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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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에서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사람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살 수 있지슬프지만.” 하밀 할아버지의 대답은 정답이 못 됩니다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_신영복담론돌베개, 2015, P.418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흔한 의문이다. 정말로 사랑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랑 흉내를 내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랑을 부를 때 사랑은 실제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타령만이 주는 환상도 있고, 위안도 있다. 

나의 친구 하나는 만날 사랑타령을 한다그게 그 친구의 인생 중심이고그의 원동력이다그이가 사랑타령을 할 때 그이는 가장 그답다그의 재능이 사랑타령을 하며 반짝반짝 빛난다그는 말을 가지고 노는 예비 작가다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한 그의 사랑타령은 언제나 책의 한 문장 같아서 나를 놀라게 한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 역시 사랑타령의 일인자일 것이다입에 사랑을 달고 살지는 않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사랑이다이 동네에 사는 누구든 모모와 이야기를 나누기만 하면 사랑을 이야기하게 된다세상의 온갖 연약한 것들이 그의 입에서 사랑으로 변화한다장사치도둑창부뚜쟁이포주성소수자이민자인 그들이 모모의 입을 통해 유일하고 현명하고 독특한 사람으로 표현된다그들 역시 각자가 가진 사랑의 이야기를 한다그중에서 제일 많은 사랑으로 언급된 이가 모모와 함께 사는 로자 아줌마다
 
모모는 회교도로자 아줌마는 유대인이다결코 있을 수 없는 가정의 조합창부의 아이를 거두어 키우는 로자 아줌마는 독특한 재치를 지닌 모모를 너무나 사랑한다거칠고 두려운 원래 가정에 돌려보내지 않으려 이름과 나이를 속일 만큼아줌마는 이제 너무나 늙고 병들었다가족은 오래전에 잃은 아줌마는 어디에서도 도움받을 데가 없다고객도 떠나고 건강도 떠났으며 이제는 돈도 없다허름한 7층 아파트에 간신히 몸을 눕히지만 여기서도 곧 나가야 할 처지다정신도 온전하지 않다나날이 비참해진다언제든 두 사람이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로자 아줌마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어떻게 보아도 아름답지 않다이전의 미모는 사라졌을 뿐 아니라 뚱뚱해졌고 움직일 수도 없다부담스러울 만큼의 외형과 답 없는 건강 상태, 그 누구도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조건으로는 그녀를 결코 사랑할 수 없다그러나 조건과 상관없는그것만이 ‘사랑’의 이름을 가진다조건의 이름을 단 사랑은 사랑과 닮은 사랑이다땅에 매인 사람은 조건에 매여 사랑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 가끔 조건을 벗어난 사랑이 있어 거기에 진실된이라는 왕관을 얻는다그리고 여기모모가 그런 이름표를 얻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성장한다. 사랑할 때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떠올리고, 깊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또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거절당했을 때에도 성장한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연구할 때 더 놀랍게 성장한다. 이 책을 읽고 무언가를 느끼고, 표현할 수 없는 이 잔상을 글로 표현하려고 낑낑거리는 이런 순간을 통해서도 사랑은 자라나고 나는 하루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되어간다. 

모모는 아줌마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아줌마가 원하는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마지막을 맺기를 바란다나의 변함없는 소망 하나도 비슷하다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고 싶은 소망그 사람이 가장 편안한 장소에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보내주고 싶다가장 예쁜 모습으로 그 사람의 마지막 시야에 남고 싶다모모는 나의 소망을 먼저 경험했다나 역시 꼭 그리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그리하여도 그리하지 못해도 괜찮다. 책장의 마지막을 덮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여기내가 원하는 마지막을 맺지 않아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충만하게 사랑했다면 된다사랑은 존재 그 자체로 완성이므로. 치장 없는 내 모습으로, 사랑처럼 안 보이는 사랑이라도, 그저 사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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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살롱 - 10개의 테마로 만나는
유경희 지음 / 아트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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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를 벨 사방(Belle Savante)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있었다세상에… 머리가 텅텅 빈 나를 그렇게 불러주다니고맙고 또 고마웠다나는 주제 파악이 특기인 인간이다내 얼굴과 두뇌 수준과 그 안에 든 정보량을 잘 알고 있으니나는 감히 얻을 수 없는 호칭을 주워얻다니! ‘벨 사방은 미모의 학식 있는 여성이면서 18세기에 예술과 철학이 자라나도록 하는 살롱을 열던 여자다일단 미모는 확실히 빼고다음에 학식도 좀 덜어내고 나면 양심에 덜 찔리지 않을까그러고 나니 좀 안심이 되었다그래서 내가 선택한 책은 아트살롱, ‘벨 사방 마담 퐁파두르가 표지를 장식한 유경희 작가의 책이었다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그중에서도 그림은 사진처럼 문화의 한순간을 포착한다아트살롱은 결혼아이요리정물패션살롱카페여행축제후원이라는 10개의 테마로 그림을 고르고그림과 함께 시대상과 문화위인화가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이 테마가 시대별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림 한 장 한 장 안에 든 문화적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시대 이야기를 하는 게 이 마담유경희의 역할이다그러다 보면 과거와 현재는 다름과 닮음을 구별하며 새로운 오늘의 눈을 뜨게 된다
 
