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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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니 참 진부한 제목이다. 비록 지나치게 상투적이라 해도, 이 신뢰할 만한 사회학자가 ‘고통의 문제’를 주제로 내놓은 책을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른 이름의 저자였다면 아마 이 책을 쉽사리 집어 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고통의 문제’를 궁금해했고, 신학책을 포함해 여러 책을 읽어왔으나 여기에 ‘답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으니. ‘고통을 나눌 수 있는지 여부’에 역시 회의적이다. 고통이란 게 각자에게 절대적인 것인데 누가 누구의 고통을 공감하고 또한 덜어줄 수 있다는 말인가.

다만 나는 ‘고통을 통과하는 몸’만을 경험했고, 경험해 왔다. 날카로운 시간에 더 상처입지도 못하는 극한 고통의 시간까지 지나,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 언젠가… 그때의 시간을 ‘웃프게’ 말할 수 있는 경험. 그건 오직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냈을 때 가능한 치유뿐이었다. 이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내 경험을 정확한 학자의 언어로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으며, 내게 없었던 중요한 요소를 말해 주었다. 내가 ‘곁’을 두려 하지 않았고, ‘곁’을 미워했다는걸.

엄기호의 이전작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의 서문과 에필로그는 ‘감정’이 실려 뜨거웠다. 본문 역시 사유의 밀도가 훨씬 치밀했다. 느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나 치밀해서 줄을 긋기도 힘들었고, 한 순간 주의를 놓치면 다음 문장으로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내용은 어렵지 않았지만 꽤 집중해야 했다. 책은 모두 세 챕터 1부 《고통의 지층들》 2부 《고통의 사회학 》 3부 《고통의 윤리학》으로 구성되었고, 그중에서 내가 가장 공감한 것은 1부였고, 가장 깨달음이 컸던 것은 3부였다.

1부 초반부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진부하도록 너무나 ‘평범한(!)’ 고통의 모습이다. “끝이 없다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인권 현장에서의 고통뿐만이 아니다. 모든 고통이 그랬다. 사회적 관계로 인한 것이건 육체적 질병에 의한 것이건 사람들을 가장 공포스럽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고통에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절망한 이들은 너무나 전형적인 고통의 반작용을 발산하고, 고통의 무의미와 허무에 시달리다 곁에 있는 이들을 괴롭힌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이 말이다. 말인지 주문인지 알 수 없는 소리 언어.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말밖에 고통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고통은 갈 곳을 잃는다. 고통받는 이는 외로움에 치를 떤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에게만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2부의 내용은 ‘사회학’이란 단어를 쓸 것도 없이 너무나 낯익다. 고통을 전시하는 사회에 있어서. 더 큰 고통, 더 비참한 고통을 드러내 전시해야만 이 고통은 관심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고통은 널리고 널렸다. 모든 고통이 가진 절대성을 의미 있게 여기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뉴스 가치’에 도달할 정도의 수준과 내용, 강도인 고통을 건져 올릴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절대성이 아니라 선정성이다. 따라서 이 플랫폼에 올라탈 때 피해자는 자기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물론 이때 돈을 버는 것은 고통의 절대성을 선정적으로 드러내어 주목을 이끌어내는 플랫폼 자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주목은 돈이 된다. 플랫폼에게 말이다. 이때 고통의 절대성은 내 고통이 다른 누구의 고통과 ‘비교’하더라도 절대적으로 고통스럽다는 것으로 의미가 변질된다. 고통 간에 경쟁하게 되고 소위 말하는 고통의 올림픽이 벌어진다. 고통이 고통을 밀쳐낸다. 자신의 고통이 다른 고통에 비해 절대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더욱더 자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통의 콜로세움’에서 계속 뼈저리게 고통받는 이로 살아갈 수밖에. 일단 ‘고통 관종’이 되고 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에 대한 언어는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처절한 자각으로부터 나온다. 말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고 분할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있게 된다. 언어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표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 앞에서 침묵하게 하고 그가 당한 고통의 절대성에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게 한다. 관종 사회는 고통받는 사람의 존엄이 존중되는 바로 이 길을 봉쇄했다.”

한편 엄기호가 이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을 통하여 가장 말하고자 했던 것은 3부, 《고통의 윤리학》이 아니었을까. 고통은 어쩌면, 아주 약간 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주 약간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고통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단어는 ‘곁’이다. 저자는 말한다. “고통의 곁 옆에 또 다른 곁이 있을 때 그는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고통받는 이의 곁이 고통받는 이를 이끌어 함께 걸어야 한다,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게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것이 고통을 나누는 첫 움직임이다. 그렇게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이때 주로 나눈 이야기는 ‘고통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각자가 그 고통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저자의 이야기가 내게는 충격이었다. 고통의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 삶의 자리에서 함께 걷도록 하는 일이 가장 정확한 배려임을 생각도 못 했으므로.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내 통증을 잊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생활이었다, 그것도 바쁜 생활. 내가 있을 자리가 생활 가운데 확실히 있을 때에 나는 ‘고통받는 이’ 대신 ‘유능한 한 인간’으로 나를 정의할 수 있었다. 세상 가운데 내 몫을 확실히 할 때 나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고통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중요한 해답은 읽기와 쓰기다. 고통당하는 이가 가지지 못한 고통의 언어를 시간을 들여 시도하는 것은 ‘고통의 해명’에 있어 정확한 처방이다. 자신에 대한 앎에 이르고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또한 이 언어는 삶을 재건하는 가운데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원이 된다. 여기 소개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민승남 옮김, 민음사, 2004)이나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메이 옮김, 봄날의책, 2017), 프리모 레비의 『고통에 반대하며』(채세진·심하은 옮김, 북인더갭, 2016)를 꼭 읽어보고 싶다.

