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역사가 바뀌다 - 세계사에 새겨진 인류의 결정적 변곡점
주경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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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한 사람’ 나의 ‘더러운’ 성질을 겪어본 사람들의 평가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따뜻한 사람인 줄 착각한다. 겉보기로는 관대하고 털털한 부분이 분명 있으므로, 그리고 여간해서는 상한 마음을 잘 안 비춘다.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DNA가 그렇게 태어났다. 의식으로는 용서하지만 무의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른다. 내상을 감추는 사람으로 타고난 것이다. 여러 번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상처를 받는다. 선을 넘는 순간 차갑고 냉혹한 인간으로 돌변한다. 《겨울 왕국》에서의 엘사 같은 폭발이다. 완전히 다른 관계성으로, 변곡점(變曲點)을 돌아버리는 순간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한 사람의 역사라면, 인류의 역사를 한 사람의 생애로 비유해 읽는 것이 왜 안되겠는가. 『그해, 역사가 바뀌다』 의 저자는 1492, 1820, 1914, 1945년을 역사의 변곡점(變曲點)으로 읽는다. / (1) 1914년, 에덴동산 입구에 도달하다, (2) 1820, 동양과 서양의 운명이 갈리다, (3) 1914,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다, (4) 1945,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가 / 그리고 이 변곡점을 만든 추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으며, ‘문명의 무의식’과 ‘정신적 자질’을 내비친다.

무의식(無意識)은 자각되지 않은 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의 원인이면서, 의식의 배후에 숨어 있으면서 의식을 조종하는 것일 수도 있다. 19세기 후반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egmund Freud)에 의해 무의식이 소개되면서 인간의 행동과 정서를 지배하는 욕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으며, 분석심리학자 카를 융(Carl Jung)에 의해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이 연구되면서 인류의 역사와 문화 안에 자리 잡은 정신적 콘텐츠의 집합체가 가진 막강한 파워를 인정하게 되었다. 저자는 넓고 얕게, 혹은 좁고 깊이 파고들어가는 이야기로 역사의 변곡점에 있었던 일들을 표현한다. 물질적인 변화뿐 아니라 내면적인 변화도 파고들어본다. 그리고 저자의 입담은 환상적이다. 질투는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대등할 때나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데 입담도 좋아!! 글도 잘 써!!” 인생 불공평하다. 턱도 없는 그분에게 질투가 날 만큼 말이다. 완! 전! 재! 미! 다!

