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류의 탄생 - 내면의 품격을 높이는 일상의 매뉴얼
김명훈 지음 / 비아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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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넬로피》의 메인 줄거리는 ‘진정한 신랑감 찾기’다. 가문의 선대가 저지른 몰염치한 짓으로 마녀의 저주를 뒤집어쓴 페넬로피는 돼지코를 가지고 태어난 귀족 영애다.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같은 피를 가진 이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뿐. 전형적인 블루 블러드 페넬로피 가문은 블루 블러드 상류층 남자라면 모두 다 선을 보인다. 이때 몰락 귀족 맥스를 만나 진심이 통하게 되지만… 이 저주가 풀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몰락 귀족으로 자기를 속인 가난한 음악가 조니 마틴이 ‘나는 상류층이 아니므로 페넬로피의 상대로 자격이 없어’라며 도망쳐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류층의 ‘자격’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겼을 것이다.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 아닌가, “중산층의 자격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프랑스, 영국 등 나라별로 조건을 헤아리는 우리나라에서는 특히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김명훈의 『상류의 탄생』은 ‘진정한 상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답을 담는다.

1부 《누가 상류인가?》에서는 이 책에서 말하는 ‘상류층’의 정의를 제시한다. 사회적 ‘위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지향적인 사람들이 상류층임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알려주며 상류층의 바른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상류의 탄생』표지에 제시된 배려, 책임, 통찰, 원칙, 예의, 절제, 청렴, 전통, 박애, 품위라는 개념을. 2부 《책임을 다한다는 말》에서는 미국의 전통 있는 상류층이 어떻게 자신들의 가치를 지켜나가는지를 보여준다. 건국 초기 대통령부터 기업가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기 모였다. 3부 《다르게 사는 방법》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품위를 강조하여 이야기한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내면적 계급’이며 진정한 상류인 것이다. 미국 뿐 아니라 스웨덴, 핀란드, 독일, 덴마크의 이야기로 사회지도층의 고결함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제목은 『상류의 탄생』이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상류의 품위이며 상류의 가치관이다. 돈이나 권력으로 상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고결한 가치관을 가진 이야말로 상류임에 마땅한 이라는 것. 그러므로 상류는 하나둘 더 탄생되어야 한다는 것, 사회 전체가 상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바람이며 목적이다. 미국 이민자인 저자의 특성상 『상류의 탄생』에는 미국 이야기가 주류를 차지한다. 3부에서의 스웨덴, 핀란드, 독일, 덴마크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이 책의 이야기는 미국에 치우쳐 균형이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바마가 교황에게 보낸 선물 등 상대의 가치관을 제대로 파악하고 배려하는 소박한 선물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얼마나 진실함을 선물하고 있는지를 반성했다.

사람들은 왜 상류가 되고 싶어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내가 살아오고 느낀 그 이유는 주로 권력이었다. 힘을 누리고 싶어 상류가 되고 싶어했다. 여기에서 ‘힘’에 대한 시각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힘인가. 매일 때리고 부수고 다시 짓고 바꾸는 이 사회에서, ‘변화’를 보이는 것이 힘이라면 좀더 느리고 부드러운 힘을 계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키고 다스리고 숙성하는 힘을. 그것이 두터운 상류를 만드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힘을 소유한 이는 자연히 위로 올라간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 나는 힘을 가질 수 있는가? 어떤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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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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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니 참 진부한 제목이다. 비록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해도, 이 신뢰할 만한 사회학자가 ‘고통의 문제’를 주제로 내놓은 책을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이름의 저자였다면 아마 이 책을 쉽사리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고통의 문제’를 궁금해했고, 신학책을 포함해 여러 책을 읽어왔으나 여기에 ‘답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으니. ‘고통을 나눌 수 있는지 여부’에 역시 회의적이다. 고통이란 게 각자에게 절대적인 것인데 누가 누구의 고통을 공감하고 또한 덜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다만 나는 ‘고통을 통과하는 몸’만을 경험했고, 경험해 왔다. 날카로운 시간에 더 상처입지도 못하는 극한 고통의 시간까지 지나,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언젠가… 그때의 시간을 ‘웃프게’ 말할 수 있는 경험. 그건 오직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냈을 때 가능한 치유뿐이었다. 이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내 경험을 정확한 학자의 언어로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으며, 내게 없었던 중요한 요소를 말해 주었다. 내가 ‘곁’을 두려 하지 않았고, ‘곁’을 미워했다는걸.