저자는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고 강조한다. 간접적인 연대만 있다는 것이다. 관건은 그런 간접적인 곁과 곁의 유무다, 고통의 곁. 그 곁에 또 다른 곁을 구축하는 것만이 수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는 고통의 곁을 단단하게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인터뷰한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말미에 첨부한다. 나는 이것보다 더 완벽한 고통의 결실을 본 적이 없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이에 대해 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한 분으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외딴 섬에서 나고 자랐다. 그분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그 동생이 부모님이 뭍으로 출타한 사이에 열병에 걸려 며칠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부모는 돌아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했다. 아이의 상을 치른 후 부모가 한 일은 나에게 말을 전해준 분을 포함하여 자식들을 뭍에 있는 친척들에게 보낸 것이라고 한다. 동생이 죽은 그 고통의 현장에 다른 자식들을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장소에 있는 한 계속해서 그 죽음이 회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이 가족은 동생의 죽음에 대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아무런 죽음도 없었던 것처럼 살았다고 한다. 뭍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어 집으로 찾아갈 때도, 뭍으로 자식들을 보러 부모가 나올 때도, 대학에 진학하고 결혼을 하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아 명절에 방문할 때도, 아무도 그 죽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 지어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죽음은 역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늘 그들 근처에 머물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그 죽음을 늘 의식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죽음이 없었던 것처럼 매일 연기하고 연기하는 만큼 죽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하나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아무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을 잃은 내 슬픔이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에 견줄 수 있을까. 아이를 잃은 내 슬픔이 아무리 깊다 하더라도 어린 나이에 죽음을 목격한, 그것도 부모가 부재한 상황에서 죽음을 목격한 자식은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확하게 또 정반대의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그때의 고통을 떠올리면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내 고통을 아느냐?”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 말이다. 이 두 마음 사이에서 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이 이 가족의 ‘공동’을 파괴하지 않는 일이었다. 고통을 통한 연대가 아니라 슬픔을 같이 공유할 수 없다는 그 침묵으로 이 가족은 서로에게 곁이 되었다. 그 고통을 이야기하는 순간 아무도 누구에게도 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곁이 되었다. 재희의 형제자매들이 어머니의 곁이 된 재희 옆에서 끊임없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곁이 된 것과 달리 모두가 고통의 당사자인 이 가족은 침묵으로 슬픔을 공유할 수 없는 슬픔을 공유하며 ‘곁’이 되었다.

그러나 재희의 이야기에서도, 이 가족의 이야기에서도 곁, 즉 유대와 연대의 가능성에 관해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고통을 통한 연대, 정확하게 말하면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고통을 통해 연대가 이루어진다면, 곁이 만들어지고 그 곁으로부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회’만을 통해 가능하다. 고통의 곁에 곁이 되는 연대를 통해서, 혹은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는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동행과 연대는 고통으로부터 한 다리 건넌 우회만을 허락한다. 이 우회를 통해서만 우리는 고통과 동행할 수 있다. 그 동행을 견딜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고통이 만드는 절망을 동행이 주는 기쁨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그나마 생긴다. 그리고 혹여라도 고통이 끝난다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다. 아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을 계속해서 도모하다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면 고통을 끝맺을 수 있다. 이 가족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바로 그렇다. 죽음으로부터 몇 십 년이 지난 어느 명절에 부모가 계신 섬에 방문했다. 노년에 집을 개조해서 숙박업을 하고 있던 이 집에 웬 낯선 청년이 한 명 있더란다. 어느 날 섬에 흘러 들어온 청년인데, 청소하며 일을 도울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왔단다. 그날로 이 집에 눌러앉게 되었고 밥을 먹는 것에서부터 잠을 자는 것에 이르기까지 스스럼없이 부모와 너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같이 하였다고 한다. “OO가 돌아왔네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 몇 십 년 만에 죽은 동생의 이름이 가족들 사이에서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 숱한 세월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봐 차마 말을 꺼내지 않았던 이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환생해서 돌아온 자식을 두고서야 가슴에 묻었던 자식의 이름을 꺼냈다. 그리고 이 환생한 자식과 더불어 그들은 더 단단한 ‘공동’이 되었다.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언제 고통에 관해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것은 고통이 끝나고 새로운 것이 시작될 때다. 새로운 것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이 책에서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무 가치가 없는 일이기에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끝나지 않는다면 말할 이유가 없다. 말할수록 상처만 더 깊어진다.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말이다. 고통은 끝나고서야 말할 수 있다. 고통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서야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에게 함몰되어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통은 끝나지 않으며, 고통이 끝나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을 도모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도모하다가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 고통은 끝날 수 있다. 환생한 자식과 함께 살아가며 죽은 자식에 대해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며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책 말미에-고통과 연대하는 우회로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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