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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독서 - 완벽히 홀로 서는 시간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7월
평점 :
2018년 상반기 베스트셀러를 보고 기겁했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같은 책들이 연이어 1,2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교만한 이야기지만 이건 정말 아니다. 많이 팔린 건 그렇다 해도 ‘2018 올해의 책’까지 되는 건 아니란 말이다. 너무나 좋아해 아직 번역되지 않은 678권까지 원판으로 구매해 읽을 정도로 내가 좋아한 앤 시리즈가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이런 거부감 때문에, 작년에 구입한 『여자의 독서』는 딱 파트 1까지였다. ‘빨간 머리 앤’이 눈에 띄는 순간 책을 확 던져버렸다. 나는 나의 편견을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때로 편견 때문에 실수하는 사람. 같은 단어여도 담고 있는 내용은 다르다. 미안, 『여자의 독서』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김진애의 책은 거의 10년만이다. 대학생 때 한 권, 취업하고 한 권 정도 읽었는데 제목도 기억이 안 난다. ‘쎈 언니’라고밖에 할 수 없는 여자, 그리고 ‘억세게 운 좋은’ 여자가 내가 아는 그녀였다. 나는 이런 여자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등 시민인 여자로서 그 위치까지 오른, 그리고 내내 노력해 온 그 사람의 인생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노력이 제대로 과녁에 꽂힐 수 있을 만큼의 환경과 천운은 그녀만의 것이다. 그녀만큼 노력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여자는 수 없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그녀는 ‘억세게 운 좋은’ 환경에서도 꾸준하게 노력했다는 걸, ‘억세게 운 나쁜’ 환경에서도 동일하게 노력했을 거라는 걸. 그 증거 중 하나가 그녀가 읽어온 책이다.
김진애는 책 안에서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책을 안 읽는 사람보다 여러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말도 잘하게 되고 글도 잘 쓰게 된다. 훨씬 더 세련되고 수준이 깊어지고 또 높아진다. 논리적이 되고 전체를 조감하는 통찰력이 커진다. 사실을 포착하는 구조적 능력도 높아지고 윤리적 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 전후좌우를 살피고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비교 안목이 높아지니 균형 감각이 높아질 수 있다. 상상력이 높아짐은 물론 창조 역량도 높아진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정말 이상하기만 하다. 대체 왜 책을 안 읽는 건가?”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녀가 하룻강아지 옛 시절을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은 “대체 왜 책을 안 읽는 건가?”라고 할 만큼 쉽지 않다. 차라리 노동을 하지 책을 읽느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다. 매리언 울프는 『책 읽는 뇌』에서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다. 인류가 독서를 발명해 낸 것은 불과 수천 년 전이다. 인간은 이 발명품을 통해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그렇게 재편성된 뇌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확대시켰으며 그것이 결국 인지 발달을 바꾸어 놓았다. 독서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며 역사의 기록은 그 발명의 결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 했으며, “독서는 뇌가 가소성(plasticity)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비로소 학습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독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의 뇌 안에 이미 생리적, 인지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라고 말하며 독서하는 뇌의 힘겨움을 말한다. 독서는 인간 뇌가 들이는 노력의 부산물인 것이다.
김진애는 자기도 모르는 채 노력해서 읽어온 책을 공개한다. 무엇보다 여성 저자의 책을 이야기한다. 공감능력이 특기고 감수성 풍부한 여성이어서 얻을 수 있었던 독서의 장점과 독서의 능력을 구구절절 이야기한다. 다행히 80프로 정도는 아는 작가와 아는 책들이었고, 나머지 20프로는 이름만 알던 작가였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척 즐거웠다. 내가 읽은 책들을 타인이 어떻게 읽었을지 듣는다는 건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것도 명실공히 프로독서러인 왕언니의 책 이야기를.
중요한 건 ‘그 시절’ MIT에 다녀올 만큼 운이 좋았던 김진애가 ‘지금 시절’까지 잘 보이는 곳에서 잘 사는 여성 모델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것도 그녀의 행운이다. ‘82년생 김지영’이 진짜 운 좋은 중산층 여성의 이야기라는 걸 웬만한 여자들은 잘 안다. 그렇게 보이는 데 존재하는 ‘나이 지긋한 센 언니’가 거의 없다는 데 여자들의 슬픔이 있다.
다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확신하는 건 김진애가 버틸 수 있었던 데 ‘여자의 독서’가 중요한 힘이 되었을 거라는 걸. 현재 ‘잘 보이는 데 존재하는 나이 지긋한 센 언니’는 김진애의 시절에 저의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김진애도 지금의 우리처럼 모델이 되어줄 ‘센 언니’를 갈구했고 그런 ‘센 언니’들을 책에서 찾아낸 것이다.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책 안에 있다. 내가 너무나 만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이 책 안에 있다. 누군가가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은 책에 매달린다. 그리고 독서하는 여자들이 갈구하는 것은 대개 여자다. 내가 닮고 싶은 여자를 여자들은 책 속에서 찾는다, 현실에서는 찾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김진애는 바로 그 이야기를 『여자의 독서』에 썼다. 바로 그 포인트가 나의 공감과 또 다른 그녀들의 공감이다. 한편 인류의 절반인 ‘남자 저자’가 그녀들에게 주는 선물은 무엇인가, “책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감격. 제2의 성인 여자로 살아가는 삶에서 ‘차별하지 않음’은 행복한 감각이다. 두 가지 감각을 경험한 여자들은 책을 외면할 수 없다. 세 끼 밥을 먹는 것처럼 책을 먹게 된다. 인류의 역사상 밥과 가장 가까웠던 여자들이 18세기 이후에야 책을 만났을 때의 감각. 밥 DNA가 있는 그녀들은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책을 먹게 될 것을. 독서에 있어 여자의 성적 장점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독서’는 좀더 본능적이고 좀더 친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