그림으로 읽는 교양(敎養) 사전, 그것이 이 아트 살롱이다책에서 언급된 살롱 이야기를 여기에 몇 줄 옮긴다당대의 여자들이 남자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발코니에 나가 앉아 있는 것밖에 없었다살롱이 생기면서 상황은 급변했고여성들은 가정학교수도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사교문화와 토론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살롱은 여성들이 타인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기에 무척 소중했다.” “살롱의 여주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여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입지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었다남자들도 성공하고 싶다면 유력한 살롱의 여주인들에게 낙점돼야 했다.” 살롱은 모든 교양의 백화점이다. 음악가와 미술가, 철학가와 사회학자들이 모여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싸우며 서로 배우고 즐거워하는 장소. 그러다가 일어서 거리로 나가 세상을 이롭게 하는 혁명까지 다다르는 일. 이 모든 것은 아름다움이고 총명이며 기쁨이고 힘이다. 즐겁고 가치로운 일, 이런 일들이 살롱에서 일어난다. 

잠시나마 살롱의 마담이 되는 일은 예술정치와 철학을 거머쥔 권력자가 되는 일이다꼭 이 밀도 높은 책이 아니어도 좋다문명 겉핥기라도 좋으니 살롱을 여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그러다 보면 이 모든 것에 푹 빠져들어 좀 괜찮은 마담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마담 퐁파두르처럼 대단한 살롱 마담 흉내를 낼 날이 오리라 믿는다. 후훗!

이 시대에 결혼이란 여자들에게는 둘도 없는 취직자리였다. 당시에는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거의 없었고, 보통 여자들은 수녀, 아내, 창녀 세 가지 직업이 자신들이 취할 수 있는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 그의 예술에는 결혼하여 평범한 일상에 매몰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의 경지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은 그저 만물에 갇혀 있는 형상을 붓 혹은 조각칼로 떨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모든 사물은 신의 분유分有물이고, 자신은 그저 신의 중재자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진정 ‘신의 애인’이었다. 미켈란젤로 정도 되는 예술가는 진정 신과 결혼한 예술가 혹은 예술이라는 신과 결혼한 자일 것이다. 신新 플라토닉 러브인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덜란드 정물화는 의인화된 알레고리다. 특히 정물화의 내용은 하나의 텍스트처럼 재구성하여 읽을 수 있다. 네덜란드 특유의 종교적 배경 아래 제작된 정물화는 교훈과 훈계, 즐거움이 결합되어, 예술이란 즐거운 것이어야 함을 설파했다.

살롱 문화는 로코코 양식과 불가분의 관계다. 로코코 양식에는 궁정과 귀족사회의 환락과 방종이 스며들어 있으며, 이성의 모든 법칙을 무시하고 유희적인 선들과 과도한 풍부함 등이 특징이다. 개인생활에 적합한 감각적이고 쾌적한 미감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 탓에 로코코 시대에는 회화나 조각 같은 순수미술은 발전이 더뎠고, 실내장식과 패션, 액세서리를 비롯한 공예가 첨예하게 발전했다. 로코코 시대는 친밀한 삶의 영역을 치장하는 장식예술의 시대였다.

카페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였다는 점이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카페에 가면 언제라도 동지를 만날 수 있었다. 예술가들에게 카페는 작업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혹은 미술학교를 대체해주는 요긴한 공간이었다. 그들은 삶이 생생하게 꿈틀대는 현장, 역동적인 삶의 현장으로서 카페를 필요로 했다.

19세기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에는 미술 대전과 같은 공모전이 있었는데, 수상의 특전으로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주거나 여행을 시켜주는 일이 흔했다. 프랑스 화가 앵그르는 라파엘로의 환생이라고 할 정도로 고전적인 화면을 구사했는데, 그것은 그가 로마 상을 받고 로마로 유학을 가서 받은 영향 덕분이었다.

