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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페미니즘
코트니 서머스 외 지음, 켈리 젠슨 엮음, 박다솜 옮김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딸아이가 아니였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아주 적었을 것이다. 초등학교시절 남자아이들의 출석번호가 늘 먼저인것이 의아하게 생각됐던 딸아이. 아빠와 엄마처럼 자신과 남동생의 주민번호 앞자리가 늘 남자들이 먼저인것이 아이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었나보다. 나역시 아이에게 명확한 대답을 해주지도 못했던것 같다.
여자아이기에 느꼈던 사소한 의문들조차 나는 왜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지. 문득 어렸을적 할머니께서 여자는 뒤웅박팔자라 남자 잘만나야 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내게 공부많이 하는 여자는 너무 똑똑하고 기가 쎄서 남자 잡아먹는다는 소리를 하셨던 할머니의 말씀에 서운했던 기억도 있다. 또 큰아이를 낳았을때도 이왕 힘들어 낳는거 아들을 낳아야지 딸을 낳았다고 밥값도 못했다는 형님의 말에 화가 났던 경험도 있더랬다. 첫손님으로 여자가 타면 재수없다던 택시기사 아저씨, 문앞에 누워있던 오빠를 넘어가면 어디 여자가 남자를 타넘고 다니냐면서 혼내던 아빠, 온갖 학원에 다니던 오빠에 비해 내게는 무엇하나 허락해주지 않던 엄마까지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비집고 나와 새삼 나역시 차별받고 살았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창비에서 출간된 [나다운 페미니즘]은 작가, 영화감독, 발레리나, 배우, 만화가, 가수까지 다양한 직업을 가진 페미니스트 44인의 글이 실려있다.
시나 만화, 노래까지 각자의 방법으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모습들과 여성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페미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서 부터 짤막한 역사와 고백과 에피소드을 통해 저마다의 메세지를 그려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인종, 장애유무, 젠더의 모습에 따라 다르지만 모든여성이 차별과 폭력을 경험한다는것을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나는 트렌스젠더와 페미니즘의 연관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배우 라번 콕스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트랜스젠더 여성의 인권과 페미니즘에 대한 그들의 생각으로 인해 그들을 조금더 이해할수 있었다.
세상에는 바꿀 게 참 많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당하는 인권 침해이자 젠더 불평등이 가장 잔인하게 표출된 관습을 없애는 데 힘쓰기로 했다. 전 세계의 여성 할례를 금기시키는 데 헌신하기로 결심한 거다. 남성들에게 여성들을 사랑하고 여성들의 가치를 인정하라고 설득하려면 여성들이 먼저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내 눈에 여성 할례는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가하는 지속적인 폭력이자 자기혐오의 증거다.(159p)
할례를 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여성 외부 생식기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잘라 내어 감염과 각종 합병증을 일으켜 죽을수 있고 할례를 당한 여성들은 평생 고통을 받으며 산다고 한다. 딸에게 여성 할례를 시킴으로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고 딸의 지참금을 통해 수입도 얻는다고 하니 그곳엔 여성들의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옛날 여성의 아름다운 발을 만들기위해 행해졌던 중국의 악습인 '전족'도 비슷하지 않을까싶다. 여성들에게 참 잔인한 악습과 문화다.
당신이 다음 세대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당신이. 이것은 당신에게 보내는 나의 편지다. 다도 당신도 석고인형으로 태어났다. 우리를 해치려고만 드는 세상에 스스로를 보호할 방도 하나 없이 던져졌다. 폭력이 우리의 인격을 조각했다. 당신이 인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은 크고 작든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폭력은 우리를 부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인격을 더 정교하게 만들기도 한다. 폭력의 손잡이를 쥔 그들보다, 우리가 정교하다. 우리가 미래에 가깝다. 우리가 옳다.(46p)
책속 한면을 장식한 정세랑작가의 글을 읽으니 중학교시절 상의 속옷을 검사하던 선생님들을 이해할수 없었던 내모습과 몸에 딱 맞춰져 불편한 교복을 입으며 짜증을 내던 딸아이의 모습이 겹쳐진다. 예전과 달라진게 없는 현실속에서 여자로 태어난 딸아이가 겪어야 할 불합리한 일들과 부딪혀야 할 난관앞에 위로가 되는 듯 하다.
[나다운 페미니즘]을 읽으며 다양한 경험과 증언으로 44가지 목소리를 담은 이책이 나에게 공감과 위로와 삶에 대한 용기를 듬뿍 담는 시간이 되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