책의 첫 관문은 1492, ‘아이 네 구두’로 알려진 콜럼버스에 대한 것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면서 구두를 빠뜨렸고, 그래서 ‘1492년’으로 외웠던 바로 그 변곡점이다. 한 번도 콜럼버스에 대해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게 그는 언제나 식민을 유도한, 장기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원흉이 된 나쁜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가 종교심이 강한 신비주의자였고, 투지가 넘치는 활동가였고, 열정이 넘치는 독학 주의자였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아주아주 오래전의 수능 사회탐구 영역 이후로 역사를 들여다본 것이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르는 것에 대한 생소함보다는 재미있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부여하면서 저자는 유럽 문명이 가진 세계관과 정신력에 대해 서술한다. 문명과 야만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대립하고 충돌한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이제는 1820년, 서구가 패권을 장악한 지금의 경제구조가 만들어진 변곡점을 서술한다. 과거에는 중국이 가장 큰 부를 장악했다. 동양과 서양의 운명이 달라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다를 버리고 차지한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중국은 정화(鄭和)의 대항해를 마지막으로 바다에 관심을 잃었다. 그러나 서구는 탐욕스럽게 바다를 정복하고 교류를 핑계 삼아 타국을 욕심냈다. 게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동양과 서양의 경제적 지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저자는 인구 역사상 경제성장의 대부분이 19세기와 20세기에 급속도로 이루어졌으며, 1820년대에 경제적으로 앞섰던 국가들이 크게 성장했음을 밝힌다. 세계 경제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1914년은 인간이 자연을 통제, 망친 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변곡점이다. 이때 마지막 나그네 비둘기 ‘마사’가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멸종한다.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는 치명적이다. 근대 이후 자연은 인간에 의해 크게 파괴된다. ‘종석종’과 마찬가지였던 몇 종의 생물들이 피해를 입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파급효과는 너무나 컸다. 여기서 언급된 인디언의 생태·생명관에 나는 관심이 있다. 조화와 균형의 상태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마다지윈(pimadaziwin)’한, 인간과 동물 그리고 자연으로 어우러진 온 세상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는 이제 깨어졌다. 역병이 돌고 동물은 무차별적으로 사냥된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변곡점을 말한다. 1945년은 2차 대전의 끝을 맺는 해다. 미인대회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언제나 나오는 미인들의 멘트가 있다. 자신들이 바라는 것은 “World Peace”라고. ‘세계 평화’는 진부할 정도의 세계적 가치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가?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역사상 폭력의 문제는 언제나 일반적이었다. 전쟁은 언제나 있어왔고,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거나 폭력은 일상이었다. 무력의 발전과 쇠퇴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중요한 것은 문화다. 문화의 양상에 따라 고대와 중세, 근대의 전쟁 모습은 다른 모습을 띤다. 저자는 이 챕터에서 스티븐 핑커와 엘리아스의 연구를 활용해 ‘세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같다. 엘리아스는 에티켓을 통해 인간의 육체성을 통제했다고 말하고, 핑커는 ‘숫자’가 아니라 ‘확률’을 보면 인류는 점점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더 많이 보고 듣게 되어서 그렇지 우리 본성에는 선한 천사가 잠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울한 세계관을 가진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는 못한다. (개인적으로 스티븐 핑커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두께의 그 책을 다 읽을 수가 없어서 뭐라 확언할 수 없지만, 우울한 심성과 비관적 세계관을 가진 내게, 스티븐 핑커의 찬란한 긍정성은 놀라울 뿐이었으므로. 또한 핑커의 인간성에 관련된 스위트한 이야기들은 로맨틱한 이미지들을 그리게 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좋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주경철 교수는 역사(과거)를 통해 미래를 풀어나가기를 바란다. 4차 산업혁명이니 뭐니 하면서 인간에 대한 존중과 가치의식이 땅에 떨어진 이때에, 사람의 미래를 걱정하는 데에는 공부를 많이 한 교수님이나 나같이 잘 모르는 인간이나 비슷한가 보다. 지난달에 읽었던 『호모 데우스』와 『그해, 역사가 바뀌다』 모두 인류의 미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책이 마무리된다는 것에는 동일하다. 솔직히 나는 더 이상 내 미래를 장밋빛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현상 유지만 해도 다행이라고 여기며, 거절될 것이 두려워 무엇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인류의 미래에 ‘피마다지윈(pimadaziwin)’이라니! 바라기에는 감히 너무 큰 아름다움이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시간은 40년 가량이다. 나는 어떤 생을 눈과 뇌에 담고 떠나게 될까. 나의 기대 없음이 철저히 거절되기를 바란다. 나같은 인간의 비관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끝내 믿어보는 이들이 놀랍도록 승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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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이 문제다 - 대한민국 99%의 내일을 위한 전략
김윤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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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 오늘도 일찍 집을 나섰다. 주말 업무를 맡아 초과근무를 달고, 1층부터 4층까지 바삐 오르내리며 일하고, 초과근무 대장에 칼같이 시간을 적고 나간다. 퇴근길 신간 뉴스를 읽다가『과로노인』이라는 책을 발견하고, ‘평생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정해진 미래’라는 부제를 읽으며 나 자신을 떠올렸다. 가끔 비는 주말에도 회의하러 또는 심사하러 멀리 출장을 간다. 11월 말까지는 한 주도 쉴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심사비는 ○원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일도 출장이 잡혀 있다.