엄기호의 이전작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서문과 에필로그는 ‘감정’이 실려 뜨거웠다. 본문 역시 사유의 밀도가 훨씬 치밀했다. 느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나 치밀해서 줄을 긋기도 힘들었고, 한 순간 주의를 놓치면 다음 문장으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꽤 집중해야 했다. 책은 모두 세 챕터 1부 《고통의 지층들》 2부 《고통의 사회학 》 3부 《고통의 윤리학》으로 구성되었고, 그중에서 내가 가장 공감한 것은 1부였고, 가장 깨달음이 컸던 것은 3부였다.

1부 초반부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진부하도록 너무나 ‘평범한(!)’ 고통의 모습이다. “끝이 없다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인권 현장에서의 고통뿐만이 아니다. 모든 고통이 그랬다. 사회적 관계로 인한 것이건 육체적 질병에 의한 것이건 사람들을 가장 공포스럽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고통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절망한 이들은 너무나 전형적인 고통의 반작용을 발산하고, 고통의 무의미와 허무에 시달리다 곁에 있는 이들을 괴롭힌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말이다. 말인지 주문인지 알 수 없는 소리 언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말밖에 고통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고통은 갈 곳을 잃는다. 고통받는 이는 외로움에 치를 떤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2부의 내용은 ‘사회학’이란 단어를 쓸 것도 없이 너무나 낯익다. 고통을 전시하는 사회에 있어서. 더 큰 고통, 더 비참한 고통을 드러내 전시해야만 이 고통은 관심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고통은 널리고 널렸다. 모든 고통이 가진 절대성을 의미 있게 여기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뉴스 가치’에 도달할 정도의 수준과 내용, 강도인 고통을 건져 올릴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절대성이 아니라 선정성이다. 따라서 이 플랫폼에 올라탈 때 피해자는 자기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물론 이때 돈을 버는 것은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어 주목을 이끌어내는 플랫폼 자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목은 돈이 된다. 플랫폼에게 말이다. 이때 고통의 절대성은 내 고통이 다른 누구의 고통과 ‘비교’하더라도 절대적으로 고통스럽다는 것으로 의미가 변질된다. 고통 간에 경쟁하게 되고 소위 말하는 고통의 올림픽이 벌어진다. 고통이 고통을 밀쳐낸다. 자신의 고통이 다른 고통에 비해 절대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더욱더 자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통의 콜로세움’에서 계속 뼈저리게 고통받는 이로 살아갈 수밖에. 일단 ‘고통 관종’이 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관종 사회는 고통받는 사람의 존엄이 존중되는 바로 이 길을 봉쇄했다.”

한편 엄기호가 이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을 통하여 가장 말하고자 했던 것은 3부, 《고통의 윤리학》이 아니었을까. 고통은 어쩌면, 아주 약간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약간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고통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단어는 ‘곁’이다. 저자는 말한다. “고통의 곁 옆에 또 다른 곁이 있을 때 그는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고통받는 이의 곁이 고통받는 이를 이끌어 함께 걸어야 한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게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것이 고통을 나누는 첫 움직임이다. 그렇게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이때 주로 나눈 이야기는 ‘고통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가 그 고통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고통의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 삶의 자리에서 함께 걷도록 하는 일이 가장 정확한 배려임을 생각도 못 했으므로.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내 통증을 잊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생활이었다, 그것도 바쁜 생활. 내가 있을 자리가 생활 가운데 확실히 있을 때에 나는 ‘고통받는 이’ 대신 ‘유능한 한 인간’으로 나를 정의할 수 있었다. 세상 가운데 내 몫을 확실히 할 때 나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고통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중요한 해답은 읽기와 쓰기다. 고통당하는 이가 가지지 못한 고통의 언어를 시간을 들여 시도하는 것은 ‘고통의 해명’에 있어 정확한 처방이다. 자신에 대한 앎에 이르고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또한 이 언어는 삶을 재건하는 가운데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원이 된다. 여기 소개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민승남 옮김, 민음사, 2004)이나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메이 옮김, 봄날의책, 2017), 프리모 레비의 『고통에 반대하며』(채세진·심하은 옮김, 북인더갭, 2016)를 꼭 읽어보고 싶다.

