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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 - 죽음에 이르는 가정폭력을 어떻게 예견하고 막을 것인가
레이철 루이즈 스나이더 지음, 황성원 옮김, 정희진 해제 / 시공사 / 2021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언제부터인가 당연하지 않은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던 여자들이 "그건 당연하지 않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껏 한번도 이런 지속적인 대규모 반발을 받아본 적이 없는 가해자 사회는 크게 당황하면서도 이제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위협적인 목소리로 "여자가 뭘 알아! 그건 당연한 거야!"라고 으르렁거렸지만 학습된 대로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여자들의 뒤를 또다른 여자들이 든든하게 받혀주면서 버티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른 피해자들의 태도에 당황한 가해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들은 한발 한발 천천히 내딛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런 책이 나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느 날부터 새삼스럽게 부상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빼앗는 사회적 이슈들이 몇 가지 있다. 21세기가 도래하며 새롭게 생겨난 문제들일까? 아니. (아마도)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문제들일 것이다. 사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늘 낭중지추였다. 누구 하나 대놓고 문제 삼은 적은 없었지만 다들 그게 문제라는 걸 눈치껏 알고 있었다. 때로는 학습된 오류로 인해 그게 문제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랬다. 그게 문제라는 걸 알지만 적어도 내 눈과 귀가 닿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서, 한낱 개인에 지나지 않은 내가 피로, 법으로 단단하게 엮인 인연들을 어찌할 도리가 도무지 보이지 않아서 외면했다. 그랬던 내가 '새삼스럽게' 가정 내 폭력에 대해서 재인식하게 된 계기는 COVID-19으로 인해 자가 격리, 외출 금지가 빈번해지면서였다. COVID-19으로 인해 가정 내 폭력이 부쩍 증가했으며 한탄스럽게도 COVID-19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여전히 한 지붕 안에 내버려두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기사들을 통해서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후속기사들을 많이 볼 수 없었지만 그 기사가 말 그대로 '터지고 나서'도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을 그러지 못한 경우가 열 손가락을 훌쩍 넘겼으리라.

사람이 가장 비참해질 때가 언제일까?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 자신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때이지 않을까? 아무리 오늘날의 가족관과 결혼관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모두에게 '가족'과 '결혼'이란 단어가 가지는 보편적인 이미지와 울림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그런 '이상적이고 평범한' 가족과 결혼생활을 구사하기를 희망하며 살아갈 것이고, 나머지는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포기하고 살아갈 것이다. 누구 하나 '따뜻하고', '웃음이 넘치는', '든든한 내 편이 있는' 집을 바라지 않으며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가 취재한 이 책 속 피해자들은,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기회를 잡지 못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피해자들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보편적 행복을 단 한번의 실수로 강탈 당했다. 거기다 모자라 수시로 납득 불가능한 이유로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으며 목숨을 위협 당하고 있다. 때때로 이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 한 줄기 빛처럼 공권력이 스며들기도 했지만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전보다 더 한 절망감만 안긴 채 스러지기 일쑤였다. 가족도, 법도 버팀목이 되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
안타깝게도 이 책은 그저 가정 내 폭력의 사례들만 전달해줄 뿐이지만, 부디 이 책이 그 어떤 책보다도 많은 관심을 받아서 내 주변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 이렇게 부당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이 흐느끼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당함을 인식한 피해자들과 일부 가해자들에 의해서 하나둘 바뀌어가고 있는 지금의 사회 속에서 또다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