“더 많은 소비와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사람들은 더 많이 일한다. 야근, 연장근로를 통해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돈을 벌려는 것이다.” 일중독 사회를 설명하는 첫 문장에 가슴이 ‘쿵’ 떨어졌다. 더도 덜도 없이 바로 내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턱없이 부족한 월급 때문에 방과후를 하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소문을 듣고) 들어오는 강의도 주저 없이 받았다. 이제는 거절할 수가 없다. 한 번 거절하면 다음 번에는 내가 원해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월급쟁이의 중간 연봉(2225만 원, 2017.01)에 비해 적지 않은 월급을 받지만 언제나 부족하다. 기사의 숫자가 정확하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나마 나은 형편일 나 역시도 내 빠듯한 미래를 순간순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경제적 문제는 절대적이다. 세상 천지 두려움 없는 듯한 나도, 경제력 앞에서는 다르다. 생계의 문제에 자신감이란 생기지 않는다. 『불평등이 문제다』의 저자 김윤태는 ‘흙수저 집안의, 나이 많은, 여자인’ 나를 위로한다. 네가 능력이 없어서 불안한 것이 아니라고. 이 불안의 밑바닥에는 대한민국을 침투한 ‘불평등’이 있다고.

『불평등이 문제다』는 묵직하다. 엠보싱 처리된 두툼한 표지와 파란 은박 인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 역시 밀도 높기는 마찬가지다. 내용은 낯설지 않고 문장은 유수라 읽어내리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왜 이렇게 속도가 안 나가는가, 페이지마다 빽빽한 최신 통계 때문이고 수많은 학자들의 어록과 이론 때문이다. 한편 이것은 장점이다. 차근차근 읽어내려가면서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던 경제학 용어, 시장경제 이론의 틀이 다시 짜인다. 머릿속 하얀 노트에 파란색 펜으로 필기하며 한 페이지를 채우고 넘기는 느낌이 만족스럽다. 책은 3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현재, 불평등이 만든 사회 현상을, 2부는 원인을, 3부는 15가지의 대안을 제시한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불평등이 어떻게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왜 사회의 불평등이 커지는지, 어떻게 불평등과 싸워야 하는지’를 쓴 책이다.

먼저, 현실을 짚어본다. 한국인은 왜 모두(?) 불행한가. 가난이 빚을 만들고 부채가 불평등을 심화한다.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 새로운 신분제 사회가 등장한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순식간에 몰락한 나는 자신이 없다. 다시 중산층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다. 고백한다.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이 내게 있다고.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다음, 김윤태 교수가 말하는 것은 구조의 문제다. 한국이 불평등해진 원인은 극단적인 세계화와 자유 시장주의 논리 때문이었다. 기업은 횡포를 부리고 노조는 망가졌다.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했다. 민주화의 표면 아래 불평등은 감추어져 있었으니. 그는 순수한 능력주의는 없으며, 엘리트는 결코 선하지 않다는 것, 낙수효과는 허상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밝힌다. 한때 내가 철저하게 속았던 자아도취적 자기계발과 멘토링, 힐링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저자의 능력에 감탄했다. 저자는 사회의 구조 문제를 비난하지만, 나는 저자의 구조적 설명 능력에 환호한다. 머릿속에 잘 정리하지 못해 갑갑해하던 부분을 번호를 붙여가며 시원스레 설명해주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불평등한 한국의 새판 짜기’라는 제목이 인상적이다. 정말 이것이 가능할까? 나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꿈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평등의 개념이 정리된다. 형식적 평등, 기회의 평등, 결과의 평등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가 원하는 평등과 자신에게 필요한 평등도 구분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노동권’을 강조한다. 제대로 일하고 제대로 대가를 받고, 인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삶을 원하는 것이다. 저자가 부르짖는 것은 또한 ‘복지국가’다. 복지에는 돈이 든다. 모든 정책은 세금에서 나온다. 세금은 결국 정치다. 그래서 국민의 조세 인식은 중요하다. 복지 확대는 돈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숨을 내쉰다. 월급명세서에 가장 잔인한 원천징수 세금이 늘어날 것이다. 감정과 머리는 별개다. 그래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어디에나 문제의 결론은 한 곳으로 흐른다. 해답은 오직 정치다.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정책과 조세정책밖에 없다. 저자가 정책으로 제안하는 15가지 방안이 이 책의 핵심이다. 누군가는 이 대안이 새로울 것 없다 할지 몰라도 나는 무척 의미 있다고 본다. 만약 책이 빽빽해서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전에 마지막 열 장 정도만 읽어보기를 긴히 권한다. 바로 이 열다섯 가지 과제가 제시된 부분이다. 누구나 책을 샀으면 책값은 뽑아내야 하지 않는가. 물론 『불평등이 문제다』를 제대로 읽으려면 끝도 없다. 나로 말하자면 조목조목 간결하게 정리된 학자들의 이론과 어록만으로도 책값은 하나 아깝지 않다.『불평등이 문제다』는 “완전 킹왕짱!”이다.