책은 담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소재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세계를 ‘읽을 수 있는 책’처럼 여겼다. 세계는 신의 의지가 실연되는 무대였다. 책은 통상 세속적 지식과 인간적 성취를 상징한다. 원래 책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인류의 경험과 지식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책은 해골과 함께 자주 나타난다. 해골 아래 놓인 낡은 책은 지식과 지혜도 결코 영원한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 세태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은 현실에 전혀 지침이 되지 못하는 책을 퇴락한 지식이나 쓸모없는 쓰레기로 보았을 것이며, 어떤 이들은 책을 곧 어둠 속으로 묻힐 모든 허무 앞에서 낡은 형태로나마 지속되고 있는 영원한 진리로 감지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죽음 앞의 책은 무용지물, 헛되고 헛된 것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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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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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쯤 되면 뭐든 좋을 줄 알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노련한 직업인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저녁에 퇴근하면 따뜻한 인간관계 안에서 고이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형편없다업무에서 생기를 찾기 어렵고 관계에서 의미를 얻지 못한다행복하고 싶다고 고민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요즘 나의 고민은 행복보다는 의미다어쩌면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은 단 하나의 변화가희망이 없다는 뜻나는 단 한 번도 이런 허무한 미래를 가늠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그런 인생이다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기시 마사히코의 말에 눈물이 솟았다행복은 무슨우리는 너무 행복을 우상화하며 산다꼭 행복해야 할 것처럼 간절히 매달린다그러나 행복은 거의 없다목숨 값의 디폴트는 이럴 리 없었던’ 나 자신의 허무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자칫 산만한 책이다저자 기시 마사히코의 생각의 단편을 여기저기 그러모았다고나 할까에세이 한 편 한 편은 다채로이 반짝인다작열(灼熱)이 아니라 반짝임’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첫인상이다그래서 저자는 이야기를 강조한다그가 수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들을 단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이야기는 살아 숨 쉰다. 이야기가 그 사람을 그답게 한다그 사람의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 늘 삼가 조심해야 한다. 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가닿을지, 저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존경할지. 성심을 다해도 폐가 될 수도, 지극히 무례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가 내게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그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조약돌 같다어디에나 있어 하찮은단 하나뿐인 파편우리는 기본적으로 홀로 살아간다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고통은 그 누구도 함께 겪을 수 없다그저 옆에 가까이 있어줄 뿐그때 생은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놀라움을 경험한다그의 세계가 내게 닿았을 때 열리는 또 다른 세계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공간과 감각이 열린다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나사람과 맞닿을 수 있음의 기쁨이 이렇게 찬란하다는 건 무엇일까생의 메커니즘은 혼란이다그러니 아무래도 외톨이는 가득 행복하기 어렵다맞닿을 수 없어서언제나 2프로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것이 우연으로운으로 결정된다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무력하나그저 살아가는 것밖에 할 수가 없지만 어쩌면나의 무의미한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가다 보면 한두 번쯤도박을 걸어야 할 순간이 온다아주 가끔이성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순간이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전율한다아주 드물다한 번은 붙잡았고 몇 번은 놓쳐버렸다지금 생각해도 전 생애를 걸어야 했던 순간그때의 떨림이 눈앞을 흐린다

단언컨대 그 순간은 누군가가 내 삶을 아름답다” 말해주었을 때였다살면서 그런 순간은 아주 희귀하게 온다그리고 그 순간이 일생을 지탱한다살아야 할 한순간을 붙잡아야 한다순간은 영원이 되고반짝이는 단 한순간 우리는그것으로도 짧은 생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누군가가 내 삶에 닿는다면그리고 아름답다” 말해 준다면이 생의 단편으로 모든 것이 뒤바뀔지도 모른다기시 마사히코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러 전하고자 한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을까모든 생의 단편은 이토록 간절하다. 

전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아무 일이 늘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모조리 우리 눈앞에 있으며, 언제라도 볼 수 있다. 이것 자체가 내 마음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단편적인 서사를 하나하나 읽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방대함’ 앞에서 언제나 압도당한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중략) 그리고 거기에서 빗겨 나는 사람, 또는 ‘빗겨 났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귀여워’, ‘잘생겼어’, ‘축하해’, ‘참 잘했다’, 그리고 ‘사랑해’ 같은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덧없는 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반복하지만 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것이 매우 마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진정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그렇다면 ‘천재’가 많이 태어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는 일이 터무니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회다. (중략) 따라서 인생을 버리고 무언가에 도박을 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은 높아진다. (중략) 패배하면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버렸는데도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 때, 단 한 사람의 ‘천재’를 낳기 위해 그 일이 필요했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도저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내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 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올바름이나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제발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원한다. 사회가 그것을 들어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를 향해 언어를 계속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또는 적어도 그것만큼은 할 수 있다.

