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고독한 예술혼 이삭문고 2
엄광용 지음 / 산하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엄광용, [이중섭, 고독한 예술혼], 산하, 2006.

  작년, 2016년은 이중섭의 탄생 100주년이고, 작고 60주년의 해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이것을 기념하여 <백년의 신화: 한국근대미술 거장전 이중섭 1916~1956> 전시회를 했다. 꼭 가보겠다고 다짐했지만, 6월 초부터 10월 초까지 4개월간의 전시는 나에게 무척 짧았나 보다. 이런저런 바쁨과 게으름으로 관람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쉬움에 대한 보상이었을까? [이중섭, 고독한 예술혼]은 해가 바뀐 어느 날 저녁, 폐지 수거함에 빈 상자를 버리러 갔다가 우연히 주운 책이다. 표지에 뚜렷이 적힌 1010**학번과 박**이라는 이름, 아마도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느 학생이 읽은 책이었나 보다. 날름 집어와 읽기 시작했다.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부농의 가정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다. 지병을 앓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의 품에서 자란다. 누구와 어울리기보다는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소를 좋아했던 소년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평양 외가로 가서 종로공립보통학교에 다닌다. 졸업 후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는데, 여기에서 미술 교사로 화가 임용련과 백남순 부부를 만난다. 당시 임용련은 보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대학 미술학부에서 유학하고, 백남순은 일본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둘이 결혼하고 귀국해서 오산고보에 부임한 것이다. 이들 부부의 가르침은 이중섭에게 미술에 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한다.

  두 선생의 권유로 프랑스 유학을 하려 했지만, 이미 일본에서 형과 사촌들이 유학하고 있어서 중섭의 어머니는 먼 곳으로 가기보다는 일본으로 유학을 원했다. 1935년 도쿄에 있는 데이코쿠미술학교에 입학, 1936년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예술 전문과정인 분카가쿠잉으로 학교를 옮긴다. 동방의 루오, 조르즈 루오는 프랑스 화단에서 이름을 떨치던 화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그린 연작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중섭의 그림은 루오의 그림처럼 선이 굵고 힘찬 율동으로 꿈틀거려 동료들은 그를 동방의 루오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기에서 2년 후배로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난다. 그는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려고 했지만, 유럽의 전쟁으로 유학의 길이 막히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격변기 속에서 1945년 원산에서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하고,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꾼다. 다음 해에 첫아들이 태어나지만, 곧 죽는다. 아버지는 아들의 관에 복숭아를 쥔 어린이를 그린 그림 여러 점을 눈물과 함께 묻는다. 1947년 아들 태현이 태어나고, 1949년 아들 태성이 태어난다.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이중섭에게 정치색이 짙은 선전물을 그릴 것을 요구한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집안의 가계를 책임지던 형 이중석이 행방불명된다. 참혹한 전쟁의 틈에서 이중섭은 그동안 그린 그림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와 피난민 생활을 한다. 하루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종이와 물감을 사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담배를 싸고 있는 은박지에 못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친다.(p.119)

  1951년 따뜻한 남쪽 제주도 서귀포로 잠시 건너간다. 1952년 그림을 그리기 위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으나 극심한 생활고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인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중섭은 1953년 어렵게 배편을 구해 일본으로 가서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고 일주일 만에 돌아오는데,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된다. 이때부터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그리움을 담아 편지와 엽서 그림을 보내기 시작한다.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당시 미국문화원의 책임자 맥타가트가 은박지 그림 3점을 구매하여 미국 뉴욕 모던아트뮤지엄에 기증한다. 헤어진 가족의 그리움... 그림은 팔리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극에 달하고 이것을 달래려고 술을 입에 달고 산다. 고된 생활고와 거식증은 정신질환을 의심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1956년 영양실조와 급성 간염으로 서울 적십자병원 내과에 입원하고, 한 달가량이 지난 9월 6일에 숨을 거둔다. 그의 죽음은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영안실에 3일간 방치되어 있다가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친구들의 도움으로 화장되어 뼈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일부는 일본에 있는 아내 이남덕에게 보내진다.

  몇 년 전, 국내 미술품 경매사인 서울옥션에서 이중섭이 1953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유화 <황소>가 35억 6천만 원에 낙찰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마치 생전의 고흐가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그가 남긴 유작이 다른 대우를 받는 것처럼, 이중섭도 비슷한 길을 걷는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와 함께한 천재 화가의 말년은 생활고와 고독한 예술혼으로 41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바라던 프랑스 유학을 할 수 있었더라면, 가족하고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고된 인생길에 남긴 작품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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