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우주여행 - 한국 SF 단편선
양원영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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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영 외, [아빠의 우주여행], 황금가지, 2010.

  어느 의식 있는 작가가 더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절필을 선언하듯이 나도 의식(?) 있는 독자로 국내 소설은 이외수와 김진명을 제외하고는 읽지 않겠다는 절독을 선언한 적이 있다. 물론 기자 회견은 없었고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가 없었지만, 순문학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장르문학에 관한 차별을 지닌 국내 문단을 향한 일종의 객기 어린 반항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일본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으로 국내 작가의 추리소설에 이어서 이렇게 SF소설을 읽게 되다니, 아니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반가웠다. 아직도 편견과 선입견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외로운 글쓰기를 하는 이름 없는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아빠의 우주여행(양원영)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김현중)

  머리 사냥꾼(류형석)

  처음이 아니기를(정소연)

  스위치, 오프(정보라)

  애니멀 201(김두흠)

  아름다운 감금(임태운)

  해바라기(정희자)

  코르사코프 증후군(정해복)

  그녀를 만나다(곽재식)

  [아빠의 우주여행]은 10개의 SF 단편 모음이다. 주로 동호회와 웹진을 위주로 활동하는 국내 작가로 이루어졌는데, 30페이지로 이루어진 공상과학의 향연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의 세계관과 구성, 나름의 반전과 메시지는 기성의 어느 작품과 비교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다. 이런 유의 글에 익숙한 이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매우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마디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다.

  "우주여행."

  "뭐?"

  "지구 밖으로 나가 보고 싶었어. 화성에도 가보고 우주 정거장에도 가보고. 우주의 끝이 어딘지도 알고 싶고."(p.13)

  보호자 안드로이드는 국가 복지의 목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고아인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보육하는 보호자를 제공하는 것이다. 일곱 살 때 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 정교하게 아빠와 똑같은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와 12년을 살았다. 이제 곧 성인이 되어 반납해야 하는데, 심경이 복잡하다. 기한을 얼마 남기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물으니 뜻밖의 대답을 한다. 우주여행을 하고 싶다는...

  대뇌반구간 보조신경연결체 삽입술. 일명 아인시술(AIN)... 예전부터 좌뇌와 우뇌의 원활한 소통이 높은 지능과 관계있다는 설이 제기되어 왔었는데, 한스 크뢰벨 박사는 포유류의 뇌량(좌, 우뇌를 연결하는 신경섬유다발)은 은과 지르코늄 합금으로 된 미세한 바늘을 삽입하면 신호전달 흐름이 좀 더 활성화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수차례의 침팬지 실험을 통해 그는 이 수술이 지능 활동을 최대 15퍼센트까지 개선시키며, 아무런 생리적 거부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p.33-34)

  뇌를 활성화해서 똑똑해지는 수술은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자식에게 이 수술을 받지 않게 하는 부모는 거의 없었다. 수술 후 2주간의 회복을 거치면 이마 위로 꼬리를 내린 자국이 남는데, 이것으로 수술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구분된다. 가난으로 비인가 의료기관을 찾아 불법 수술을 받는 사람이 생기는데...

  사람의 기억을 읽어서 저장해 높고 죽을 경우에는 저장한 기억을 다른 무기물(無機物) 신체에 이식하여 되살려 낸다던가, 보존을 위해서는 뇌수술을 통해 탐침을 심어야 하는데 어린 아이는 뇌의 발달 정도가 부족해서 그런 수술을 하지 못한다던가.(p.65)

  뇌를 인공 신체에 이식해서 기억을 보존할 수 있다. 뇌를 손상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기억을 재생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머리 없는 변사체가 발견된다. 헤드 헌터라는 별명을 가진 범인은 머리를 잘라 기억보조 장치를 섬세하게 절단해 간다.

  나노기술과 체세포 복제를 활용한 대체 장기 개발은 몇 십 년째 연구되고 있는 분야였다... 나노봇으로 이루어진 주형틀이 세포 복제가 완료된 후 저절로 분해되고 나면, 생생한 세포로 이루어진 주형만 남는다... 이 연구의 최대 난점은 구조가 대단히 복잡한 인간의 장기 틀을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 였고, 이 장기적인 문제에 앞서 당장 급한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들은 완전한 복제 장기 대신 이미 사용되고 있는 인공 장기에 체세포를 복제해 붙여 거부반응을 막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p.94-95)

  발생한 전염병 SDT는 혈액이나 체액의 접촉으로 감염되는데, 이 바이러스는 면역 체계를 교란시켜 정상적인 장기를 외부에서 침입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면역력이 거부반응을 일으켜 자신의 장기를 공격해 파괴하는데, 면역 억제제도 통하지 않는다. 마지막 방법으로 대체 장기 이식만 남았다.