사회성 부족하고 게으른 내게 독서모임은 감정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무척 중요하다. 제대로 이해하려고 철저히 재독과 삼독을 하는 책이 매달 늘어난다. 재독을 위해 흰 커버를 다시 넘기고 머릿말을 읽는다. 첫 문장을 읽고 한번 더 웃었다. “지금 어떤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불평등’이라는 유령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뛰어넘는 첫 문장은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같은 책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린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너희가 잃을 것은 오로지 쇠사슬이요 너희가 얻을 것은 전 세계다” 그러하니『불평등이 문제다』의 마지막 문단, “불평등과 싸우는 노력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평등의 가치는 도덕적으로 훨씬 더 우월하다.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평등한 사회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아무리 세계화, 정보화, 유연화, 노동조합의 약화, 개인화의 추세가 평등의 정치를 가로막아도 평등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0년의 세계사에서 볼 수 있듯, 앞으로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든 평등의 정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역사에서도 평등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불평등 사회를 만든 것처럼 그것을 바꿀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에 필히 한 문장을 덧붙여야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이여 단결하라. 너희가 잃을 것은 오로지 불평등이요 너희가 얻을 것은 평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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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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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의 힘은 증기와 전신기계의 힘보다 훨씬 더 강하고, 이것들은 그저 식품, 섬유, 자동차, 무기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의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디킨스의 영국과 마디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실은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 21세기 진보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신성을 획득하는 반면, 뒤처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다. (유발 하라리,『호모 데우스』)”

두꺼운 책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제아무리 재미있는 입담(?)의 작가가 썼다 해도 말이다. 술술 잘 쓰기로 유명한 로버트 그린이나 강신주의 책이라 해도 그렇다. 『사피엔스』 역시 재미는 있었지만 끝까지 뒷심을 발휘해 읽기 쉽지 않았다. 사피엔스의 후속작이라는 『호모 데우스』역시 마찬가지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책을 샀으니 일단 진지하게, 주의가 산만해지면 목차 구조를 손으로 콕콕 짚어가며 여러 번 읽어야겠지.

목차 상의 독특했던 점은 1장이 서문격으로 분리되어 있고, 2장부터 1부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도입부 1장에는 인류가 기아와 역병, 전쟁을 극복했던 것을 설명하고, 불멸과 신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을 설명하던 전작 『사피엔스』의 내용과 같은 흐름이다. 1부《호모 사피엔스 세계를 정복하다 》에서는 호모 사피엔스와 주변 생명과의 관계를, 2부《호모 사피엔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다》에서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상의 종류와 관계성을 설명한다. 4,5,6장은 어떻게 경제적 사회적 의미가 결국 인본주의로 흘러가는가를 말하고, 그렇게 맞게 된 7장 ‘인본주의 혁명’이 2부의 핵심이리라. 3부《호모 사피엔스 지배력을 잃다》에서는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바를 펼치는데, 인공지능과 데이터교를 제시하여 미래를 예지한다.

“이런 식으로 데이터교는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 했던 일을 호모 사피엔스에게 하겠다고 위협한다. 역사의 경로에서 인간은 전 지구적 네트워크를 창조했고, 모든 것을 그 네트워크 안에서 수행하는 기능에 따라 평가했다.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부추겼다. 인간이 이 네트워크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했으므로, 우리 인간이 네트워크의 업적을 가로채고 우리 자신을 창조의 정점으로 보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네트워크 안에서 훨씬 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으므로 그들의 삶과 경험은 평가절하되었고, 수행하던 기능을 멈추는 동물은 멸종했다. 하지만 인간이 네트워크에서 수행하는 기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창조의 정점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신성시한 바로 그 잣대가 우리를 매머드와 양쯔강돌고래처럼 잊힌 존재로 만들 것이다. 먼 훗날 되돌아본다면, 인류는 그저 우주적 규모의 데이터 흐름 속 잔물결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유발 하라리,『호모 데우스』)”

