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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바람이 되어
송은일 지음 / 예담 / 2012년 9월
평점 :
남자는 자신이 엄마의 질 밖으로 나오던 순간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여자간호사 두 명과 남자의사 한명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 뭐라 말을 했는데 그 음성이 잊히지 않는다고 여자에게 말했다. 지금 여자는 그때 그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을 때 여자는 피식, 웃었다. 이 이야기를 믿어야할 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기 전에 웃음부터 나왔다는 건 그의 말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여자의 표정을 읽던 남자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정말이라니까, 소리를 질렀다. 여자는 전생을 믿었다. 네 살 전의 아이들은 뱃속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는 말조차도 믿었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말을 믿지 못했다. 여자는 그동안 자신에게 믿음을 못 준 남자를 탓했다.
남자와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나서 여자는 생각했다. 남자의 말이 진실이었는지도 몰라. 어쩌면 남자는 자궁에 잉태되기 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내게는 모른 척 했을 거야. 전생에서 여자는 그저 그런 기생이었다. 두툼하고 거친 손이 천박했던 남자는 퇴기에게 오롯이 마음을 줬다. 하지만 여자는 돈 몇 푼에 남자의 마음을 버리고 후처로 들어앉았다. 한 남자만을 사모해서 은장도를 꺼내들고 절개를 지키는 따위는 기생에게는 사치였다. 돈 몇 푼보다 자신의 사랑이 못하다는 사실에 남자는 절망했다. 차가운 바람에 튼 입술에는 새된 목소리가 나왔다. 당신은 후회 할 거야. 술이 찌든 남자는 시린 겨울에 길에서 얼어 죽었다. 전생을 기억하는 현생의 남자는 여자에게 똑같이 갚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주고 마음을 거두었다. 여자는 이런 생각이 들자 내심 안도했다. 남자만이 기억하고 있는 여자의 잘못들을 여자는 후회할 수 없겠지. 그가 떠난 이유는 내가 아니라 내가 모르는 전생의 나 때문이야. 그렇게 자위하며 시간을 버텼다.
여자는 항상 현실이 힘든 이유는 지난 생에 잘못을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유행이었던 전생체험도 시도해 봤다. 나긋하고 낮은 음성에 잠만 쏟아졌다.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전생의 문을 열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새끼무당에게도 물어봤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을까요. 새끼무당은 전생에 얽힌 질긴 인연이 있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질긴 인연이 그이인가요, 묻기도 전에 새끼무당은 사라지고 없었다. 벗기고 벗겨도 계속 생겨나는 티눈처럼 마음 바닥에 깊게 뿌리박힌 그리움을 어떻게 없애야 하나요. 그이와 우연히 조우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비로소 사라질까, 여자는 갑자기 울고만 싶어졌다.
책은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된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환인과 그들이 속한 단체, 환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생에서 형사인 손재엽, 기자인 석해인, 소설가이자 다생환인이 유아리와 유아리의 트윈리턴피플-전생에는 한 몸이었던 인격체가 큰 충격이나 사건 등을 계기로 둘로 인격이 나뉘어 환생하게 되는-인 로즈이가밀러가 전생의 얽히고설킨 인연을 풀면서 생기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도 많고 전생의 이야기도 한두 가지가 아닌지라 쪽지에 인물관계도를 쓰면서 읽어야했지만 전생의 인연으로 인한 관계의 복잡함은 매우 흥미로웠다. 여러 환인들이 두개의 큰 사건에 엮이는데 하나는 연쇄 독살살인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아기 납치사건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 쫓아가다보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겠다. 예의치 않게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다생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궁금하면서도 무섭기도 하다. 삶의 기쁨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 속 대부분의 다생환인들처럼 감정이 넘쳐서 미치던가, 감정이 메말라서 사이코패스가 되던가 하겠지. 그럼에도 작금에 스치는 사람들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는 왜 만나고 헤어지는지 알고 싶기도 하다. 생이 누적되어 만든 인연의 겹은 도대체 몇 겹일까. 그 업을 풀 수나 있을까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진다.
유아리와 로즈밀러는 원래 한 몸이었다. 천국의 천사가 몸이 나뉘어 여자와 남자가 생겼고 한 몸이었던 둘은 서로를 그리워하다 만나서 사랑하게 된다는 전설과는 다르게 유아리와 로즈밀러는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한다. 소설 속에서도 도플갱어가 이와 똑같은 현상이라고 후에 나왔지만 먼저 퍼뜩 영화 도플갱어가 떠올랐다. 드류베리 모어가 주인공이었는데 순진한 여자와 팜므파탈을 넘나들며 연기를 펼쳤다. 나중에 한 몸이 둘이 분리될 때는 갑자기 이게 뭐야며 뜨악했던 걸로 기억한다. 도플갱어가 서로 맞닥뜨리면 한쪽은 죽어야 된다는 속설처럼 선과 악의 극단 속에서 서로를 죽이면 스스로를 죽이는 걸 모르고 상대를 미워한다. 하지만 소설 속에 유아리와 로즈밀러는 완전히 분리된 인격체이다. 그럼에도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내듯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비극은 거기서도 출발한다. 유아리와 로즈밀러, 그리고 그들과 전생에 인연이 닿은 많은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마지막 책장을 넘긴 이들만 알 수 있겠지. 인생은 어차피 미완으로 끝나는 것. 미완된 전생을 완성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현생도 어차피 미완이라는 점에서 모순이라는 걸 주인공들이 알아줬음 한다. 하지만 쳇바퀴처럼 계속될 악연이 암시되는 마지막 장면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계를 다시 만드는 건 작가로서도 힘든 일이었을 텐데 현실과 상상을 조화롭게 풀어낸 작가의 역량에 감탄했다. 작가로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도 엿보였다. '천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제목은 노래에서 따온 듯하다. 허나 처음에는 바람이 '천개'라는 게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천 갈래의 바람이 되어' 더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곱씹어 보니 '천개의 바람이 되어'도 괜찮은 것 같고 알쏭달쏭하다.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한 재밌는 소설이었다. 마지막으로 환생에 관해 꾸었던 내 꿈을 남기며 마치도록 하겠다.
