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글쟁이들 - 대한민국 대표 작가 18인의 ‘나만의 집필 세계’
구본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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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루는 글쟁이들은 모두 18명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문교양 글쟁이_ 국문학 저술가 정민
미술과 대중을 이어준 도전적인 개척자_ 미술 저술가 이주헌
대중이 원하는 역사는 따로 있었다_ 역사 저술가 이덕일
삶과 글이 일치하는 글쟁이_ NGO 저술가 한비야
치열한 지식 전사, 진정한 프로 저술가_ 동양철학 저술가 김용옥
스스로 새로워지는 힘을 만드는 글쟁이_ 변화경영 저술가 구본형
교양만화의 아버지_ 만화가 이원복
“나는 고객 성공을 위한 가치창조자”_ 자기계발 저술가 공병호
좌절을 딛고 일어선 2모작 인생_ 과학칼럼니스트 이인식
너희가 아키비스트를 아느냐_ 민속문화 저술가 주강현
가장 뛰어난, 그러나 가장 불행한 글쟁이_ 만화작가 김세영
글쟁이 팔자는 타고나는가_ 건축 저술가 임석재
책은 집념과 오기의 산물_ 교양미술 저술가 노성두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지휘하다_ 교양과학 저술가 정재승
“나는 문필가여”_ 동양학 저술가 조용헌
옛 사람 마음을 읽어 들려주다_ 전통문화 저술가 허균
가장 이상적인 지식인 글쟁이의 모델_ 서양사 저술가 주경철
“나는 내 직업을 만들었다”_ 출판칼럼니스트 표정훈


위의 18명 중에서 변화경영 저술가 구본형편과 자기게발 저술가 공병호편은 읽지 않았다. 이유는 글과 사람 모두 관심 없어서다.

대부분 아는 글쟁이들이었으나(아는 글쟁이들이란, 최소한 그들이 쓴 책을 한 권 이상은 읽었다는 말이다), 건축 저술가 임석재 선생과 교양미술 저술가 노성두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책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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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우리의 자화상
임석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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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건축에 관심이 생겨서 이책저책 뒤적여 본 적이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건축의 관심은 주로, 우리의 전통건축과 중국의 전통 건축, 그리고 서양의 고대, 중세,근,현대의 건축이었으며 그것마저도 아주 피상적 관심에서 그치고 말았다. 

이 책은 그런 내게, 지금 내가 부대끼며 살고 있는 현실 속의 건축물을 눈 크게 뜨고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조형성, 사회성, 공간성 무엇보다도 사람과 건축과의 조화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해 준 책이다. 한 마디로 고마운 책이다.


1.
건축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우리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 책에 나오는 한 마디 말로 정의하자면,
아파트 담에 '나무' 그려 놓고 '푸르지오'라고 우기는 회사도 있다.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이걸 모방해 '푸르지요'라는 짝퉁 회사도 생겼다. 

2.
이 책을 읽으면서,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나는 아직 젊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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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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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기 전에 몸풀기(?) 용으로 읽었는데, 의외로 재밌었다.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은 분께 추천할 만하다. 더불어 '시학'을 읽기전에 몸풀기 용으로 뭐 읽을 것 없나? 하는 분께도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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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프런티어21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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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저서를 읽으려면 우선 '라깡'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은 국내에는 제대로 번역된 라깡의 저서(에크리)가 없다는 점이다. 라캉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평을 하고 소개를 한 책은 많으나(?) 정작 라깡의 저서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영역본을 찾아서 읽어 볼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라깡이란 이러저러한 평과 소개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몇 가지 흥미로운 주제를 제외하고는 지젝의 저서는 내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우선 제목부터가 관심을 확 끌었다. 자극적이지 않나. "죽은 신을 위하여"라니!! (물론 여기서 죽은 신이란 당연히 기독교의 유일신을 가르키는 말이다.) 