데이터교(敎)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종교는 과거의 신을 섬기지 않는다. 인간을 섬기는 척하며 지배하는 종교다. 인간은 악한 존재인데, 이 인간을 샅샅이 뒤지고 지배하는 데이터교는 얼마나 잔악하기 쉽겠는가. 뻔뻔한 구글 신과 교활한 페이스북 요정은 어느새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구글은 유튜브를 통합해서 로그인 연동을 하지 않으면 기능을 제한할 것이라 으름장을 놓는다. 페이스북은 내 맘에 쏙 들 희한한 상품들을 눈앞에 가져다주며 사라고 유혹한다. 나 같은 구두쇠도 가끔은(혹은 자주) 넘어간다.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이의 사진을 디밀며 친하게 지내면 어떻겠냐고 놀래킨다. 다시 한 번 ‘잊힐 권리’를 주장하며 나는 비명을 지른다. 데이터 알고리즘의 세계에는 인간세계의 다정한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망각은 아름다운 것이며 사라지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데이터는 ‘어글리’하다. 물론 데이터는 정확하다. 내 두뇌보다 훨씬 기억력이 뛰어나고 예리하고 몰인정하고 잔인하다. 확실한 약점을 찾아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를 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요리조리 피해 다닐 수 있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까. 물론 나만이 가진 불만과 불안은 아니다.

『호모 데우스』라는 제목은 당연히 반어적이다. ‘신이 된 인간’일지, ‘신이 되려다 몰락하여 노예가 된 인간’일지 아직은 모른다. 미래는 복불복이다. 낙원이 아니면 지옥일 것이고, 미래만 떠올리면 불안한 인간이 예상하는 쪽은 분명 후자이리라. 특히 유발 하라리가 강조(혹은 경고)하고 싶어 하는 것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힘이며, 종교에 가까운 데이터교에 대한 신뢰(?)다. 데이터교를 활용하여 인간은 신이 되려고 하나 그럴수록 인간은 추해질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데이터 알고리즘이 정확해질수록 인간의 판단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실수는 적나라하게 표출될 것이다. 그렇다고 믿을만한 초인간, 데이터 귀족에게 미래를 의탁할 것인가. 데이터 엘리트는 지금의 정치가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권력을 가질 것이다. 이제 인간은 색다른 고민을 해야 한다. 보잘것없어진 인간의 격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뇌를 조작하여 많은 것을 극복하는 미래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인간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과제를 제시한다. 인간성은 지금과는 크게 다른 양상을 띠게 되리라. 인간은 어디까지 자신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디까지 자신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적어도 나는 그런 작아진 인간의 나를 비추어 보고 싶지 않다.

자주 소리 없이 탄식한다. “얼마나 오래 살지 몰라서 오늘만 생각하고 살 수가 없다.”라고. 진심으로 고민한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 내가 공부한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 쓸모 있을까. 백 세 시대에 나는 어떻게 60을 맞이하고 100세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 너무 잘 안다. 수첩에 꼼꼼히 세워놓은 계획도 사실 다 쓸모없는 것이라는걸. 그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써보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게 미래를 살아야 하는 인간의 불안이다. 안 보려다가도『호모 데우스』같은 책을 읽어버리는 인간의 불안이다. 책을 덮으며 저자에게 묻는다. “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거야? 겁만 주고 말이야!”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조지 오웰의 『1984』를 여러 번 떠올렸다. 데이터 엘리트이자 ‘호모 데우스’인 빅 브라더가 아니라 그저 ‘사피엔스’인 다른 사람들이. 윈스턴과 줄리아의 연약한 투쟁이 생각난 것은 오버일까. 인간의 뜻이나 의지는 애초에 지워지고, 인간의 욕망마저도 왜곡시켜 마음대로 조종해낼 수 있는 시대에, 거기에 값하는 인간성은 더 희귀해질 것이다. 무엇이든 지불해보려 하다가도 또한 패배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슬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이 실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책, 그러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동일하다. (저 무서운 꼴을 다 보도록) 너무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 책에서 비추어주는 실로 정확한 미래가 오기 전에, 아니 온 이후에라도 내가 뜻하고 사랑하는 방식을 고집하며 살고 싶다. ‘호모 데우스’의 세상에서 불가촉천민인 ‘사피엔스’로 살게 되더라도 내가 원하는 모습을 잊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을 ‘나는 절대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 내가 바라는 사람을 ‘나의 절대적인 사람’으로 정의하는 것. 패배의 마지막까지 고집하고픈 내 미래가 있다면 분명 그것일 것이다. 물론 윈스턴과 줄리아는 패배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데이터교와 알고리즘의 세상에서도 ‘만에 하나’ 양립할 수 있는 미래일지 모르지만, 더욱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신념, 시선과 온도다.