다시 태어남은 있다. 그러니 죽음을 너무 무서워하거나 슬퍼하지 마라 . 전생과 환생 사이의 현생과는 다른 불멸의 生은 신들만의 영역. 비루한 인간일 뿐인 너는 범접할 수 없다. 전생과 현생과 환생 중 어떤 것이 진짜 너의 생일지 끝까지 알 수 없다. 그 三生의 얽힌 실타래 같은 복잡함에 그대가 미치지 않도록 망각이란 선물을 준 것. 말이 아닌 온몸을 통해 나보다 세번째로 큰 존재가 내게 말했다.
다음 생, 바로 내 아비가 될 자를 내 눈을 통해 보고 있었다. 이 生에서 죽자마자 난 남자와 결혼 할 여자의 자궁에 잉태될 것이다. 남자는 작고 쭉 째진 눈에 강단있어 보이는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첫인상은 무척 엄하고 고루해보였다. 난 계속해서 남자를 지켜봤다. 남자는 생각보다 환한 웃음을 지을 줄 알았다. 딸을 원하고 있었다. 남자의 딸이 어떻게 자랄 지 파노라마 처럼 내 머릿속에 펼쳐졌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보란듯이 일부러 보여주는 것처럼. 두번째로 나보다 큰 존재가 내 곁에서 속삭였다. 저렇게 좋은 부모 아래에서 행복하게 자랄테이니 현생이 잊혀짐을 억울해하지는 말라고.
하지만 잊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제발 기억을 지우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내가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꼭 기억해서 늦게라도 나를 잃은 아픔을 지울 수 있게, 찾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소리는 침묵했고 나는 방법을 계속 찾아 다녔다.
걸어서는 안되는 전화가 있다. 걸게 되면 죽음이 앞당겨지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죽음의 코앞에서 착신이 온다고. 그 공포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있다고. 하지만 전화를 걸었다. 알고 싶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잊지 않을 수 있냐고 물었다. '다음 생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가서 만나야 해요. 그게 내 삼생의 이유입니다 .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내가 기억할테니 지워지지 않는 법을 알려주세요.' 텔레마케터 같은 목소리의 여자가 딱딱하게 답했다.
'아주 옛날식 화장실를 찾아 더러워서 아무도 쓰지 않는 세면대 아래를 보면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듯한 해진 종이가 보일 겁니다. 그 명단을 작성하세요.'
혼자서 어떻게 그 화장실을 찾았는지 모른다. 화장실 안은 버려진 창녀들로 가득했고 그녀들은 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다. 화장실 안은 몽롱한 연기로 가득했고 여자들은 반쯤 뜬 듯한 눈으로 나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명단에는 스물네명의 이름들이 이미 올라와 있었다. 사랑이든 복수든 각자 나름의 이유로 이곳까지 왔을 테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이름과 기억을 지우지 못하는 이유와 현생에서 처음 개통한 휴대폰 번호를 기입했다.
화장실에서 비틀거리고 나오자 처음 보는 차와 사람이 나를 맞아주었다. 이 차를 꼭 타야 된다고 했다. 아, 이것이 저승으로 가는 차로구나. 아직 마지막 인사도 못했는데. 비장한 각오로 차를 탔지만 차는 나를 한적하고 평화로운 어느 공원으로 데려다 주었다. 거기에는 여동생과 당신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햇살은 봄빛으로 반짝였고 바람은 잔잔했고 다들 웃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같이 웃음이 났다. 그때 언제 들었는 지 모를 내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갑자기 벨이 울렸다.
'준비를 하세요.'
대답도 하기 전에 큰 고통이 가슴을 관통해서 온몸에 퍼졌다. 눈이 감기는 게 느껴졌다. 가물거리는 정신 넘어로 울먹이며 '언니. 왜그래. 정신차려.'라고 비명지르는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긴 호스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띠- 길게 심장박동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직 약속을 못했다. 다시 태어나면 잊지 않고 당신을 찾을테니 나를 당신의 삶에서 지우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을 못했다. 나는 이미 그 명단에 이름이 올려져 있는데 내가 다시 돌아갔을 때 내가 아닌 누군가가 당신의 기쁨이 되어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하나.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이 억겁의 생에서 혼자만의 기억으로 당신의 주변을 서성거려야만 하는 건가.
물 속에 오래 있다가 수면으로 올라온 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꿈에서 깼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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