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G. 스토리콜렉터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야베 미유키, 김선영 역, [가상가족놀이](R.P.G.), 북로드, 2011.

Miyabe Miyuki, [R.P.G.], 2001.

  유명세에 비해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다. 그래서 묵은 책 읽기로 선택했다. 소설 [가상가족놀이]의 원제 [R.P.G.]는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의 약자이다. 우리 말로 역할놀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인터넷 게임 등에서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 처음 출간했을 당시에는 어느 정도 신선함이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었는데, 현재의 익숙함이 발목을 잡는다.

  "어젯밤, 옛날 일기를 들춰보니 함께 일했던 게 15년하고 8개월 전 일이더군요."

  치카코는 복스러운 뺨을 누그러뜨리며 다케가미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p.10)

  아키쓰라는 형사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치카코와 다케가미는 특별히 개인적으로 친한 것도 아니다. 마돈나라니, 천만의 말씀이다. 치카코 쪽이 세 살 연상이고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서로 이미 가족이 있었다. 로맨스는 일절 없다. 다만 일할 때 마음이 잘 맞아 연대감이 있었다. 그 후 꽤나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그래도 다케가미의 인품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고, 치카코 역시 그 무뚝뚝하고 정직한 형사의 눈에 자신이 너무 다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p.80)

  경찰소설이다. 등장하는 주인공을 눈여겨봐야 하는데, 소설 [모방범](문학동네, 2012.)의 다케가미 에쓰로와 [크로스파이어](RHK, 2009.)의 이시즈 치카코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이전 소설의 독자라면, 두 주인공의 조우가 매우 반가웠을 텐데... 아쉽게도 나는 어느 것 하나 읽지 못했다. 물론 이전의 소설을 읽지 않아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경시청 수사 1과 4계 소속 데스크 담당으로 일하는 다케가미와 본청 방화수사반에서 스기나미 경찰서로 강등 인사된 치카코의 배경을 알면 더 재미있겠지... 15년 만의 만남이다.

  도코로다 료스케에게는 인터넷상에 또 다른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딸과 아들. 도코로다 료스케를 포함해 4인 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아버지', '어머니', '가즈미', '미노루'라고 부르며 빈번히 메일을 주고받았고 채팅으로 대화를 했다. 또한 그들의 관계는 인터넷상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적어도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한 적도 있는 듯했다. 도코로다 료스케가 가즈미에게 또 만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p.77-78)

  스기나미 구 니쿠라 초 3번지 분양주택 공사장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피해자는 48세 도코로다 료스케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있기 사흘 전, 시부야 구 마쓰마에 초에 있는 노래방 주얼에서 21세 이마이 나오코라는 여대생이 교살당했다. 밝혀진 증거에 의하면 동일범의 소행이다. 수사본부는 피해자와 주변을 조사하는데, 인터넷상에서 특이점이 있다. 대부분의 범죄는 불법 사이트하고 연관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 피해자는 게시판과 채팅방, 이메일을 이용해서 가족놀이를 하고 있었다. 현실의 가족 이외에 웹에서 아버지, 어머니, 가즈미, 미노루라는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이쪽 취조실에 세 사람을 불러 순서대로 심문을 할 거란다."

  다케가미의 설명에 가즈미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 다 생전에 아버님과 교류가 있었던 사람들이야. 다만 가즈미 양에게는 사전에 그들의 이름이나 연령, 어디 사는 어떤 사람이고 아버님과 어떤 사이였는지 말하지 않을 거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p.82-83)

  경찰서 취조실 매직미러를 사이에 두고 심문이 이루어진다. 남동생 미노루를 시작으로, 딸 가즈미 그리고 어머니가 순차적으로 동석하며 가상가족놀이에 관해서 증언한다.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 얻지 못한, 결핍된 것을 인터넷 가족을 통해서 얻으려고 했다. 관심과 돌봄, 외로움과 고민거리... 이들은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고, 오프라인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 영화보다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고, 진실게임을 하는 듯하다.

  "우리는 늘 그랬어요. 셋이서 살지만 서로 간섭을 안 해요. 아버지는 바빠서 거의 집에 안 계시고, 어머니도 자기 일이 아니면 안중에도 없어요. 패션이니 연예인이니, 시시한 얘기는 하죠. 하지만 정작 중요한 얘기는 해도 소용이 없어요. 고등학교 입시 때만 해도 그랬는걸요. 전 추천 입학이었는데, 어머니는 선생님한테만 죄다 맡겨놓고 모른 척. 선생님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그만이라는 식이었어요... 자기 생각을 말하고, 누가 그 생각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주는 게 굉장히 즐거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어머, 그래? 마음대로 해.' 이게 아니라 제가 열심히 생각한 걸 열심히 받아주고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뻤어요."(p.136-138)

  "보세요, 형사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얼굴을 마주하면 얼굴밖에 안 봐요. 외면만 본다고요. 마음을 이어주는 진정한 끈은 그런 외면을 초월한 곳에만 있는데, 친구도, 부모도, 제가 웃으면 즐거우니까 웃는다고만 생각해요. 저는 진정한 나를 감추고 남들한테 맞추는 건데 말예요.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시늉을 하고, 제가 그렇게 힘겹게 따라하는 줄 알아차리지도 못해요. 아무도 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지 않아요. 그냥 풍경인 거예요. 하지만 인터넷 속에서라면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진정한 내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p.154-155)

  다케가미는 말을 이었다.

  "물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집안 분위기가 냉담해서 도코로다 씨가 바람을 피웠는지도 모릅니다. 인터넷 속에서 이상적인 상대를 찾아 가족놀이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도코로다 씨가 그렇게 멋대로 구니까 집안 분위기가 차가워졌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모릅니다. 혹은 견해가 다를 뿐, 둘 다 먼저인지도 모르지요."(p.236-237)

  "사이버 공간에서 자라나는 인간관계에는 현실 사회의 인간관계와 비슷한 가치도 있고 온기도 있어요. 허위나 거짓말만 횡행하는 건 아니에요. 그야말로 얼굴을 맞대지 않기 때문에, 자기 모습이나 입장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털어놓을 수 있는 본심도 있고, 거기에서 자라나는 친애의 감정도 있는 거예요."(p.240-241)

  이 책을 읽으며 가족이란 무엇인가? 라는 원론적인 의문이 들었다. 혼인이나 혈연으로 맺어져 한집에 산다고 해서 다 가족일까? 무관심하고 냉담한 분위기에서의 가족은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이다. 그렇다면 인터넷 공간에서 가상의 가족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현실의 필요를 잠시 충족할 수는 있어도 정답이 되기는...;; 시대가 변하며 점점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는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때로는 집이 지옥이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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