저자는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고 강조한다. 간접적인 연대만 있다는 것이다. 관건은 그런 간접적인 곁과 곁의 유무다, 고통의 곁. 그 곁에 또 다른 곁을 구축하는 것만이 수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곁을 단단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인터뷰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말미에 첨부한다. 나는 이것보다 더 완벽한 고통의 결실을 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이에 대해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한 분으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외딴 섬에서 나고 자랐다. 그분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동생이 부모님이 뭍으로 출타한 사이에 열병에 걸려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모는 돌아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했다. 아이의 상을 치른 후 부모가 한 일은 나에게 말을 전해준 분을 포함하여 자식들을 뭍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동생이 죽은 그 고통의 현장에 다른 자식들을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장소에 있는 한 계속해서 그 죽음이 회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이 가족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아무런 죽음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고 한다. 뭍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집으로 찾아갈 때도, 뭍으로 자식들을 보러 부모가 나올 때도,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을 하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아 명절에 방문할 때도, 아무도 그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지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늘 그들 근처에 머물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그 죽음을 늘 의식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음이 없었던 것처럼 매일 연기하고 연기하는 만큼 죽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하나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을 잃은 내 슬픔이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 견줄 수 있을까. 아이를 잃은 내 슬픔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어린 나이에 죽음을 목격한, 그것도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죽음을 목격한 자식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확하게 또 정반대의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면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내 고통을 아느냐?”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 말이다. 이 두 마음 사이에서 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이 이 가족의 ‘공동’을 파괴하지 않는 일이었다. 고통을 통한 연대가 아니라 슬픔을 같이 공유할 수 없다는 그 침묵으로 이 가족은 서로에게 곁이 되었다. 그 고통을 이야기하는 순간 아무도 누구에게도 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곁이 되었다. 재희의 형제자매들이 어머니의 곁이 된 재희 옆에서 끊임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곁이 된 것과 달리 모두가 고통의 당사자인 이 가족은 침묵으로 슬픔을 공유할 수 없는 슬픔을 공유하며 ‘곁’이 되었다.

그러나 재희의 이야기에서도, 이 가족의 이야기에서도 곁, 즉 유대와 연대의 가능성에 관해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고통을 통한 연대, 정확하게 말하면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고통을 통해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곁이 만들어지고 그 곁으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회’만을 통해 가능하다. 고통의 곁에 곁이 되는 연대를 통해서, 혹은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는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동행과 연대는 고통으로부터 한 다리 건넌 우회만을 허락한다. 이 우회를 통해서만 우리는 고통과 동행할 수 있다. 그 동행을 견딜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고통이 만드는 절망을 동행이 주는 기쁨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그나마 생긴다. 그리고 혹여라도 고통이 끝난다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아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을 계속해서 도모하다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면 고통을 끝맺을 수 있다. 이 가족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죽음으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어느 명절에 부모가 계신 섬에 방문했다. 노년에 집을 개조해서 숙박업을 하고 있던 이 집에 웬 낯선 청년이 한 명 있더란다. 어느 날 섬에 흘러 들어온 청년인데, 청소하며 일을 도울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왔단다. 그날로 이 집에 눌러앉게 되었고 밥을 먹는 것에서부터 잠을 자는 것에 이르기까지 스스럼없이 부모와 너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같이 하였다고 한다. “OO가 돌아왔네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 몇 십 년 만에 죽은 동생의 이름이 가족들 사이에서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 숱한 세월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않았던 이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환생해서 돌아온 자식을 두고서야 가슴에 묻었던 자식의 이름을 꺼냈다. 그리고 이 환생한 자식과 더불어 그들은 더 단단한 ‘공동’이 되었다.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언제 고통에 관해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것은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될 때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책에서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이기에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끝나지 않는다면 말할 이유가 없다. 말할수록 상처만 더 깊어진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말이다. 고통은 끝나고서야 말할 수 있다. 고통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서야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에게 함몰되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통은 끝나지 않으며, 고통이 끝나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을 도모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도모하다가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고통은 끝날 수 있다. 환생한 자식과 함께 살아가며 죽은 자식에 대해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책 말미에-고통과 연대하는 우회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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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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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민의 아침은 죽음과도 같다. 그 중에서도 주말 아침은 또 달리 그렇다. 토요일 아침 20분 간격으로 서을을 향하는 광역버스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두렵기 그지없다.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텁텁한 공기와 찌든 담배 냄새,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이 공간 안에서 나는 책을 읽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 아침은 정말 그랬다.