다짐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와 당신에 관한 우선순위만큼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어도 내게 ‘인간’은 가장 아프고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므로. 세계를 정복할 듯 완벽한 ‘호모 데우스’의 세상에서도 ‘사피엔스’로 연약한 당신만큼은 절대 내게 그러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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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피었다
치하야 아카네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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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친하게 지내던 잉꼬부부가 있었다. 성실하고 믿음이 좋으며 똑똑하고 상냥하고 살림 잘 하는 오빠(이게 얼마나 어려운 조건인지 교회 다녀본 사람들은 다 안다)와 애교 많고 다정하고 너그러운 언니와의 만남은 어느 데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특히 집안의 반대를 극복한 드라마틱 연애와 결혼 이야기는 두 사람의 ‘천생연분’을 의심하지 않게 했다. 그러나 십여 년이 지나 알게 된 두 사람의 현실은 나의 예상과 너무나 다른 곳에 있었다.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무자녀 주의자인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어려움 때문에 관계는 깨어졌고, 각자는 다른 사람과 재혼해 (아이를 갖지 않고, 혹은 아이를 여러 명 갖고) 너무나 다른 삶을 또 달리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첫 꽃》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잠시 그들을 생각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그에게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무엇인지 타인은 절대 알 수 없다. 각자가 품고 있는 절대적인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상처를 얻고, 한편으로 이야기를, 개성을 얻는다. 『벚꽃이 피었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평범하지 않다. 조금씩, 아니 많이 비뚤어진 데가 있는 이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책표지에는 “조금은 서투른 남자와 여자의 일곱 가지 사랑 이야기”라는 문장이 인쇄되어 있다. 나는 서툴다기보다는 불안한 남녀라고 말하고 싶다. 일곱 이야기의 주인공은 각자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하는 것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한다. 무표정한 미술관 직원, 남편이 잊지 못하는 사별한 아내 때문에 자기를 상처 주는 여자, 아빠에게 상처받은 엄마를 미워하면서 자기의 여성성을 불안해하는 아이, 뚱뚱한 외모에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남자, 사회성 떨어지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는 도서관 아르바이트생, 소녀의 유령을 보는 부정한 욕망을 지닌 소녀를 통해 우리 모두는 성치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나 역시 성한 데 없는 상처투성이, 불안해서 비뚤어진 인간이란 데에서 안심한다.

구구절절 적었지만 이 책의 위로는 《작가의 말》에서 폭발하고 맺음한다.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어질 수는 있다. 아름다운 것, 다정한 것, 강렬한 것, 마음을 뒤흔드는 그런 것들을 접하면 사람의 마음은 한순간에 움직인다. 그럴 때에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무척 행복한 일이다. 그 순간은 분명 그 사람을 지탱해줄 것이다.” 부족하고 복잡한 인간 가운데 우리는 함께 불안하고 함께 서글퍼도 좋을 한 사람을 찾아 헤맨다.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언젠가의 봄날, “그 사람과 함께 벚꽃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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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장소, 환대 현대의 지성 159
김현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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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설웁다”

벌써 사회생활한지 15년에 가까워진다. 몇 번의 이직 끝에 자리 잡은 이 직업도 이것저것 다 합하면 10년에 가깝다. 아직은 경력 많은 막내 역할이지만 어찌 됐건 기득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서러움을 생각한다. 나의 사람됨이 사람으로 존중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동료에게도, 고객님(?)에게도. 나와 당신의 존엄이 지극히 보호받을 권리는 나날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 인권은 최우선 권리라는 것은 문자 상의 언명일 뿐이다. 문자와 현실은 일치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그것이 안 되어서 나와 당신은 매일 좌절한다.

