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
도노 하루카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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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노 하루카, 김지영 역, [파국], 시월이일, 2020.

Tono Haruka, [HAKYOKU], 2020.

제163회 아쿠타가와상

집 근처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 열람실은 없고, 종합자료실만 있는... 그래도 시립이라서 어지간한 책은 다 있다. 좋아하는 일본소설도 꽤 있고... 도서관을 이용하면 구간 도서는 마음대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읽기가 느리다 보니 늘 반납의 압박을 받는다. 모르는 책보다 잘 아는데 궁금한 책을 고른다. 다섯 권을 빌릴 수 있지만, 두세 권을 빌려 한 권도 못 읽고 반납할 때가 많다. 이런 배경에서 읽은 도노 하루카의 짧은 소설 [파국]이다.

파국(破局)은? 글자 그대로 판을 깨뜨리다, 일이나 사태가 잘못되어 결딴이 나는 판국, 문학(희곡)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이르는 말이다. 아쿠타가와상의 기대감,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욕망, 추잡한 인간의 끝없는 추락 과정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파국은 무슨? 해프닝,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을 과대평가한 아쿠타가와상이 파국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남성 경찰관이 강제추행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달리는 도카이도선 열차 안에서 여성의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범죄자가 붙잡히는 건 좋은 일이다.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p.12)

텔레비전의 전원을 켜자, 전 여자친구의 집에 침입해 속옷을 훔친 혐의로 남성 경찰관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p.20)

자리 간격이 가까운 걸 핑계 삼아, 나는 그 여자에게 일부러 다리를 갖다 대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그만두었다. 공무원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그런 비열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의자의 위치를 신중하게 조절하는 체하며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았다.(p.32-33)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여자화장실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혐의로 남성 경찰관이 체포되었다고 한다.(p.99)

모든 범죄는 죄악이지만, 직업적으로 특히 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가령 경찰관이 성범죄에 연관된다든가 하는... 요스케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법학부 4학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졸업한 공립 고교에서 럭비부 코치로 활동한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성욕... 사회의 질서와 규범 안에서 자신을 잘 통제하며 살고 있다.

나는 마이코와 사귀는 사이니까 더 많이 섹스를 하고 싶다. 사실은 매일 하고 싶지만, 공부도 하고 싶으니까 이틀에 한 번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마이코가 하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섹스를 할 수는 없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그건 강간이고, 나는 범죄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 게다가 나는 마이코의 남자친구다. 마이코가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없다. 마이코가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면, 그걸 응원하는 게 내 역할일 것이다.(p.54-55)

요스케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을 억제할 줄 안다. 마이코는 정치 지망생으로, 미래를 위해 늘 분주하고 활발하다. 겉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요스케는 그녀를 응원하면서도 채우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요스케에게 동아리 공연에서 우연히 만난 신입생 아카리가 다가온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은... 탈선? 왜곡된 욕망? 억눌린 사회 규범의 탈출? 이라기보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생일에 집에 초대해서 케이크를 만들어주는... 소홀한 쪽보다 관심 주는 쪽으로 기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예쁘다고 말하자, 아카리는 어리둥절해하며 무슨 말인지 되물었다. 당연히 아키리 얘기라고 하자, 갑자기 무슨 말이냐며 웃었다. 갑자기가 아니라, 말하지 않았을 뿐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개그 공연에서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앞으로도 말로 하지 않을 뿐 늘 그렇게 생각할 거라며 내 소견을 말했다. 그러나 방금 전의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내일 일 같은 건 아무도 모르니까. 지금의 내가 아카리를 예쁘다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서 내일의 나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는 아무도 보증할 수 없을 것이다.(p.151)

같이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잠을 자고...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보고, 열정적으로 후배들을 코칭하고... 요스케의 순조로운 일상은 한순간에 깨어진다. 두 여자 사이에서, 배려와 욕망 사이에서, 규범과 일탈 사이에서... 삶은 꼬이고, 멍든 채 끝난다.

일상적이면서 난해하고, 원인과 결과가 불분명해서 아주 불친절하다. 앞뒤로 뭔가 더 이야기의 살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매력적인 캐릭터와 좋은 글솜씨가 중간에서 뚝 끊긴 기분... 아, 친절한 소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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