  초록색 언니가 다니는 병원에는 우리 아빠가 있다. 아빠는 거기서 여자애가 되고 싶은 남자애나 남자애가 되고 싶은 여자애들을 마음에 들게 바꿔주는 일을 한다... 아빠는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람 몸속에는 스위치가 있거든. 여자애한테서 그걸 끄면 남자애가 되고, 남자애 걸 끄면 여자애가 되는 거야.(p.105-106)

  행복을 통제하는 사회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회, 심지어는 살면서 원하는 대로 성별을 바꿀 수 있다.

  미래생명과학연구소에서는 태아의 세포 조작을 통한 질병 없는 아이 탄생, 배아줄기 세포를 이용한 질병 치료, 복제인간 실험, 냉동인간 실험 등을 연구하고 있다.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미래생명과학연구소가 하는 일은 따로 있다.

  '인간병기 양성'(p.133)

  연구소에 새로 온 총책임자는 그곳을 농장이라고 부른다. 실험 대상을 농작물이라고 하고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다. 비인간적인 실험이 자행되는 동안 가장 우수한 품종인 애니멀 201이 그곳에서 탈출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T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매일 반복되는 음식의 맛도, 출입구 따윈 없는 회색 공간에 대한 저주도 아니었다. 오직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그나저나.

  대체.

  난 누구인가.(p.178)

  어딘가에 있을 탈출구를 찾기 위해 수도 없이 건물의 벽을 두드리고 긁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영문모를 회색의 공간에 갇히게 된 T.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누구인가?

  과학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별은 타원형의 공전주기를 갖고 있으며 주위 항성들 간의 중력 간섭으로 주기가 일정치 않다. 태양에 가장 근접하는 시기는 대략 3년 안팎인데, 그나마도 하늘이 먹구름에 싸여 있으면 태양을 관측할 수가 없다... 그 날이 오면 배는 천장을 활짝 열고 모두들 광장으로 나와 태양 아래 춤추고 노래하며 해맞이를 한다.(p.189-190)

  1400년 전에 지구에서 탐사선이 이 행성에 도착하였고, 얼마 후에는 대규모 조사단이 도착하여 지구화(Terraforming, 테라포밍) 과정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철수를 거부한 소수의 인원은 선박형 부유 도시에 남았지만, 지구연합 정부에서는 초소형 국민 체로 간주할 뿐이지 정식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 봤자 옛날의 이야기이고 지구와의 교류가 끝난 지는 1000년 가까이 되었다.

  의사는 남자가 지난 20년간의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다. 종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긴 기억 장애 증상이고 냉동수면에 들어가기 직전에 단 몇 초 전 일도 기억을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고 했다. 다양한 치료법도 전부 통하지 않았고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완벽한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냉동수면 후에 치료하는 것을 결정했다. 남자는 사인을 했고 지난 8년간 그는 긴 잠을 잤다.(p.232)

  냉동수면에서 깨어난 남자는 지난 20년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유두체 이상으로 심각한 기억장애가 발생하는 건망 증후군(코르사코프 증후군)으로 판단된다. 정신 착란, 흥분, 치매, 기억장애의 증상을 보이는데...

  옛날에 부자 노인들이 제일 겁내는 게 알츠하이머였거든. 뇌세포가 막 망가지는 알츠하이머 말이야. 그래서 갑부들 치고 알츠하이며 연구하는 기금, 재단에 돈 안 퍼부은 사람이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그쪽으로만 어마어마하게 기술이 발전해서, 알츠하이머로 망가진 뇌세포 되살리고 보존하고 하는 기술은 기막히게 말도 안 될 정도로 정교해졌다고. 그러다보니까 그 기술로 뇌를 떼어내서 새 몸에 옮겨 넣는 뇌 이식법도 다 가능해진거지.(p.297)

  신종 인플루엔자의 감염으로 심장과 폐는 기능을 잃고 온몸은 망가졌지만, 아직 정신은 멀쩡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실험적인 치료법으로 뇌 이식이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고 20개월 동안 재활 치료를 받은 후에 드디어 사랑하는 그녀를 만나러 간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다소 허황하고 황당한 상상이지만, SF의 세계에서는 이보다 더 기발할 수 없다. 안드로이드와의 정으로 인간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첨단 의료 과학 기술 사회에서 생명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각각의 단편 마다 특별한 세계관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줄거리를 이어가다가 생각지 못한 반전으로 읽는 재미를 더한다. 인간과 똑 닮은 로봇, 인위적인 시술로 지능을 높이고, 대체 장기뿐만 아니라 인공 신체에 뇌를 이식하고 기억을 저장하고 재생할 수 있는, 냉동 수면으로 치료의 발전을 기다리며, 지구를 대신하는 다른 행성에서 사는 미래...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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