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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엔자
한상운 지음 / 톨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종말이 온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이미 지옥에 발을 담갔다. 차라리 까맣게 모르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세상에 정의가 있을까. 오로지 욕망과 무지가 뒤엉켜 배부른 자들만 웃게 한다. 견디자, 언젠가는 나만의 지옥에도 꽃이 피우는 날이 오고 그들만의 천국에 심판의 천사가 강림할 날이 올테지. 심란한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미루었던 책을 읽었다. 주인공인 제훈은 강남 한복판 특급호텔 옥상에 설치된 부대에서 군복무 중이다. 짧게 사귄 여자친구인 영주가 이별편지를 보내서 탈영을 하고 싶을 정도로 심한 고민중이다. 누군가에게 서울 시내 한복판 빌딩 옥상에 부대가 있다는 말을 예전에 얼핏 들었다. 그때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던 곳이 배경이라니 내심 반가웠다. 화려한 도시에서 어쩌면 더욱 외로울 젊은 그들. 제훈의 처지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솔직히 나는 여자로서 군대에 있는 남자를 기다리는 걸 반대한다. 세상의 풍파가 그리 만만한게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어인지 20대 초반의 풋사랑의 열정은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다. 나도 그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은 씁쓸하지만 말이다. 책 말미의 파울로의 말처럼 미래는 모르는 일이다. 여자가 기다렸는데 제대한 남자가 군화를 거꾸로 신을 수 있다. 굳게 약속했는데 여자의 마음이 변해 군에 있는 남자가 상처 받을 수도 있다. 서로의 기다림을 끝냈지만 다른 이유로 관계가 시들어가 합의 하에 헤어질 수도 있다. 아니면 둘이 죽을 때까지 연인으로 살 수도 있다. 인생의 어차피 답이 없다. 하지만 조금 더 오래산 내가 보았을 때 군대시절을 보낸 둘이 오래오래 함께했다는 건 희박한 일이다. 우리는 아니라고, 변할 일 없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겠지만 확률로 봤을 때는 어렵다. 그러니 나는 차라리 군대가기전에 헤어지고 둘이 2년을 각자 보낸 다음에도 서로가 못견디게 그립다면 그때 다시 만나는게 현명하다고 조언해주고 싶다. 하지만 피끓는 청춘들이 어디 내말을 들을텐가. 그렇게 상처받고 상처주고 후회하면서 성장하는 거겠지. 뒤돌아서 나처럼 말하는 사람도 나올테다. 어리석음이 반복되는 것, 그것이 인생이고 역사 아닌가.
나는 가끔 좀비나 늑대인간이 나오는 꿈을 꾼다. 새까만 밤이다. 도시는 그 기능을 잃어 조그마한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다. 나를 뒤쫓는 흉악하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겁에 질려서 어디론가 도망가지도 못한다. 싱크대 밑이나 장롱 안처럼 나를 온전히 감쌀 수 있는 밀폐된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만 흘린다. 생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두려움만이 전생애를 지배한다면 어떻게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저들한테 당해 이지를 잊은 채 피에 굶주린 욕망으로 또다른 누군가의 뒤를 쫓느니 차라리 죽어버리자, 다짐한다. 그렇게 내 꿈은 끝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괴물들에게 항거할 배짱도 없는 내가 어떻게 될 지 잘 모르겠다. 지난 2012년 12월 21일에 세상이 멸망한다고 했는데 지구는 아직 잘 살고 있다. 만약 정말 종말이 온다면 당신의 모습은 어떠할까?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큰 재미가 되겠다.
책에서도 여러 군상이 나온다. 오로지 여자친구인 영주 구할 생각만 하는 주인공 제훈, 고문관이었지만 세상이 무너질 때 가진 지식을 잘 활용하는 인호, 딸이 세상을 떠난 후로 되려 종말을 기뻐하게 된 송중사, 좀비한테 상처를 입었지만 아직 정신을 멀쩡해서 사람도 아니고 좀비도 아닌 이상한 상황인 영만. 막다른 상황에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가 여실히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다. 모든 정신을 영주를 구하기에 쏟는 제훈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영주 집에 전화활 시간은 있고 가족들은 까맣게 잊고 있으면 어떡하나 싶다. 또한 진욱이 사지에 몰린 후 영주와 자고 싶어며 한번만 하자고 조르는 모양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덧붙여 나중에 영주와 맞닥드린 제훈이 그와 진욱이 잤는지 안잤는지에 연연하는 그 감정선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인간의 바닥을 묘사한 듯 한데 가슴에 잘 와닿지 않다. 차라리 이게 어떨까. 진욱은 영주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친구 생각에 갈팡질팡한다. 만나고 싶다가도 안된다고 타이른다. 그때 영주한테 제훈하고 헤어졌다며 우는 목소리로 전화가 온다. 진욱은 제훈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만나 마음을 돌려세워야 한다고 자기변명을 하고 자리에 나간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때 그녀를 누구보다 생각하고 지켜준다. 어장관리를 하고 있던 여자친구는 진욱의 마음을 이용해서 위험에서 벗어나려 한다. 여자친구만을 생각하며 부대를 탈출한 제훈은 둘의 모습을 보고 오해하고는 분노해서 둘을 총으로 쏴서 죽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어찌어찌해서 알게 되고는 미쳐버려 스스로 좀비에게 물린다.
막상 내 마음대로 써놓고 보니 책의 내용이 더 나은 듯 하다. 입체적이지 못하고 단순한 인물은 어쩌면 짧은 장르소설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한권에 다 담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판타지 소설에서는 중요한 세계관이 빈약한게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쉽고 재밌게 읽히는 장르소설의 장점이 충분히 살아있는 소설이다. 겨울이 아닌 여름에 읽었으면 모골이 송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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