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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행자
윤대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방송작가가 쓴 방송작가 드라마, 만화가가 그린 만화가 만화는 기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분명 이 주인공은 작가 자신일 거야!’라는 확신 때문. 그건 작가가 쓴 작가 소설에도 마찬가지. 윤대녕의 『눈의 여행자』가 바로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작가 역시 저자 자신과 꼭 같은 인물일 것이다. 작가후기를 보니 확실하다. “「설국」의 무대 니가타에서부터 시작된 눈과의 동행길”이라는 카피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작가는 “눈을 배경으로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말한 덕에 일본의 대설(大雪)을 따라가며 한 달간의 집필 여행을 한다. 결국 제목인 『눈의 여행자』이며 주인공 작가 ‘나’ 도 작가 자신이라는 이야기다.
출근길 집어든 낡고 가벼운 책은 몰입감이 강했다. 출근하는 한 시간 반 동안 100페이지 이상이 술술 넘어갈 정도였다. 계약기간을 일 년 지나고도 원고를 넘기지 못한 ‘나’ 소설가에게 찾아온 기묘한 편지와 책 한 권 때문에 그는 일본 니가타로 떠난다. 편지에서 요구하는 ‘눈’에 대한 과제. 거기에서 찾아달라는 누군가 때문에. ‘나’는 책에 남은 메모를 따라 이동하면서 나름 비밀을 풀어 가는데. 그 끝에서 만난 사연은 기묘한 슬픔 그 자체였다.
“그쯤은 저도 압니다. 어느 누가 자기 상처나 고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는 일 아닙니까? 중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저는 분명 그렇게 배웠습니다. 또 집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위안받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저희 부부가 무슨 고통을 더 받겠습니까?” (P.248)
소설의 뼈대는 ‘이야기’다, 핵심은 ‘사람’의 이야기. 나는 그 모든 이야기에 상처와 고통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시간은 상처 그 자체이므로.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는 일”이라는 말 앞에서 마음은 멈추었다. 정확한 표현이어서. 나 역시 그 모든 구원 앞에서 내 구원을 얻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그 ‘구원’ 때문에 꾸역꾸역 책을 붙들지 않고는 하루를 그냥 넘길 수 없으니.
작가가 ‘눈’에 매혹된 이유는 정확하다. “그때마다 나는 이런 불가해한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라는 존재도 이 무량히 퍼붓는 눈송이 중의 하나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몰라도 다 함께 이 세상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께 쌓여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내가 한 송이 눈이 되어 떠돌 때 가슴에 품고 있는 상처나 고통도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어느 따뜻한 봄날이 오면 우리 모두는 사라져버린다. 다시 눈이나 비가 되어 세상을 찾을 때까지. 퍼붓는 눈 속에서 나는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때로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기도 했다. 태초의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눈의 소리를 들으며.” (P.233) 눈송이가, 눈이 선사하는 아름다움. 눈이 덮어버리는 모든 상처와 고통이라는 용어에서는 앞서 나온 ‘사람의 상처나 고통을 구원하는 게 글쓰는 일’이라는 맥락을 불러일으킨다. 눈 역시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진다는 데에는 구원인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또 다른 구원을 얻는다. 항상 간절히 원했던 따뜻한 손과 재회한 것. ‘그’가 오래전 사랑한 여자는 놀랍게도 나와 비슷한 여자였다.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절대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여자’. 이 여자로 인해 생긴 상처도 이 만남으로 회복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더듬이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더듬이가 서로의 정체를 알아보게 한다고. “나 아저씨 누군지 알 것 같아.”(P.266)라는 말은 그렇게나 정확했다.
『눈의 여행자』는 내게 ‘구원’의 이야기였다. 기대하지 않고 읽어내린 소설 한 권이 이렇게 큰 즐거움을 주다니. 이거야말로 하루치의 기적이 아닌가. 이야기의 종결로 갈수록 치밀한 문장과 비유가 놀라웠다.하다 못해 ‘갈색은 중독성이 강하다.’ 커피의 갈색에 중독되면 콜라와 담배와 위스키에도 쉽게 손이 가고 끊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사람을 구원하자는 게 글쓰기’가 맞다. 나는 오늘 행복했다.
내가 얻었던 모든 구원의 순간들에 리스펙. 허여멀건 표지의 책 한 권을 어루만지는 지금 나는 꽤 포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