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의 한 방울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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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키 히로유키, 채숙향 역, [대하의 한 방울], 지식여행, 2012.

Itsuki Hiroyuki, [TAIGA NO ITTEKI], 1999.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일까? 위로할 때 흔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는 말을 한다. 때로는 세상은 아름다워, 너보다 어려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말도 한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지만, 어느 누군가에게는 현실의 여건이 너무나 절박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말 솟아날 구멍이 있고, 살만한 세상인가? 헬조선이라는 키워드가 유행이고, 한 해 동안 미국의 총기 사고 사망자보다 국내의 자살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쩌면 위로조차 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사람은 모두 대하의 한 방울

  창랑(滄浪)의 물이 탁해질 때

  반(反) 상식의 권장

  심야 라디오 이야기

  오닌의 난이 주는 메시지

  후기

  사람은 모두 대하의 한 방울이다. 그것은 작은 하나의 물방울에 불과하지만, 커다란 물의 흐름을 형성하는 한 방울이며, 영원한 시간을 향해 움직이는 리듬의 일부이다... 1999년의 일본은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장기간의 불황으로 모든 것이 침체하었다. 한동안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며 형성한 물질주의는 대지진으로 무너지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 찾은 종교는 독가스 테러를 일으키며 사회 혼란을 가중한다. 매년 23,000여 명의 자살자가 있고, 구급차 안에서 목숨을 건지거나 구명 치료를 받고 소생한 사람은 이것의 네 배 정도 된다고 한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방황하는 시대였다.

  나는 지금까지 두 번,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선 반도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중학교 2학년 때이고, 두 번째는 작가로 일하기 시작한 후의 일이었다.(p.11)

  내가 자살을 생각하는 지점까지 내몰리면서도 어떻게든 거기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이 원래 엉망진창이고, 잔혹하고, 고통과 비참함에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p.37)

  일본의 원로 작가로 활동하는 이츠키 히로유키는 1932년 후쿠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한반도로 넘어와 논산에서 유아기를 보내고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1학년 때 평양에서 패전을 맞이하고 소련군의 치하에서 1년간 난민 생활을 하다가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탈출한 후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나 보다. 죽음의 그림자는 늘 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그 또한 두 번이나 죽음을 가까이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얻은 몇 가지 깨달음이라고 해야 하나?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고,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결국 혼자서 죽는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다른 이들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기에 기대할 것도, 절망할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천자우(旱天慈雨)라고 갈라지고 바싹 말라버린 대지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한 방울의 빗물이 감로(甘露)처럼 느껴진다는 뜻을 인용하며, 인생에서 만난 작은 것에 오히려 감동하고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탁세(濁世)라는 말이 있다. 탁해지고 흐려진 세상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원래는 불교용어에서 온 듯하다.(p.43)

  창랑의 물이 말고 투명할 때는

  내 갓끈을 씻으면 된다

  만일 창랑의 물이 탁할 때는

  내 발이라도 씻으면 된다(p.49)

  내가 사는 시대는 보는 입장에 따라 다른 평가를 하겠지만, 대부분은 한숨을 내쉬며 답답함과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 상황이다. 혼탁한 세상,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도태되는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이다. 탁세의 극치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대 중국의 굴원(屈原)과 어부의 대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굴원은 유능한 이상가 타입으로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자 한다. 이런 그에게 탁세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이다. 창랑이라는 큰 강가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을 때, 무명의 어부가 부른 노래는 좌절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의미이다. 물이 탁하면 발을 씻으면 된다.

  증명할 수 없는 일은 신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과학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만으로 사는 게 아니고, 시장원리만으로 생활하는 것도 아니다. 증명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을 믿으며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다.(p.59)

  세상의 상식에는 일반적인 인간으로서 맞춰간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개인적인 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직감이 '이 약은 먹고 싶지 않다'라고 하면 먹지 않는다. 내면에서 '수술은 받지 않는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그에 따르는 것이다.(p.67)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인류의 개념으로 공통된 인간이 아닌 유일무이한 나라는 존재가 있다. 다른 사람과 다른 나를 일반적인 상식의 틀에 가두지 않고 산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살로 이어져가는 근저에는 자신의 목숨이 그다지 묵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p.78)

  인간은 호흡이 멈추고 동공이 열리고 심장이 정지하면 죽음이 찾아옵니다. 혹은 뇌사에 의해 죽음이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그 순간에 사람은 죽은 것인가'라고 생각했을 때, 저는 '인간이 태어나는 데 열 달이 걸린다면 죽는 데도 역시 열 달 정도 걸리는 게 아닐까'라고 비과학적인 이야기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90)

