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개의 별
김광호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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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52개의 별], 책밭, 2012. 

 

  현실에서는 베일에 가려서 실제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의 주요한 이야깃거리 중의 하나는 정보 요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첩보물이다. 과거 냉전 시대의 영향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진영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 진영의 대립, 대량 살상무기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와 이를 막아야 하는 특수 기관의 대결, 그리고 막대한 이권을 두고 벌이는 기업 간의 치열한 경쟁... 등은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지금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여 파렴치한 범죄를 기발한 상상력으로 파헤치는 스릴 있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이러한 소설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념의 대립과 분단된 조국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는 어쩌면 창작에서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동안 내가 본 것은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체제의 우월성과 권력의 홍보 수단으로만 사용되는 것뿐이었다. 러한 상황에서 국가정보원을 소재로 하는 김광호의 [52개의 별]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국정원 안보전시장에는 52개의 별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고, 별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국정원 활동 중 순직한 52명의 넋을 기리는 명패였다. 내가 그곳에 처음 섰을 때 느꼈던 것은 그들의 충성심에 대한 감동이 아니었다. 나도 저렇게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아니었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남들과는 다른 세계에 들어섰고, 그 세계는 죽음도 받아들일 정도의 애국심을 요구하는 곳이라는 강렬한 현실 인식이었다.(p.10)

 

  우리의 근대사와 마찬가지로 국정원의 역사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 독재 권력의 하수인으로 통치자의 눈과 귀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는 안기부를 거쳐 민주화가 된 이후에 국가정보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소설은 진보와 보수 어느 한 편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렇게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듯이 인생은 뜻대로만 풀리지 않는다. 자신이 아무리 결백한 삶을 산다고 해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면 고난을 겪게 되어 있다. 불운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고통과 좌절을 겪는가.(p.47)

 

  소설은 회고록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나'로 표현되는 윤정태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국정원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이것이 글을 쓴 작가의 실제 경험인지 아니면, 순수한 허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故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를 실제 배경으로 하는 팩션이다.

 

  정태는 남들에게 주목받지도 않고 소외되지도 않은 평범한 삶을 원했다. 하지만 자기 일을 성실히 할수록 점점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간다. 국정원 산하 국내방첩국 소속으로 처음에는 국내외 주요 인물들의 보호를 책임지는 신변 안전팀이었으나, 탈북 고위 인사들을 보호하면서 현실적인 문제를 보고 함으로 정책의 전면적인 수정이 이루어지고 상부의 눈에 들게 된다. 주임으로 승진과 모범 요원으로 선정, 이어서 대북공작팀과는 다르게 남북회담을 실무적으로 지원할 새로운 팀의 팀장으로 발령된다. 그리고 베이징에서의 역사적인 남북회담...

 

  남북관계 악화를 우려해서 망명을 덥석 받아들일 수 없는 정부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망명 요청에 대한 최소한의 대책이라도 있어야 옳았다. 그냥 내버려 두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일단 회담 성공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임무야."

  "김만길은 남한 정부를 믿고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킬 수밖에."

  "한 인간의 자유를 선택하려는 의지도 회담의 성공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p.188-189)

 

  남북의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미국을 비롯한 대외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부시의 공화당 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협상이나 원조보다는 힘으로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들에게 북한은 미사일 방어체계(MD) 배치를 위한 명확한 구실이었다. 어떻게든 남북의 평화 무드를 깨야 했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의 의지는 분명했다. 그런데 어렵게 진행되는 회담에서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회담에 참가한 북한의 고위급 인사가 망명을 요청해 온 것이다. 냉혹한 스파이들의 세계에서는 조직의 명령이 최우선이겠으나, 한 민족이 분단된 남북의 상황에서 정태는 인간적인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일은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는데...

 

  [52개의 별]에는 할리우드식의 액션이나 스릴이 나오지 않는다. 영미권이나 북유럽의 서스펜스나 미스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한 요원의 인생과 남북한의 현실이 들어 있다.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은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 완벽한 팩션이 되었다. 내용의 전개는 현실성이 뛰어나고 매우 사실적이다. 각각의 챕터는 완결성을 가지고 있어서 짜임새가 훌륭하다. 하지만 인물 간의 갈등 구도가 짧고 반전이 약해서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종북좌빨'이라는 선동 구호가 난무하는 시대에 과거 정부에 대한 묘사를 하기가 쉽지 않은데, 객관성을 유지하며 적절하게 서술한 작가의 글솜씨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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