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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ㅣ 프런티어21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지젝의 저서를 읽으려면 우선 '라깡'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점은 국내에는 제대로 번역된 라깡의 저서(에크리)가 없다는 점이다. 라캉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평을 하고 소개를 한 책은 많으나(?) 정작 라깡의 저서는 없다. 그렇다고 내가 영역본을 찾아서 읽어 볼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아는 라깡이란 이러저러한 평과 소개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몇 가지 흥미로운 주제를 제외하고는 지젝의 저서는 내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우선 제목부터가 관심을 확 끌었다. 자극적이지 않나. "죽은 신을 위하여"라니!! (물론 여기서 죽은 신이란 당연히 기독교의 유일신을 가르키는 말이다.)
더구나 책의 시작도 마음에 든다. 시작은 이렇다.
"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 신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취한다는 것, 신이 영원을 뒤에 남겨 놓고 한시적 영역인 인간의 현실로 내려온다는 것, 이것은 신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유한한 인간이 보기에는 신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것 같지만, 신 자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올라가는 것이라면?
셸링이 암시한 것처럼, 영원성이 한시성보다 못한 것이라면?
영원은 수수 가능성의 상태인 불모, 불능, 무생명의 영역이며, 영원이 스스로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한시적 존재를 거쳐야 한다면?
신이 인간에게 내려오는 것이 인류를 향한 은총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신이 온전한 현실성을 획득하고 영원성의 숨막히는 제약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신이 스스로를 현실화하는 방법이 인간적 인식뿐이라면?"
- F.W.J. Schelling. <The Ages of the World> -
동의하는 바는 아니나, 맘에 드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읽어가자 맘에 드는 몇 가지 문구가 또 튀어나온다.
* 그리스도의 희생의 궁극적인 메시지란?
"너는 욕망에 마음껏 탐닉하며 삶을 즐겨도 좋다. 내가 이미 그 값을 치렀으니!"
2천 년 전의 (기독교적인 관점에서)예수라는 한 사람이 혹은 신이, 2천 년 후의 내 죄를 대속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나(왜냐하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내가 널 위해 네가 저지를 모든 죄를 대속 했으니 너는 죽어서 자연의 순환의 고리에 들지 말고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영원한 노예가 되어라고 그러면 어쩌냐고ㅡ.ㅡ;) 그래도 욕망에 마음껏 탐닉하란 말은 맘에 든다.
* 모든 철학과 종교는 하나의 목표, 시간의 감옥을 부수고 영원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아니라 영원이 궁극의 감옥, 숨 막히는 닫힌 공간이라면?
존재는 시간으로 내려갈 때 비로소 인간의 경험을 항하여 열리는 것이라면?
* 영웅이란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배반당해야 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유다는 신약의 최종적 영웅이 아닌가?
신의 계획이 성취될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영혼을 포기하고 영원한 지옥행을 감수한 것이 아닌가?
*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로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독교도가 범할 수 있는 궁극의 죄를 범한다.(예수 그 자신은 기독교도가 아니었음을 지젝은 몰랐나? 뭐 아무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같은(반드시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유일신을 믿고 있다는 것 아닌가.)
믿음이 흔들리는 죄.
재밌는 글들이 이 외에도 꽤 많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책 한 권을 몽땅 옮겨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쨌거나, 재밌게 읽긴 했는데, 지젝의 불교에 대한 이해는 좀 수준이하다. 뭐, 그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알라는 법은 없으니까. 착한 내가 이해 해주자.
사족 : 라깡을 이해하려면 프로이트와 소쉬르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라깡은 프로이트 이론에서 생물학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나아가 프로이트 이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새로이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라깡의 그 철학적 의미의 기본명제는 잘 알고 있다시피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을 위해 라깡은 레비-스트로스처럼 구조 언어학의 개념들과 이론들을 끌어들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젝을 한 번 읽어보려면(지젝 뿐 아니라 누군들 안 그렇겠냐만은) 책 값이 장난 아니게 들 거라는 점.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동안 자본이 곧 자유라는 등식이 불행하게도 나의 현실 속에서 유령처럼 내 등 뒤에 착 달라 붙어 있다는 점,만 뼈저리게 느꼈다는. 슬픈 소년의 아니 우울한 청년(?)의 분분히 떨어지는 벚꽃같이 농염한(?) 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