  최근 통감하는 사실은 '인간은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가치를 지금까지처럼 그 인간이 태어나 노력하여 얼마만큼의 일을 이뤄냈는가-그런 덧셈 뺄셈을 통해 인간을 성공한 인생, 적당한 인생, 혹은 실패한 인생으로 구별하는 데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p.93-94)

  무명인 채 일생을 마치고,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일생을 마쳤다고 비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살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중요하지만, 그건 두 번째, 세 번째로 생각하면 됩니다. 산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큰일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전후 혼란의 시대를 헤쳐온 저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p.100)

  정신과 의사였던 프랑클은 인간이 이 극한상태를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동하는 것, 희로애락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감동 후에 오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친한 친구와 상담하여 뭔가 매일 하나씩 재밌는 이야기,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서로 그것을 들려주며 웃어보자고 결심합니다.(p.135)

  예전에는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치했기 때문에 인간의 학문과 문화의 체계는 매우 거대하고 통합적인 것, 전 우주적이며 종합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의 경우도 그러해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의학, 이슬람의 의학, 인도의 의학, 혹은 중국의 의학도 인간을 살아 있는 총체로 파악했습니다. 전체적인 균형 속에서 균형의 혼란이라는 것을 병의 원인으로 생각했던 듯합니다.(p.137)

  예를 들어 인간은 식후에 단것을 먹는다. 그리고 '아아, 맛있었어'라고 그 여운을 즐기면서 멍하니 여유를 즐긴다. 그 시간이 만일 30분이나 40분이라고 치면 이는 인간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일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에 다 먹고 바로 이를 닦지 않으면 충치가 생긴다는 식의 강박관념을 안고 서둘러 일어나 열심히 이를 닦는다. 한때의 식후 디저트를 즐기는 마음의 여유조차 잃어버린 상태에서 몸의 균형은 결코 잘 유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치아에도 좋지 않다. 오히려 자연치유력 같은 것에 맡기고 여유 있고 편안한 기분으로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게 치아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사고방식입니다.(p.144-145)

  '말로 다 할 수 없다'라든가 '형용하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마음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말을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말'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느끼고 싶습니다.(p.194-195)

  "자네에게도 언젠가 그런 진짜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날,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날이 오겠지. 유이엔, 그때는 그 외로움에서 도망치려고 한다든가, 그 외로움을 속이려고 해서는 안 되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고, 그 외로움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그런 자신의 마음에 충실히 따르는 게 좋아. 왜냐하면 진짜 외로움은 운명이 자네를 키우려고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지."(p.206)

  일반적으로 기쁨은 인간의 생명력을 높이지만, 슬픔은 반대로 이를 저하시킨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깊이 슬퍼한다는 것은 감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명력을 활성화시키고 면역력을 높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고민하거나 괴로운 생각을 하는 것,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 역시 인간의 몸에 중요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우울함이나 외로움 속에도 소중한 것이 있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배려가 있습니다.(p.220)

  NHK 심야 라디오에서 방송한 것을 엮은 부분은, 현실은 마음의 내전을 겪으며 자살하는 시대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살면서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더 가치 있다. 몸과 마음은 분리해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균형 있게 보아야 한다. 인간은 감동과 유머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웃음과 눈물이 있어야 건강하다. 자연치유력에 관해서 말하고, 말의 중요성과 한계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인간 본연의 외로움 그리고 기쁨과 슬픔...

  뜻밖에도 물질 우선의 사회가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준 한신, 아와지 대지진 이후, 경제적 번영에 대한 불신감이 단숨에 분출되면서 사람들은 내면적인 풍요로움, 즉 '마음'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의 시대'라는 말이 막 퍼지기 시작하려던 때, 이번에는 옴진리교에 의한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마음'이라는 것 역시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p.227-228)

  인간의 '정'이나 '비', 르상티망을 경멸하지 않고, 혹은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의 진정한 지성을 키우는 토양으로서의 감정, 정념이라는 것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p.247)

  저자는 전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나타난 후유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불교의 세계관을 기초로 하여 고전, 종교, 의학, 철학, 개인적 경험 등을 집약하여 자신만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의 현실에 필요한 메시지가 있다. 물질주의와 종교성의 양극단에 치우쳐 풍요로운 삶을 살기보다는 피폐하고 억압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살기보다는 불필요한 경쟁을 부추기며 서로의 것을 빼앗으려 하고... 마음의 내전뿐만 아니라 외부의 삶 또한 치열한 전쟁터와 같다. 여기에 섣부른 위로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라는 답을 준다. 사람은 대하의 한 방울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가치관과 신념의 차이로 전부를 받아들일 수 없지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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