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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지음, 김경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이 나이쯤 되면 뭐든 좋을 줄 알았다. 아침에 출근하면 노련한 직업인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저녁에 퇴근하면 따뜻한 인간관계 안에서 고이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형편없다. 업무에서 생기를 찾기 어렵고 관계에서 의미를 얻지 못한다. 행복하고 싶다고 고민한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요즘 나의 고민은 행복보다는 의미다. 어쩌면 안정적으로 보이는 삶은 단 하나의 변화가, 희망이 없다는 뜻,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허무한 미래를 가늠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기시 마사히코의 말에 눈물이 솟았다. 행복은 무슨! 우리는 너무 행복을 우상화하며 산다. 꼭 행복해야 할 것처럼 간절히 매달린다. 그러나 행복은 거의 없다. 목숨 값의 디폴트는 ‘이럴 리 없었던’ 나 자신의 허무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은 자칫 산만한 책이다. 저자 기시 마사히코의 생각의 단편을 여기저기 그러모았다고나 할까, 에세이 한 편 한 편은 다채로이 반짝인다. 작열(灼熱)이 아니라 ‘반짝임’ 그것이 내가 이 책에서 얻은 첫인상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야기’를 강조한다. 그가 수집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들을 ‘단 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이야기는 살아 숨 쉰다. 이야기가 그 사람을 그답게 한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존중해야 한다. 늘 삼가 조심해야 한다. 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가닿을지, 저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존경할지. 성심을 다해도 폐가 될 수도, 지극히 무례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가 내게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생(生)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조약돌 같다. 어디에나 있어 하찮은, 단 하나뿐인 파편. 우리는 기본적으로 홀로 살아간다.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고통은 그 누구도 함께 겪을 수 없다. 그저 옆에 가까이 있어줄 뿐. 그때 생은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놀라움을 경험한다. 그의 세계가 내게 닿았을 때 열리는 또 다른 세계.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공간과 감각이 열린다. 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나, 사람과 맞닿을 수 있음의 기쁨이 이렇게 찬란하다는 건 무엇일까. 생의 메커니즘은 혼란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외톨이는 가득 행복하기 어렵다. 맞닿을 수 없어서, 언제나 2프로 부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 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것이 우연으로, 운으로 결정된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무력하나, 그저 살아가는 것밖에 할 수가 없지만 어쩌면, 나의 무의미한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될지도 모른다.
살아가다 보면 한두 번쯤, 도박을 걸어야 할 순간이 온다. 아주 가끔, 이성적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순간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 같은 느낌이 온몸을 전율한다. 아주 드물다. 한 번은 붙잡았고 몇 번은 놓쳐버렸다. 지금 생각해도 전 생애를 걸어야 했던 순간, 그때의 떨림이 눈앞을 흐린다.
단언컨대 그 순간은 누군가가 내 삶을 “아름답다” 말해주었을 때였다. 살면서 그런 순간은 아주 희귀하게 온다. 그리고 그 순간이 일생을 지탱한다. 살아야 할 한순간을 붙잡아야 한다. 순간은 영원이 되고, 반짝이는 단 한순간 우리는, 그것으로도 짧은 생을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다시 누군가가 내 삶에 닿는다면, 그리고 “아름답다” 말해 준다면, 이 생의 단편으로 모든 것이 뒤바뀔지도 모른다. 기시 마사히코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러 전하고자 한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았을까, 모든 생의 단편은 이토록 간절하다.
전 세계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은 아무 일이 늘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모조리 우리 눈앞에 있으며, 언제라도 볼 수 있다. 이것 자체가 내 마음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단편적인 서사를 하나하나 읽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방대함’ 앞에서 언제나 압도당한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서사는 아름답다. 철저하게 세속적이고, 철저하게 고독하며, 철저하게 방대한 훌륭한 서사는 하나하나의 서사가 무의미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강렬한 체험을 남에게 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야기 자체가 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빙의하여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 이야기의 매개 또는 그릇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이야기는 살아 있기 때문에 잘라 내면 피가 난다. 이야기를 도중에 갑자기 중단당한 그의 침묵은 끊긴 이야기가 지르는 조용한 비명이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꽉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무언가 아주 불합리하고 복잡한 사정에 의해, 어느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장소에서 태어나, 다양한 ‘불충분함’을 떠안은 ‘나’라는 것에 갇혀, 평생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이란 것은 종종 퍽이나 쓰라리다.
우리가 갖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는, 때로,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이 된다. (중략) 그리고 거기에서 빗겨 나는 사람, 또는 ‘빗겨 났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더라도 더 이상 행복해질 수 없는 것처럼 느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귀여워’, ‘잘생겼어’, ‘축하해’, ‘참 잘했다’, 그리고 ‘사랑해’ 같은 말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덧없는 꿈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반복하지만 타인과의 접촉은 기본적으로 고통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것이 매우 마음 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진정으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 인생은 몇 번이나 기술한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단지 시간만 흘러가는 듯한, 그런 인생이다. 우리 대다수는 배신당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자신이라는 것은 태반이 ‘이럴 리 없었던’ 자신이다.
그렇다면 ‘천재’가 많이 태어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는 일이 터무니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회다. (중략) 따라서 인생을 버리고 무언가에 도박을 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속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은 높아진다. (중략) 패배하면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버렸는데도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 때, 단 한 사람의 ‘천재’를 낳기 위해 그 일이 필요했다는 말을 듣는다 해도, 도저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내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의 무의미한 인생이 자기는 전혀 알 수 없는 어딘가 멀고 높은 곳에서,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잘한 단편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을 기술할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딘가 ‘기도’와도 닮아 있다. 그 올바름이 가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병 속에 종잇조각을 넣고 마개를 막아 바다로 흘려보내는 것뿐이다. 그것이 어디의 누구에게 닿을지, 아니면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지는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올바름이나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이 제발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기원한다. 사회가 그것을 들어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를 향해 언어를 계속 던지는 수밖에 없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또는 적어도 그것만큼은 할 수 있다.
누구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인격도 타인의 몇몇 인격을 모방해서 합성한 것이다. 그것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나 ‘세계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정말로 작은 조각 같은 단편적인 것이, 단지 맥락도 없이 흩어져 있을 따름이다. 이것도 또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 같은 듣기 좋은 말을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혐오감을 느낀다. 왜 그러냐 하면, 원래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별 볼일 없고, 대단치 않고, 아무 특별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나간 인생 속에서 진절머리 날 만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무런 특별한 가치가 없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과 지속적으로 씨름하며 살아가야 한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이라는 아름다운 말을 노래하는 노래는 됐고, ‘시시한 자신과 어떻게든 맞붙어 타협해야 하지, 그것이 인생이야’ 하는 노래가 있다면, 꼭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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