독서모임 책으로 『사람, 장소, 환대』를 추천한 이유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매일이 나날이 서러웠기 때문이며, 조건 없는 환대가 간절했기 때문이다. 나는 ‘환대’라는 단어에 무너진다. 읽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환대’만큼 인간에게 너그러운 단어가 없다. 저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가지 상호작용하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나의 ‘사람다움’을 위해 타인이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타인의 ‘사람다움’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는 ‘사회적 성원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성원권이라 함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사람’은 사회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인간인 것이다. 나 홀로 사람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서 나는 사람이 된다. 상호작용 속에서, 의례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사람으로 확인된다. 이것이 환대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연기하고 사람됨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가면도 쓰고, 내 얼굴을 위해 모욕을 거부하고 명예를 지킨다. 신성함을 지키려고 존엄을 몇 번이고 확인하기도 한다. 굴욕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저자는 여러 관점을 제시하고 관계성을 서술하지만 나는 사람의 본질이 생명의 영역에 사람됨이 더해지기에 신성하다고 판단했다. 인간은 신성한 존재이므로 모욕 받을 수 없는 존재이고, 굴욕 받지 않기 위해 존엄을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기에 누구든 서로 함께해야 하는 불문율이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타인과 함께 온전해질 수 있다.

또한 ‘사람은 장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장소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고, 어떤 의미로는 장소가 (시간과 결합하여)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머물 자리, 그가 현상할 자리, 그가 사람으로서 사회적 활동을 할 자리를 주어야 한다. 한편 장소는 ‘오염의 메타포’로도 설명된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라는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주 등장하면서 장소성이 사람을 제약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린다. 이 온건해 보이는 명제 뒤에는 차별에 대한 은폐가 숨어 있다. 하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바깥-안으로 남-여의 장소를 구분하는 가부장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다양한 예시로 안-밖의 구별이 대칭적이지 않으며 장소의 제한이 지배성을 강화한다는 것을 알린다.

본격적인 환대를 설명하기에 앞서, 저자는 상호작용과 의례를 통해 유동적으로 확인되는 인격에 대한 설명을 추가한다. 낙인과 배제, 신분과 모욕, 굴욕과 명예를 통해 사회는 역동적으로 사람에 작용한다. 사회가 사람대접을 해 주고 안 해주고의 문제는 한 개인의 존엄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때때로 폭력으로 존재감을 나타낸다. 얼굴을 유지하는 데는 돈이 들며, 사교라고 하는 명예가 걸린 게임에 참여하는 데는 자본이 든다. 옷과 신분, 경제력, 각종 관계성으로 사람은 구분된다. 이렇게 움직이면 굴러가 버릴 가벼운 권력의 차이로 사람의 값어치와 존엄은 달라진다. 경제적인 소외가 사회적으로 확장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환대란 무엇인가, 저자의 말을 빌자면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는 환대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은 장소에 서서,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손을 잡는 일’이 나의 환대다. 이것을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다른 것이 아니다. 차이와 구별을 생각하기보다는 함께를 생각하는 것이 환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미니즘이 단순해진다. 남과 여가, 그리고 또 다른 성이 함께 현상하는 것이 환대다. 저자는 ‘절대적 환대’라는 말로 환대의 정점을 설명한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가 그것이다. 그리고 사회란 본디 절대적 환대를 통해 성립한다고 강조하며, 아직 누리지 못한 이 유토피아가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서 그런(절대적 환대의) 사회는 언제나 도래해 있다"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이상을 담대히 선언하는 것, 이것이 진보다.

저자는 1장 《사람의 개념》으로 시작해 7장 《신성한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자기를 위해서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 그러므로 신성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환대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의 환대가 있다면, 몸도 마음도 헐벗은 한 사람은 기꺼이 환대 받을 권리를 얻는다. 한 사람 때문에 또 한 사람의 인생은 무너지기도 하고 부활하기도 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장소를 얻고, 또한 사람으로 인해 환대 받는다. ‘인간’이 온전해지는 것은 ‘사람’에게 있다.

나는, ‘환대’라는 단어로 나에게 무너지는 설운 한 사람을 따뜻하게 끌어안고 싶다. 그리고 “아름다운 그대여, 당신이 나를 하루 더 살게 해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따뜻하고 아름답고 절대적인 환대다. 단 한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무너져도 된다. 전적으로 나에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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