', '요즈음 가슴들에는 가짜가 많다.', '입구가 숨겨져 있을수록 여자는 아름답다.'
이 도발적인 제목들을 작가는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시집을 펼치면 우선 호기심이 생긴다. 당최 말이 되는 듯도 하고 안되는 듯도 한...긴 문장을 늘어 놓고, 독자에게 '뭔지 알고 싶으면 읽어봐라'라고 말하며 의뭉스럽게 자기 속내를 눙치는 시인의 넉살이 독자들을 우선 자기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이다.에로틱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시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를 살펴보자.
'누워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올라타고 싶다'
나는 누워만 있는 것을 보면 올라가 보고 싶다.
그 누워 있는 것들에 신나게 올라가서
한번 가쁜 숨을 매몰차게 몰아쉬고 싶다.
가쁜 숨을
기쁘게
내쉴 것들을 고르다 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워 있는 침대, 누워 있는 천장, 누워 있는 하늘......
저기 한 여자도
한사코 누워만 있는
바위를 올라타느라
가쁜 숨을
크게 내뿜고 있다.
여자가 슬슬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니까
귀엽다.
용감해 보인다.
아니, 불행해 보인다.
세상에!
오죽했으면 여자가 하늘을 올라타야 할까?
나는 누워 잠자는 걸 보면 꼭 한번 올라타 보고 싶다.
누워 있는 상사, 누워 있는 행정, 누워 있는 학문......
-전문-
이만하면 시인의 상상력이 어떤 폭인지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생경하게 갖다놓으면서도...시인의 시각을 통해 보는 세상이 매우 즐거워진다. 누워 있는 것이란, 실제로 바위였을 뿐 아니라....일도 제대로 못하며 게으름 피우는 상사며, 느릿느릿한 행정이며, 좀체 발전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학문의 영역으로 확대된다. 바위를 타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약간 가벼운 투로 시를 진행시킨다 했더니...막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누워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진지한 공감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