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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밤, 어제의 달 - 언젠가의 그 밤을 만나는 24개의 이야기
가쿠타 미쓰요 지음, 김현화 옮김 / 티라미수 더북 / 2021년 2월
평점 :
가쿠타 미츠요 <천 개의 밤, 어제의 달>
이 책은 나오키상 수상 작가 가쿠타 미츠요의 밤과 여행 그리고 추억에 관한 내용을 잔잔하게 풀어가는 에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나오키상에 대해 찾아보니 이렇게 나온다. "일본의 문학상으로, 소설가 나오키 산주고가 죽자 대중문학의 선구적인 업적을 기려 1935년부터 시작되었다. 상·하반기로 나누어 1월과 7월, 1년에 두 차례씩 시상되는데, 대중문예의 신진작가 가운데서 우수한 소설·희곡 작품을 발표한 자를 가려서 수상한다." 가쿠타 미츠요는 132회차 2004년 하반기 <대안의 그녀>라는 소설로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좋은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는 징표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에서 저자는 그리스, 모로코, 태국, 몽골, 홍콩, 몰디브, 멕시코, 발리, 이집트, 네팔, 아일랜드 등 11개 국가에서 경험한 밤을 언급한다. 즐거운 경험도 있었고, 조금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도 있었다. 이외에 일본에서의 몇몇 에피소드까지 '밤'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쉽게 풀어냈다. 저자 특유의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문장으로 마지막 문장이 끝나는 229페이지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어떻게 저런 국가를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닐 수 있을까 하면서 저자의 대담한 용기에 감탄했다. 동양 여자 혼자서 밤에 돌아다니는 거는 아주 위험한데 저자는 몇몇 치근덕 거리는 남자들을 만나긴 했지만 큰 사고 없이 잘 돌아다녔다. 천만다행이었다. 몇몇 장면에서는 손에 땀을 나게 만들었다.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나도 저렇게 여행 가서 밤을 즐기면서 놀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사람은 분명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지만 병원에서는 사람의 죽음을 밤에 더 많이 느낀다· · ·(중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도 밤이었다. 밤이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병실에는 나밖에 없었고 의사가 가족을 부르라고 해서 '아, 때가 찾아왔구나'하고 바로 알아차렸다. 널찍한 병원을 뛰어다니며 가족을 찾아다녔다." 이 부분을 읽고 작년 11월에 2주 간격을 두고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저자의 아버지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밤에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내가 경험했던 각종 밤에 대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책의 무게는 가볍고 24개의 단편적인 이야기는 짧았지만, 나에게 전달되는 추억의 무게는 무겁고 여운이 길게 남았다. 여행지에서의 추억, 그리고 밤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이 책. 코로나19 때문에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p.39
밖은 아직 새까맸다. 기차역을 향해,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그저 걸었다. 두려웠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몸을 움츠렸고, 어딘가의 민가에서 개가 으르렁댈 때마다 "앗"하고 작게 외쳤다. 조금 전에 본 성인용 비디오의 흑백 영상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며 공포에 박차를 가했다. 무섭다 무서워. 무섭다 무서워. 누가 나를 덮친다면. 강도를 만난다면. 살인을 당한다면. 두통과 메슥거림을 참고 종종걸음으로 역을 향해 갔다.
p.47
사막 한가운데에 매트리스를 깔고 시트를 씌우고 누웠다. 하늘에 가득한 별. 지금까지 본 어떤 밤하늘보다도 수많은 별이 보였다. 별로 가득한 하늘의 이미지는 아름답긴 하지만 나는 그렇게 예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커다란 유리가 산산조각 나서, 그 파편이 흩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어마어마하게 큰 하늘이다. 은하수도 보였다. 슝 하고 흐르는 별도 있었다. 밤하늘이 그대로 이불이 되어주었다. 고요했다. 지구에 있는 것 같지 않았다.
p.85
내가 홍콩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데 있다. 표정이 전혀 다른 밤이 서로 이웃해 존재한다. 고급 브랜드가 들어서 있는 빌딩 옆에 가짜만 파는 노점이 판을 벌리고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 어느 것이든 고를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그 느낌이 좋다.
홍콩에는 란콰이퐁이라는 술집 거리가 있다. 서구식 바나 레스토랑이 빽빽이 늘어서 있는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손님은 서양인뿐이다. 다른 나라였다면 왠지 꺼림칙한 광경이었겠지만, 홍콩이라서 무척 조화로운 느낌이다. 조금 거짓말 같은 행복감이, 오싹할 만큼 길고 가는 빌딩으로 가득한, 현실미가 결여된 풍경과 딱 어울렸다.
주롱의 밤도, 홍콩섬의 밤도 모두 인공적으로 밝다. 인간미의 존재와 현실미의 결여, 인간은 늘 그 양쪽을 원하는구나 싶었다. 사람이 원하는 것 그 자체가 두 개의 밤에 자연스레 드러나 있었다.
p.103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커플 여행지로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 바꿔 말해 불편한 곳을 즐기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건 서양인뿐이지 싶다. 일본인이나 다른 아시아인들은 혼자든 둘이든 가족끼리든 주위에 음식점이나 오락 시설이 좀 더 있는 곳을 선택한다. 둘이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진귀한 것을 사거나 불빛 아래를 어슬렁거리며 걷기를 택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없는 것 같다.
p.167
좌석에 앉으면 즉시 잔다. 그러면 이륙했다는 사실을 잠결에 알게 된다. 그다음에 눈을 뜨면 이미 안전벨트 착용 램프는 꺼져 있다. 그래도 또 잔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승무원에게 맥주나 와인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취한 채 잔다. 아무리 긴 시간이라고 해도 배행 시간 거의 내내 나는 잠들어 있다.
비행기 안에서는 시간이 뒤죽박죽이다. 시간과 함께 이동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오후 10시인데 바깥이 엄청 밝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승무원이 밤을 조성한다.
p.172
이렇게 시간과 떨어지니 먹을거리가 신나게 뱃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입에 들어간 순간 우주에 빨려들 듯이 사라져간다.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먹는 것도 어딘가의 누군가가 정한 것이다. 기내의 승무원은 그런 규칙을 인공적으로 충실히 지킨다. 거기에 따르면서도 불가사의하게 낮도 밤도 식사도 존재하지 않는, 끝없는 우주를 홀로 헤매고 있다는 기분이 언뜻 든다. 비행기에서 보내는 밤이 싫지 않은 것은 결국 그 느낌이 나쁘지 않기 때문이리라.
p.190
혼자 역을 향해 걸어가고, 플랫폼에서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때를 이따금 떠올린다. 실연한 직후였기에 어찌 보면 최악의 날이었을 테지만 그 광경을 떠올리면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든다. '그래, 난 여전히 건재해'라며 뭐가 건재한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날의 광경을 떠올리는 날도 가끔 있다.
p.204
사람은 분명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지만 병원에서는 사람의 죽음을 밤에 더 많이 느낀다. 예를 들어 전날에는 열린 문틈으로 쭉 뻗은 다리가 보였는데 다음 날 아침 지나가다 보면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아무도 없는 침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광경. 그런 것을 자주 보았다. 그 변화는 그때의 나에게 두렵지도 슬프지도 않았고 단지 고요히, 죽음이란 이런 것이란다 하고 가르쳐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도 밤이었다. 밤이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병실에는 나밖에 없었고 의사가 가족을 부르라고 해서 '아, 때가 찾아왔구나'하고 바로 알아차렸다. 널찍한 병원을 뛰어다니며 가족을 찾아다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