우리나라에서 ‘서울대’ 교수라는 명함은 지위 뿐 아니라 특권의 보증수표다. 공부하는 이들이 기대할 수 있는 위치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라. 그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꼰대’일 텐데, 그런 그들에게서 억지웃음이 아닌 진심어린 폭소를 얻어낼 수 있다니. 지난 가을, 김영민이라는 특색 없는 이름이 지닌 칼럼니스트는 그렇게 문자중독-신문을 읽는 우리들을 강타했다. 폭발적인 관심에 들뜰 만도 한데, 이 저자는 평화롭게 칼럼을 지속하더니 세련되게 또 칼럼을 마무리 지었다. 분명 부담스러웠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같은 글줄을 보면 저자에게 더없는 호감이 간다. 언제나 죽음에게 말을 건네는 인간이며, 언제나 죽음에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인간. 그래서 오늘 하루에 더 기를 쓰는 인간. 그 역시 나와 같은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왜 내게는 유머가 없는가? 왜 나는 안 되는 것인가?

주로 ‘칼럼’을 묶은 이 에세이집의 장점은 역시 즐거움이다. 글을 읽는 내내 술술 읽히는 글의 ‘재미’를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예리한 유머를 구사할 수가 있는지 감탄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용이 밝고 즐거운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죽음, 슬픔, 고통에 대한 위로가 이 책의 목적이며 정조다. 학교와 학생 사이에서 느꼈던 무력함과 지식에 대한 허무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사실, 뒤로 갈수록 책의 내용이 아쉬웠다. 오히려 칼럼으로 책을 모두 구성하고, 인터뷰는 부록으로 짧게 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저자의 신춘문예 당선 영화평론과 다른 평론, 저자의 인터뷰 기사가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다 보니 책의 일관성이 깨져서 완성도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책을 읽으며 느낀 저자의 성격을 고려하자면 (더 기다려서 다른 글을 덧붙이더라도) 일관된 느낌의 책을 원했을 것 같은데, 출판사에서 약간 급하게 책을 낸 게 아닐까 싶었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 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살아 있는 시체여, 죽음을 생각하며 재미와 의미를 찾아라.” 지금 살아 있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즐겁지는 않아도, 적어도 괴롭지는 않은가? 소소한 근심을 감각하는 지금, 나는 살아 있다. 그 감각이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다. 어쩌면 나는 곧, 소소하니 웃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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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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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중략)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중략)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_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남자와 여자는 사건을 만들지만 이야기의 깊이를 만드는 건 ‘여자’다. 『대설주의보』의 모든 단편들을 읽고 난 후 든 생각. 모든 이야기 가운데 남자와 여자가 얕거나 깊거나 비밀스럽거나 막장인 사랑을 한다. 평범한 남녀의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한편, ‘평범한’ 이야기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의 이야기는 각자 기막힌 부분을 품고 있는 것을.

『눈의 여행자』를 읽고 고른 『대설주의보』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작처럼 장편소설일 줄 알았지,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같은 이야기일 줄 알았지. 눈 이야기인줄 알았더니 눈 이야기는 하나뿐이다. 역시 내 기질에는 한 권짜리 장편이 더 맞다. 그리고 표제작인 ‘대설주의보’는 참 좋은 이야기였다. 참, 좋았다. 과하지 않고 담담하니 참 좋았다. 그리고 해피 엔딩인 것 같아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일곱 개의 이야기 중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세 개의 에피소드, 《보리》, 《대설주의보》, 그리고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다. 여기 등장하는 남녀들은 그들의 입으로 말한 대로 ‘남들처럼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더 처절하고 더 우스꽝스러워져버린 관계들. 그런데 실은, ‘늘 그리워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가 정말 있다. 꼭 만나지 않아도 이어진 관계.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삶의 면면을 알아갈수록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 목숨은 이상하다. 어떻게든 이어진다. 의도와는 상관없다. 남자와 여자는 사건이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이어진다. 이어지지 않은 듯 보일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내뱉는 것이다. “왜 우리는 늘 비석 없는 무덤들처럼 공허한 것일까. 여름 한낮 햇빛에 뜨겁게 타고 있는 빈 마당을 볼 때처럼. 다만 혼자일 뿐인데, 실은 나도 그게 견디기 힘들어.”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남자와 여자인가보다. 누가 그랬더라 일본 소설가였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주름살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게 있다고. 꼭 눈 덕분(德分)이 아니더라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는 경우가 있다. 분명 일어나고야 마는 ‘사건(事件)’, 그것을 확인하려고 우리는 계속해서 소설을 읽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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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행자
윤대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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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가 쓴 방송작가 드라마, 만화가가 그린 만화가 만화는 기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분명 이 주인공은 작가 자신일 거야!’라는 확신 때문. 그건 작가가 쓴 작가 소설에도 마찬가지.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가 바로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작가 역시 저자 자신과 꼭 같은 인물일 것이다. 작가후기를 보니 확실하다. “「설국」의 무대 니가타에서부터 시작된 눈과의 동행길”이라는 카피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작가는 “눈을 배경으로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말한 덕에 일본의 대설(大雪)을 따라가며 한 달간의 집필 여행을 한다. 결국 제목인 『눈의 여행자』이며 주인공 작가 ‘나’ 도 작가 자신이라는 이야기다.