누구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인격도 타인의 몇몇 인격을 모방해서 합성한 것이다.
그것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나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정말로 작은 조각 같은 단편적인 것이, 단지 맥락도 없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다.
이것도 또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 같은 듣기 좋은 말을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별 볼일 없고, 대단치 않고, 아무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나간 인생 속에서 진절머리 날 만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런 특별한 가치가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며 살아가야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노래하는 노래는 됐고, ‘시시한 자신과 어떻게든 맞붙어 타협해야 하지, 그것이 인생이야’ 하는 노래가 있다면, 꼭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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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 - 절망의 시대에 다시 쓰는 우석훈의 희망의 육아 경제학
우석훈 지음 / 다산4.0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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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의 컬러감과 제목 디자인이 아주 눈에 띈다. 아기자기하니 고웁다. 그런데 부제가 영 에러다. 사람을 혹하게 하는 재미있는 제목과 겉돈다. “절망의 시대에 다시 쓰는 우석훈의 희망의 육아 경제학’” 책이라는 부제가 너무 거창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늦깍이 아빠가 된 경제학자의 육아 에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우석훈은 결혼 9년 만에 부모가 되었다고 한다. 사십대에 부모가 되었고 이 책을 낸 지금은 오십이라고. 나이가 드니 체력이 부족해 너무나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육아의 많은 부분에 들이는 비용이 낭비라고 말한다그렇게까지는 필요없고 간소화하자고 한다본인은 길게 보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걸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지출을 줄이는 방식이 남았다돈 들이지 않도록 비용을 가지치기하고가르치는 데 우선순위를 정한다사교육은 하지 않는다어떤 면으로나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효율적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늙은 아빠의자기만의 방법을 적어놓았다이유식을 따로 만들지 않고 어른과 같이 만들어 나중에 다른 조리를 한다는 건 좋았다계속해서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을 생각하고 몸으로 부딪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작품사진을 구하기보다 부모가 찍어주는 사진이 가장 나은 이미지라는 선택도 좋았다. 그 모든 면에서 끄떡끄떡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정도 없고 아이도 없는 한 여성으로서는 솔직히… 너무 상상력의 여지 없이 좌파스러운 결정들이었다. (물론 우석훈은 이건 자신의 문화적 취향이고 정서적 선택이라고, 다른 부모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람은 이성적으로 결정하고도 마음이 허탈할 수가 있다. 돌잔치를 할 수도 있고 좋은 옷을 사입힐 수도 있지그런 데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 않는가사람은 보이는 데 위안을 얻는 존재니까너무 절약하자고만 하지 말지사람은 때때로 사치로 인해 숨통을 여는 존재니까...
 
책을 읽으며 놀랐던 부분은 우석훈 정도 되는 네임 밸류를 가지고도 아이를 기르른 데 돈이 부족해 고생한 이야기다. 부부는 많이 고생했다. 직업상 차가 필수불가결인데도 돈 때문에 차 한 대를 팔아서 몸이 고생했고생활비를 위해 품팔이(?)를 했다양육은 실로 살 떨리게 돈이 엄청 드는 일이다저 정도 네임 밸류를 가진 학자가 그렇게 힘들다니 우리 나라 학자들은 다 어떻게 사는 걸까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일은 둘째 아이의 건강이었다. 둘째아이가 아프자 들게 되는 각종 비용에 시달린다. 아내도 일을 그만두고 아이에 매달려야 했다. 경제적인 사정은 내내 어렵다. 나중에 그는 장()을 모두 그만두고 전통적인 안사람 역할을 도맡는다요즘 말로 하면 라테파파랄까. 그래도 벌이가 나은 아내가 일을 지속하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나이 지긋한 남자가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는 모습이 새로웠다. 한국 남자에게, 특히 나이든 한국 남자에게 그게 어렵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읽는 것만으로 좋았다. 윗 세대 아랫 세대를 다 훑어봐도 어디 가서 구하기 힘든 남편이다아주 훌륭한 우렁 신랑이다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초창기에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가장 힘든 시기에 아이를 키우는 데 혼신을 다한 것은 그의 아내가 아닐까. 심적으로도 더 힘든 것 엄마 쪽이 아닐까. 물론 우석훈이 유명한 경제학 작가라서 이런 책을 쓰는 것이지만아무래도 남자다 보니 이렇게 보이는 건 내 비뚠 눈길일까남편보다 아내가 이 책의 앞부분을 더 깊이 저술하고 남편 경제학자가 그 인사이트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했으면두 사람이 공저자가 되었으면 어땠을까아니그랬다면 지금보다 책이 화제가 덜 되었으려나내가 읽은 이 책의 우석훈이라면 이런 내 비쭉거림에 맞다라고 웃어줄 거라 믿는다내가 읽은 그는 진심으로 아내에게 빚 진 마음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오늘 한 푼 벌면 내일 두 푼 나가고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한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천국문과 지옥문을 동시에 여는 것과 같다라는 대목아이를 낳는 데 얻은 행복의 솔직함이다. “아기를 키운다는 건 천국과 지옥 사이를 매순간 널뛰기하는 것과 같다너무너무 행복하거나그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 같은 불행한 느낌 사이를 수없이 오가는 것.”이라는 그의 고백에 고마움을 느꼈다요즘 수많은 기혼자들이 내게 뭐라 한다결혼하지 않은 게 좋은 거라고아이가 있으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고싱글인 걸 고맙게 여기라고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그들이 겪는 재앙 같은 행복이 그들을 웃게 한다는 걸재앙도 행복도 없는 사람들은 마음을 어디에 걸어두어야 할지 몰라서 헤매기만 한다는 걸그들의 살아야 할 이유가 때때로 무지 부럽다는 걸
 
