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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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황금가지, 2017.

  베르디의 오페라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는 <라 트라비아타>는 '길을 잘못 든 여자'라는 뜻이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것을 미리 알았다면, 쉽게 범인을 유추할 수 있었을까? 중의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마지막 충격이 정말 제대로인데, 예전에는 부장판사였다가 지금은 현직 변호사인 도진기 작가의 소설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흥미롭게 읽었다. 변호사가 쓴 추리소설... 변호사 고진이 등장하는 시리즈이다.

  이유현은 경찰대를 졸업하자마자 제 발로 지방경찰서 강력팀을 찾은 '경찰대의 희귀종'이었다. 말단 형사로 출발하여 현재의 팀장이 될 때까지 수년간 현장에서만 경험을 쌓아왔다. 경찰대 출신이라면 곧장 지구대소장으로 임명을 받거나 관리부서에서 펜대를 굴리고 일선의 경찰관들이 발로 뛰며 만들어 온 사건기록을 뒤적이며 커리어를 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치열한 사건 한가운데에 있고 싶었다. 페이퍼 작업을 할 것 같았으면 다른 직업을 택했을 것이었다. 계급은 자신보다 낮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노련한 형사들에게 배운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뛰어왔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팀장이 되었고, 그마저 한 달 뒤면 햇수로 벌써 2년을 채우게 된다.(p.8-9)

  "형님! 이러실 겁니까!"

  킬킬킬.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수화기를 건너왔다.

  "자네가 전화할 줄 알았어."

  그 웃음소리의 주인은, 소위 '어둠의 변호사'라 불리는 고진이었다.(p.22)

  직업의 전문성은 법정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경찰대를 졸업하고 현장에서 쌓은 경험으로 강력팀장에 오른 '경찰대의 희귀종' 이유현과 돌연 판사를 그만두고 사라졌다가 뒷골목에서 법의 맹점을 이용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 둘은 물과 기름처럼 확실히 다르지만, 기이하게도 케미(?)를 일으킨다. 심상치 않은 두 캐릭터는... 한 명은 사건 현장을 누비며, 다른 한 명은 법의 테두리에서 사건을 분석하며 진실에 다가선다.

  "피고인 조판걸은 서초동 H 아파트 경비로 일하는 자로서, 11월 20일 밤 11시경, 3동 204호에 침입해 정유미를 송곳으로 목을 찔러 살해하고, 이어 위층에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올라온 아래층 104호 입주자 이필호의 목을 과도로 찔러 살해했습니다."(p.12)

  치정, 원한 관계에서부터 사건을 풀어 나갈 것이 아니라 처음에 시도했던 것처럼 순전히 범행 방법의 측면에서 범행의 실행 가능성을 따져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미녀와 스토커의 죽음이라는 사건의 특성 때문에 원한, 치정, 남자관계를 뒤적거렸던 건 낡은 선입견이었을 수 있다.(p.103-104)

  유흥주점에 나가는 여자가 자신의 집에서 남자친구와 통화하는 중에 살해된다. 남자친구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여자와 아래층 남자이다. 미녀와 그녀를 따라다닌 스토커의 죽음은 단순 강도를 넘어서 치정이나 원한을 떠오르게 한다. 경찰은 인물 관계와 주변인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수사를 논리적으로 진행하지만, 눈에 띄는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추리소설을 쓰는 공식을 아는 것처럼, 재미를 주며 줄다리기를 한다.

  "현대의 기술 앞에 범죄의 설자리는 갈수록 없어지고 있다고들 말하지. 지문, DNA, 혈흔 분석 같은 거야 물론 예전부터 있었지만, 요즘은 사건 생기면 딱 세 가지만 보면 되잖아? 휴대폰, 이메일, 그리고 통장 계좌. 이거만 뒤져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다 나와. 그래서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트릭은 대부분 현대에는 성립이 안 돼.

  하지만 말이야. 난 좀 생각이 달라.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 만큼 새로운 트릭의 지평도 그만큼 넓어진 거야. 수사기관을 속일 수단도, 기발한 범죄의 여지도 얼마든지 더 생겨난 거야. 그런 내 이론을 김형빈이 그대로 실현해 보여 줬어. 정말 재미있지 않나? 하하하."(p.160-161)

  "휴대폰 통화를 이용한 심리 트릭이든 시간 차 트릭이든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범이 따로 있다, 이런 얘긴데 말이야. 그게 모순되는 이야기란 거야. 애당초 김형빈을 범인으로 생각했던 건 그가 휴대폰 통화를 이용한 심리 트릭 혹은 시간 차 트릭을 사용했다는 전제하에서란 말이야. 다시 말해 그런 트릭을 사용했다면 김형빈이 범인이라는 가설이 성립한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 전제를 잊어버리고 '김형빈 범인설'에만 집착해서, 트릭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게 밝혀졌는데도 김형빈이 무조건 범인이다, 그런데 트릭이 없었다, 그렇다면 공범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 나간다는 건 논리의 오류지 않겠어?"(p.200-201)

  억울하게 법정에 선 용의자, 어둠의 변호사 고진의 보이지 않는 활약으로 누명은 벗겨지고 재수사가 시작된다. 휴대폰 통화를 이용한 심리 트릭과 시간 차 트릭... 현관의 CCTV를 비껴가는 치밀한 움직임은 다른 용의자를 찾게된다. 작가는 맥거핀(MacGuffin)을 제법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의도적으로 독자의 시선을 한 방향으로 묶어둔다. 치정이나 원한의 복수극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일까? 실상은 매우 추잡하고, 공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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