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개정판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7년 12월
평점 :
‘의학계의 계관시인’ ‘스토리텔러’ 올리버 색스와 늘 붙어 다니는 대표적인 수식어다. 그의 책 한 권을 제대로 읽어본 건 『온 더 무브』 70대 후반에 쓴 자서전이 처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왜 그 수식어가 그에게 붙었는지 알만하다 싶었다. 특이한 글쓰기다. 분명 의학과 과학 용어인데 그리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 정도. 색스는 자기 글쓰기를 “보편성과 특이성을 접합하는 글쓰기 방식(환자들의 임상 사례에 신경과학을 결합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자서전(自敍傳) 『온 더 무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만남’의 이야기였다. 사람과의 만남뿐 아니라 증상과의 만남, 각종 약과의 만남, 취미와의 만남, 자기 성 정체성과의 만남까지. 각종 의학용어와 약 이야기가 난무하는 걸 보면 의학과학자의 글쓰기 티가 난다. 글에서 드러나는 리듬을 보면 예술가의 글쓰기 티가 난다. 그 역시 시와 음악을 사랑한 사람인 것이다.
책의 초반부터 색스는 자기 성 정체성 이야기를 숨기지 않는다. 18세에 성 정체성을 가족에게 밝혔다고 하니 시기는 정석이다. “나는 일과 결혼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 75세에 빌 헤이스를 만났다기에 생애 후반기에 이르러 자기 성 정체성을 깨달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환자들을 사랑하고 연구만 열심히 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놀 만큼 놀기도 한 사람이었다. 모터사이클을 즐겼고, 헬스를 열심히 하고 스쿼트가 특기인, 270kg 역기를 자유자재로 들고 내리는 ‘육체파+지식인+시인’이 올리버 색스였던 것. 아 참, 마약에 중독되어 아주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했다니 그것 역시 의외다. 그러니 여기 ‘방탕한 예술가’도 추가다.
모든 자서전이 그렇듯이 『온 더 무브』의 중반부를 지나가니 좀 지루함이 있기는 했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별로 없이 계속 연구하고 글 쓰고 책 나오는 이야기만 지속되니. 그러다 후반부에 병이 ‘갑툭튀’ 나타나면서 급 흥미진진해졌다. 2000년 후반대에 나타난 오른 눈의 안구 흑색종, 즉 심각한 암 말이다. 색스의 매력은 여기서 폭발한다. 흑색종과도 흥정하는 긍정성. 그리고 이 치료 과정 가운데 나타난 망막 손상과 시지각 증상도 신기한 현상과 연구로 받아들여 『마음의 눈(The Mind’s Eye, 2010)』을 쓰는 호기심. 이런 생의 긍정성과 유머가 색스 인생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뿐인가, 2008년 75세에 만난 빌 헤이스 이야기는 드라마틱과 로맨틱의 극치다. “가끔 돌아보면 내 인생이 일상의 즐거움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곤 했는데, 이것이 빌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달라졌다. 스무 살에 처음 리처드 셀리그와 사랑에 빠졌고, 스물일곱 살 때는 멜을 만나 애만 태웠고, 서른두 살에 만났던 카를과의 관계는 정체가 불분명했고, 그리고 지금 나는(맙소사!) 일흔일곱 살이 되었다.” 올리버 색스는 20대의 연애 이후 35년간 싱글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걸로 치면 나는… 앞으로 멀고 멀었다는 이야기다, 답이 없다는, 망했다.
『온 더 무브』를 읽으며 뼈저리게 남은 건, 역시 글은 쓰고 봐야 한다는 것. 잘 쓰나 못 쓰나 글쓰기는 일단 ‘남는다’ 올리버 색스는 안 되어도 끄적거리기 쟁이는 될 수 있으니. 긍정적으로, 호기심 넘치게, 신나게 쓸 것.
“어렸을 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먹물쟁이라고 했는데, 잉크로 얼룩져 있기는 지금이나 70년 전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열네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장이 현재 1,000권에 육박한다. 늘 들고 다니는 작은 수첩형 일기장에서 큰 책만 한 것까지 모양도 크기도 가지각색이다. 나는 꿈속이나 밤중에 생각이 떠오를 경우를 대비해 항상 머리맡에 공책을 놔두고, 수영장이나 호숫가, 해변에도 웬만하면 한 권 놔둔다. 수영은 생각이 굉장히 활발해지는 활동이어서 특히 완성된 문장이나 단락으로 떠오르면 곧바로 나가서 써놔야 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글을 완성하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었다.
글을 쓰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분명하게 정리된다. 내게 글쓰기는 정신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다.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이 꼴을 갖추어가는 과정 전체가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가 쓰는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닐뿐더러 나 스스로 지난 일기를 꺼내 읽는 것 또한 좀처럼 없는 일이다. 오히려 일기는 내가 자신과 단둘이 대화하기 위해 필요한, 자신과의 대화에 필수적인 형식의 글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종이 위에서 생각한다고 꼭 공책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편지봉투 뒷면도 되고 메뉴판도 되고, 손에 잡히는 아무 종이에든 쓰면 그만이다. 나는 마음에 드는 글귀가 나오면 밝은색 색종이에 옮겨 적거나 타이핑해서 게시판에 압정으로 꽂아놓기가 다반사였다. 시티아일랜드에 살 때는 그렇게 베껴놓은 글귀가 첩첩이 쌓여 바인더 링에다 꿰어 사무실 책상 위 커튼 봉에 주렁주렁 매달아놓기도 했다.
나는 이야기꾼이다. 좋든 나쁘든, 그렇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경향, 서사를 좋아하는 경향은 언어 능력, 자의식, 자전기억autobiographical memory과 더불어 인류의 보편적 특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쓰기는 잘될 때는 만족감과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 어떤 것에서도 얻지 못할 기쁨이다. 글쓰기는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잡념이나 근심 걱정 다 잊고, 아니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오로지 글쓰기 행위에 몰입하는 곳으로. 좀처럼 얻기 힘든 그 황홀한 경지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쉼 없이 써내려간다. 그러다 종이가 바닥나면 그제야 깨닫는다. 날이 저물도록, 하루 온종일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있었음을. 평생에 걸쳐 내가 써온 글을 다 합하면 수백만 단어 분량에 이르지만, 글쓰기는 해도 해도 새롭기만 하며 변함없이 재미나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던 거의 70년 전의 그날 느꼈던 그 마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