출근길 집어든 낡고 가벼운 책은 몰입감이 강했다. 출근하는 한 시간 반 동안 100페이지 이상이 술술 넘어갈 정도였다. 계약기간을 일 년 지나고도 원고를 넘기지 못한 ‘나’ 소설가에게 찾아온 기묘한 편지와 책 한 권 때문에 그는 일본 니가타로 떠난다. 편지에서 요구하는 ‘눈’에 대한 과제. 거기에서 찾아달라는 누군가 때문에. ‘나’는 책에 남은 메모를 따라 이동하면서 나름 비밀을 풀어 가는데. 그 끝에서 만난 사연은 기묘한 슬픔 그 자체였다.

“그쯤은 저도 압니다. 어느 누가 자기 상처나 고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는 일 아닙니까?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저는 분명 그렇게 배웠습니다. 또 집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위안받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저희 부부가 무슨 고통을 더 받겠습니까?” (P.248)

소설의 뼈대는 ‘이야기’다, 핵심은 ‘사람’의 이야기. 나는 그 모든 이야기에 상처와 고통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시간은 상처 그 자체이므로.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는 일”이라는 말 앞에서 마음은 멈추었다. 정확한 표현이어서. 나 역시 그 모든 구원 앞에서 내 구원을 얻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그 ‘구원’ 때문에 꾸역꾸역 책을 붙들지 않고는 하루를 그냥 넘길 수 없으니.

작가가 ‘눈’에 매혹된 이유는 정확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불가해한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히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몰라도 다 함께 이 세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여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느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 모두는 사라져버린다. 다시 눈이나 비가 되어 세상을 찾을 때까지. 퍼붓는 눈 속에서 나는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때로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도 했다. 태초의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눈의 소리를 들으며.” (P.233) 눈송이가, 눈이 선사하는 아름다움. 눈이 덮어버리는 모든 상처와 고통이라는 용어에서는 앞서 나온 ‘사람의 상처나 고통을 구원하는 게 글쓰는 일’이라는 맥락을 불러일으킨다. 눈 역시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진다는 데에는 구원인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또 다른 구원을 얻는다. 항상 간절히 원했던 따뜻한 손과 재회한 것. ‘그’가 오래전 사랑한 여자는 놀랍게도 나와 비슷한 여자였다.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여자’. 이 여자로 인해 생긴 상처도 이 만남으로 회복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더듬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더듬이가 서로의 정체를 알아보게 한다고. “나 아저씨 누군지 알 것 같아.”(P.266)라는 말은 그렇게나 정확했다.

『눈의 여행자』는 내게 ‘구원’의 이야기였다. 기대하지 않고 읽어내린 소설 한 권이 이렇게 큰 즐거움을 주다니. 이거야말로 하루치의 기적이 아닌가. 이야기의 종결로 갈수록 치밀한 문장과 비유가 놀라웠다.하다 못해 ‘갈색은 중독성이 강하다.’ 커피의 갈색에 중독되면 콜라와 담배와 위스키에도 쉽게 손이 가고 끊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기’가 맞다. 나는 오늘 행복했다.

내가 얻었던 모든 구원의 순간들에 리스펙. 허여멀건 표지의 책 한 권을 어루만지는 지금 나는 꽤 포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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