더구나 책의 시작도 마음에 든다. 시작은 이렇다.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 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취한다는 것, 신이 영원을 뒤에 남겨 놓고 한시적 영역인 인간의 현실로 내려온다는 것, 이것은 신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유한한 인간이 보기에는 신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것 같지만, 신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올라가는 것이라면?
셸링이 암시한 것처럼, 영원성이 한시성보다 못한 것이라면?  
영원은 수수 가능성의 상태인 불모, 불능, 무생명의 영역이며, 영원이 스스로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한시적 존재를 거쳐야 한다면?
신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것이 인류를 향한 은총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이 온전한 현실성을 획득하고 영원성의 숨막히는 제약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신이 스스로를 현실화하는 방법이 인간적 인식뿐이라면?"
- F.W.J. Schelling. <The Ages of the World> - 

동의하는 바는 아니나, 맘에 드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읽어가자 맘에 드는 몇 가지 문구가 또 튀어나온다.

* 그리스도의 희생의 궁극적인 메시지란?
"너는 욕망에 마음껏 탐닉하며 삶을 즐겨도 좋다. 내가 이미 그 값을 치렀으니!"

2천 년 전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예수라는 한 사람이 혹은 신이, 2천 년 후의 내 죄를 대속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나(왜냐하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내가 널 위해 네가 저지를 모든 죄를 대속 했으니 너는 죽어서 자연의 순환의 고리에 들지 말고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영원한 노예가 되어라고 그러면 어쩌냐고ㅡ.ㅡ;) 그래도 욕망에 마음껏 탐닉하란 말은 맘에 든다.
 
* 모든 철학과 종교는 하나의 목표, 시간의 감옥을 부수고 영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 궁극의 감옥, 숨 막히는 닫힌 공간이라면?
존재는 시간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인간의 경험을 항하여 열리는 것이라면?
 
* 영웅이란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배반당해야 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유다는 신약의 최종적 영웅이 아닌가? 
신의 계획이 성취될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고 영원한 지옥행을 감수한 것이 아닌가? 

*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독교도가 범할 수 있는 궁극의 죄를 범한다.(예수 그 자신은 기독교도가 아니었음을 지젝은 몰랐나? 뭐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같은(반드시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유일신을 믿고 있다는 것 아닌가.) 
믿음이 흔들리는 죄. 


재밌는 글들이 이 외에도 꽤 많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책 한 권을 몽땅 옮겨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쨌거나, 재밌게 읽긴 했는데, 지젝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좀 수준이하다. 뭐, 그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라는  법은 없으니까. 착한 내가 이해 해주자.  



 
사족 : 라깡을 이해하려면 프로이트와 소쉬르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라깡은 프로이트 이론에서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나아가 프로이트 이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라깡의 그 철학적 의미의 기본명제는 잘 알고 있다시피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 라깡은 레비-스트로스처럼 구조 언어학의 개념들과 이론들을 끌어들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젝을 한 번 읽어보려면(지젝 뿐 아니라 누군들 안 그렇겠냐만은) 책 값이 장난 아니게 들 거라는 점.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동안 자본이 곧 자유라는 등식이 불행하게도 나의 현실 속에서 유령처럼 내 등 뒤에 착 달라 붙어 있다는 점,만 뼈저리게 느꼈다는. 슬픈 소년의 아니 우울한 청년(?)의 분분히 떨어지는 벚꽃같이 농염한(?)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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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위대하지 않다 (양장)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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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같은 저자의 책 <자비를 팔다>를 읽은 후 바로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인데, <자비를 팔다>를 읽을 땐 그 내용은 차지하고,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해 어쩐지 낡고 녹슨 면도기로 면도하는 느낌이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술꾼의 해장술 같이 입에 착착 감기는 듯한, 그래서 술술 읽어 내려갔다. 아마도 번역의 문제이지 싶다. 이토록 재기 넘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저토록 투박한 글을 썼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먼저 소크라테스의 말로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나는 죽음과 신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너희들 역시 모른다는 점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지은이는 책의 시작을 어렸을적 경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그 외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옮겨 보면 아래와 같다.