어찌되었건 이 험한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행복을 경험하는 그는 행운아다. 자기 주관대로 아이를 기를 수 있다는 면에서 그는 승자다. 출산과 육아에서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인간이지만 어떠한가,가끔은 이런 육아 곁눈질도 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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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미술관 - 사랑하고 싶은 그대를 위한 아주 특별한 전람회
이케가미 히데히로 지음, 김윤정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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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보고 알았어야 했다이번 책도 나와 잘 안 맞을 거라는 걸잔혹미술사관능미술사등을 쓴 이케가미 히데히로가 그다이상하게도 일본 사람들이 쓴 서양미술책이 나와 잘 안 맞는다그들은 넓게 보기보다 좁고 깊게 파고들어간다신기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놀랄 만큼 기괴한 이야기도 일본의 미술사학자를 통해 꼭 듣게 된다
 
책의 초반부는 솔직히 지루했다주로 유명 명화를 중심으로 다루어 설명한 앞부분은 나름 미술책을 읽어온 내게 새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카미유 클로델과 로맹피카소와 그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제우스의 바람기큐피트와 아프로디테와 마르스아폴론과 다픈에 이야기는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솔직히 이쯤에서 덮을까 싶었을 정도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이 작가의 진가(眞價)가 드러난다이 책에서의 사랑은 Emotion 이기도 하지만 Making Love이기도 했다곧이어 사랑의 사회적 모습법률적 인정과 모양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그는 구애와 약혼결혼이혼과 사별이성애와 동성애 등 사랑의 각양 모양새를 파고들어 서술한다이제야 처음 보는 이미지들이 등장한다중세 수고본(手稿本및 타피스트리푸셀리의 수채화미켈란젤로의 스케치로마 에트루리아 미술관의 부부 석관크리스토프 솔라리의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베아트리체 데스테의 모뉴멘트(부부 석관)> 등은 처음 보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는 데에는 지식이 필요없다그러나 그림을 좋아하게 되면 지식을 갈구하게 된다전공자가 아니라도 미술책을 찾아 읽으면 원하는 만큼 그림을 볼 수 있는뒷받침이 가능한 지식을 쌓게 된다이케가미 히데히로의 사랑의 미술관은 그런 면에서 사랑이란 매력 포인트로 그림에 관심있는 이들을 매혹한다특히 사랑의 모습은 누구게에나 한 두 페이지씩은 걸쳐있지 않은가사랑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감정과 행동이 없다이 책은 하얀 플라토닉 러브부터 새빨간 육욕의 사랑까지 세세히 다룬다사랑에 흥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인간을 유혹하기에 딱 알맞다기묘하게 살아 있는 저자의 글이 꿈틀거리며 일어선다내 불편함은 분명 여기서 기인했을 것이다일종의 열등감일 수도 있는사랑을 잘 모르는 자신 때문에어찌했거나 이 책은 좁고 깊이 파고들어간다는 면에서 정확하다. ‘사랑이라는 말을 쓸만한 책이었다표지그림으로 등장한 하예즈의 걸작 <키스>가 하예즈의 (대부분 못 그린그림들을 지워버린 것처럼사랑은 모든 것을 밟고 일어나 그것만으로 빛난다사랑은 승리다나 같은 인간에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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