1. 지은이가 어린이었을 때 그의 과학 선생이자 성경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힘세고 너그러운 분인지 이제 알겠죠?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와 풀을 초록색으로 만드셨어요. 우리 눈에 가장 편안한 색깔 말이에요. 만약에 식물들이 전부 자주색이나 오렌지색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히친스 왈 : 우리 눈이 자연에 적응한 것이지 자연이 우리 눈에 적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 아닌가.

2. 조물주의 창조물에 불과한 자신이 조물주의 뜻을 안다고 주장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억지로 꿰어맞추려고 헛되이 애쓰며 거짓으로 겸손한 척하는 성직자 혹은 신자들.

3. 암흑시대에 종교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안내자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는 눈먼 사람이 최고의 안내자인 것처럼, 그는 주변 지리를 앞이 보이는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낮이 왔을 때 눈먼 노인을 안내인으로 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하인리히 하이네 <사상과 착상> -

4. 유일신을 믿는 3대 종교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비참한 존재로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이 종교들은 끊임없는 복종, 감사, 두려움을 가르친다.

5. 성경이 인종청소, 인신매매, 노예제도, 신부 값, 무차별적인 학살 등의 근거를 제공해주기는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교앙 없고 조잡한 인간이라는 포유류가 엮어 놓은 책이니까 말이다.

6. 고대 캄보디아의 왕들은 메콩 강과 바삭 강이 매년 갑자기 범람해서 서로 하나가 되어 엄청난 수압에 의해 물길이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 톤레삽 호수로 다시 흘러들어 가는 날짜를 알아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신의 선택을 받은 지도자가 나타나 강물을 향해 거꾸로 흐르라고 명령하는 의식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홍해의 기적을 일으킨 모세도 그 장면을 보았다면 그저 압만 딱 벌렸을 것이다.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왕은 이 자연현상을 이용해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7. 어떤 사람이 잔혹한 반인류적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바탕에 신앙이 깔려 있을 가능성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운 반면, 신앙이 있는 사람이 인류애의 편에 설 확률은 기껏해야 동전던지기의 확률이다.

8. 자선사업이나 구호 사업이 등장하기 이전에 종교는 선한 모범에 의해 널리 퍼진 것이 아니라 성전과 제국주의라는 구식 방법의 부속물로서 전파되었다.

9. 종교는 아무리 유순하게 굴더라도 결국은 '전체주의적' 해법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해법에 따르면 믿음은 어느 정도 맹목적이어야 하고 사람들은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의 모든 측면을 더 높은 존재의 영원한 감시에 맡겨야 한다. 이 끊임없는 감시와 복종은 대개 무한한 앙갚음의 형태를 띤 두려움에 의해 더욱 강화되며, 사람들에게서 항상 최고의 품성만을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10. 어린이 마음에 충격을 주는 종교라면 결코 믿을 수 없다. - 토마스 페인 -

11. 아인슈타인은 어떤 랍비의 물음에 "인간의 운명과 행동에 간여하는 신이 아니라 '스피노자의 신'만을 믿는다고 단호히 대답했다.

12. 유일신, 그가 악을 막을 의지가 있으나,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하다.

그가 능력은 있으나,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다.

그가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 에피쿠로스 -

13. 토마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에 관흔 글을 쓴 뒤, 그 글이 그대로 자기 글 중에서는 나은 편에 속한다고 겸손을 떨면서 하나님이 직접 살펴보실 수 있게 그 글을 노트르담 제단 위에 놓았다.
어쨌든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글에 좋은 평을 내려 주셨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글이 하나님에게서 좋은 평을 받았다고 주장한 사람은 역사상 토마스 아퀴나스 뿐이다. 

14. 성 아우그스티누스는 방황하는 유대인 이야기와 유대인이 나라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의를 보여주는 거라며 몹시 즐거워 했다.
 
15. 철학은 종교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연금술이 효력을 다한 곳에서 화학이 시작되고, 천문학이 점성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처럼.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보다는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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